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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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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기탱천 ‘오빠’

등록 2008-10-10 13:51 수정 2020-05-03 04:25

언제부턴가 연예인들이 더 이상 ‘오빠’가 아니게 되었다. 한때는 나에게도 ‘강타 오빠’와 ‘에릭 오빠’가 있었고, 동갑인 연예인 누가 수시 모집으로 대학에 합격했다며 교실이 떠들썩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세상의 ‘오빠’들이 내 과외 학생뻘로, 사촌동생뻘로, 혹은 조카뻘로 어려지는 것은 이상하게도 순식간이었다. 가수, 배우, 모델 등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십대 연예인들을 인터뷰하게 되는 일도 당연히 늘었는데, 이십대의 마지막 해인 올해 들어 나는 그들과 마주할 때마다 즐겁긴 했지만 어딘가 우울해졌다.
그러다 며칠 전, 후배의 2PM 인터뷰 현장에 따라가게 되었다. “그녀의 입술은 맛있어. 입술은 맛있어. 10점 만점에 10점! 그녀의 다리는 멋져. 다리는 멋져. 10점 만점에 10점!”이라는, 만약 부장님이 여직원 상대로 한 발언이라면 당장 신고감인 가사의 노래 을 남고생들끼리의 수다처럼 신나게 불러제껴 그저 웃음 짓게 만드는 이 일곱 명의 청년들은 무대 밖에서도 활기가 넘쳤다.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났으니 내 또래들과는 팔다리 길이부터 다른데다 춤과 운동으로 가꿔진 탄력 넘치는 근육까지 갖춘 그들은, 그리고 무엇보다 ‘쫄지’ 않았다. 카메라 앞에서도, 녹음기 앞에서도.
왜 자기가 가수를 하게 되었는지, 반대하는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춤을 배우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어떤 음악을 좋아하고 앞으로는 무슨 음악을 하고 싶은지. 그들의 이야기는 진지하면서도 거침없었다. 나와 동년배인 아이돌 가수들만 해도 솔직한 생각을 말하거나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에 서툴렀던 과거를 떠올려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어른들이 보기에는 그저 떼로 나오는 댄스 가수일지도 모르지만 자기가 무엇을 잘하는지 알고, 특히 잘 맞는 분야를 고민하고,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눈앞의 것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인생의 법칙과 마주해본 이들은 스물 남짓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당당하고 여유로웠다. 그 나이 때 고민했던 거라곤 문과 갈까 이과 갈까, 오늘 야자 튈까 내일 야자 튈까뿐이었고 잘하는 걸 고르라면 수리탐구I보다는 언어영역 정도였던 나는 그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2PM을 비롯한 그 세대의 아이들이 멋진 것은 단지 유명해졌거나 돈을 많이 벌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명문대 입학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학교에 들어왔다. 선배의 빛난 입시 성적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는 이기주의적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는 친구의 타도에 이바지할 때다”라며 현실을 비꼬는 ‘고교 교육 헌장’이 떠돌 만큼 십대의 자기결정권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나라에서, 일찍부터 스스로 고민하고 노력해 자기 인생의 길을 결정해서 출발했다는 것 자체가 멋진 거다. 나는 이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진리를 이십대 중반이 지나서야 알았다. 많은 시간과 돈을 허비한 뒤였다. 중학생이었던 내가 “공부는 왜 해야 하는데요?”라고 물었을 때 아버지가 화내시지 않았더라면, 아무 회사에서나 월급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대입 원서를 쓰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하지만 무의미한 가정이라는 것도 안다. 이제 중요한 것은 10점 만점에 10점은 못 되더라도 5점은 넘는 어른으로 사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서른까지 93일 남았다.
최지은 〈매거진t〉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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