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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서린 생각의 쉼터

박영선의 양귀비 머그컵
등록 2012-07-06 16:52 수정 2020-05-03 04:26
박영선 제공

박영선 제공

“아무리 바빠도 장미꽃 향기 맡을 시간을 가져라!”

방송사 입사 동기생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백악관 대변인이 기자들에게 한 말이라며 정치인이 된 나에게 해준 말이다. 정치부 기자를 오래했던 그 친구는 국회라는 곳이 숨 넘어갈 듯 펼쳐지는 일이 많은 곳인데, 그럴수록 장미꽃 향기를 맡을 시간을 가져야 한다며 꼭 이 말을 실천하라고 강권했다. 아무리 바빠도 여유를 가지라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 누구든 자신의 쉴 곳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숨을 헐떡이며 미친 듯이 뛰어야 할 때도, 자동차 엔진을 고속으로 회전하듯 머리를 돌려야 할 때도 잠시 생각이 머무는 곳이 필요하다. 그때마다 난 책상 위에 놓인 머그컵 하나를 들여다본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렸다는 양귀비가 새겨진 찻잔 하나.

그 머그컵을 들여다보면 언젠가 좋아하는 고흐 그림을 실컷 볼 수 있었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고흐 미술관으로 잠시 생각의 여행을 떠날 수 있다. 고흐의 작품만 모인 그곳 미술관의 2층 건물 속 그림들이 머릿속을 메울 때, 세상의 어지러운 일들이 잠시 내 머리를 떠나 백악관 대변인이 말했던 장미꽃 향기를 맡는 시간이 만들어진다. 아니, 어쩌면 그 머그컵을 들여다보며 일부러 그런 시간을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5~6월에 흔히 만나게 되는 들판의 양귀비꽃. 그 유혹에 취해 유럽의 들판을 사랑하게 됐던 기억, 그 유혹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으려 했던 화가의 열정을 떠올리며 여유와 그 속의 열정과 나른함을 한없이 부러워하다 보면 상상은 곧 즐거움으로 변한다. 그 즐거움 속에 세상일의 어지러움이 주는 피로감을 잊곤 한다.

고흐는 저 양귀비꽃을 어떤 마음으로 그렸을까? 마음속의 그리움이 양귀비꽃이었을까, 아니면 가난한 화가의 분노를 삭여야 했을까? 고흐의 양귀비 그림 머그컵을 통해 잠시 유럽의 들판 여행을 다녀온 뒤 다시 생각을 정리한다. 비록 머릿속에서 떠난 여행이지만 그 전후로 생각의 속도와 방향은 변해 있다. 여행 전 짜증만 나던 세상의 일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고흐의 양귀비 그림이 새겨진 머그컵이 주는 추억 때문일까, 아니면 목말라하는 이에게 버들잎을 띄워주던 삶의 여유가 주는 지혜 때문일까?

우리에게는 지금 삶의 고단함으로 지친 마음을 위로해줄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위로받고 싶은 많은 이들에게 정치도 고흐의 양귀비꽃처럼 생각의 쉼터를 줘야 한다. 그러나 쉼터는커녕 그 과정은 늘 아귀다툼처럼 보여 오히려 상처가 되고 만다. 그래서 속상할 때가 많다.

고흐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정치의 길도 평탄치 않지만 그 결과물이 그가 그린 그림처럼 많은 이들에게 생각이 쉬어갈 자리를 마련해줄 날을 기대해본다. 그런 기대감과 속상함이 있을 때 더 들여다보게 되는 양귀비 머그컵, 그리고 당신의 머스트해브. 누구에게나 자신의 책상 위에 추억이 서린 생각의 쉼터를 놓아둘 것을 권한다.

민주통합당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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