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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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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평 근심

등록 2012-06-27 10:47 수정 2020-05-03 04:26

나는 ‘생초보 도시농부’다. 이세영 기자의 ‘도시농부 도전기’(906호 특집 참조)를 읽고는 냉큼 북한산 밑으로 달려가 5평(17m²) 텃밭 임대 계약을 했다. 4월21일, 폭우가 쏟아지던 날 계약을 마치자마자 밭을 갈고 상추 모종 따위를 심었다. 그날 이후 주말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텃밭으로 달려갔다. 상추·겨자채·대파·고추·토마토·감자·땅콩·가지·오이·호박 따위를 정성스레 돌봤다. 아는 게 없으니 텃밭에서 조금이라도 덜 헤매려면 관련 서적을 뒤지는 수밖에. 평생을 밭에서 지낸 촌로에겐 영락없는 도시내기의 소꿉장난일 터. 하지만 내겐 5평 텃밭도 버겁다. 해야 할 일이 참 많다. 호박 넝쿨의 생명력은 10주차 도시농부를 패닉에 빠뜨릴 정도로 엄청하다. 다른 작물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넝쿨이 타고 오를 유도지주를 세워야 했다. 텃밭의 작물이 부리는 생명의 조화가 경이롭다. 여기저기 쑤시는 몸의 고단함을 잊고도 남는다. 상추는 모종을 심고 보름 뒤부터 수확했다. 다 따냈는데, 주말에 가보면 엄청 자라 있다. 양이 넉넉해 때로 회사 동료들과 나눠 먹기도 한다. 상추는 키우는 게 아니라 그냥 자라는 것이라는 어르신 말씀을 실감한다. 6월10일부터는 호박과 오이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내가 키운 방울토마토와 가지 맛을 볼 날도 머지않을 터. 첫사랑의 설렘이 부럽지 않다.
나의 5평 텃밭이 속한 주말농장은 북한산 자락 밑이라 풍광이 좋다. 많은 이들이 텃밭 가꾸기를 구실 삼아 농장 평상에 앉아 삼겹살 파티를 벌이기도 한다. 농장 주인 아저씨가 “주말농장이 아니라 아예 주막농장이네”라며 혀를 끌끌 차시기도 한다. 농장의 주말은 여유롭고 평화롭다.
그러던 주말농장에 요즘은 팽팽한 긴장이 감돈다. 1908년 서울에서 기상을 관측한 이래 104년 만에 최악의 가뭄이란다. 지하수를 퍼올리는 농장의 펌프가 겉돈다. 텃밭에 물을 주기 어려우니, 타들어가듯 말라죽는 작물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초보 도시농부들의 애간장이 녹는다. 생계수단이 아닌 한 뼘 텃밭만으로도 이렇게 속이 상하니, 평생을 땅에 의지해 살아오며 자식을 키워낸 어르신들 심정은 오죽할까.
콘크리트 도시는 자연을 모른다. 가뭄과 폭염에 논밭이 쩍쩍 갈라져도, 뒷산의 나뭇잎이 타들어가다 가을 낙엽처럼 바람에 휘날려도, 오불관언이다. 아파트의 수도꼭지와 샤워기는 시원한 물을 콸콸 쏟아내고, 고층빌딩 사무실에선 에어컨의 냉기 탓에 긴소매 옷을 입고 일하는 이들도 적잖다. 폭염과 가문 날씨 탓에 건조한 겨울이 제철인 수분크림과 미스트 따위가 지난해보다 400%나 더 팔렸단다. 폭염으로 전력 사용이 급증해, 6월21일엔 사상 첫 정전 대비 훈련도 있었다.
도시에서 이 모든 소동은 그저 불편한 일일 뿐이다. 평소보다 비싸서 그렇지 대형마트에 가면 먹거리가 지천이다. 돈만 있으면 된다. 땡볕에 타들어가는 고추 따위에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불편할 뿐, 고통이 없으니 공감도 어렵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이 새삼스럽다. 이 와중에 MB는 브라질 유엔지속가능발전정상회의(리오+20)에서 “수자원 인프라 개선사업(4대강 사업)으로 홍수와 가뭄을 극복했다”고 하고, 4대강 관계자는 “가뭄은 오해”란다. 미치겠다. 이 유심론자들을 어찌할꼬. 어쨌거나 독자들이 이 글을 읽으실 때쯤이면 뒤늦은 장마가 시작될 텐데 오랜 가뭄 끝에 물난리를 겪는 일은 없으면 좋겠다.
편집장 이제훈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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