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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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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있었다

등록 2011-11-28 15:25 수정 2020-05-02 04:26

“여러분, 여러분, 모두 부자되세요, 꼭이오!”
하얀 눈밭에서 배우 김정은이 손나발을 만들어 간절히 외친다. 2001년 12월29일부터 이듬해 1월2일까지 5일간 방송을 탄 BC카드 광고다. 초등학생도 칠순의 노인도 다 함께 복창했다. “부자되세요.” 광고 카피는 한 해를 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대한민국의 덕담이 됐다. 1997년 겨울 저승사자처럼 찾아온 ‘국제통화기금(IMF) 신탁통치’의 길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직후였다. 다시는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가게가 망해 거리에 나앉는 황망한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경쟁력을 길러 부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고, 다들 생각하던 때였다. 장롱 깊숙이 묻어둔 금붙이를 그러모아 ‘국난’을 극복했다는 자부심으로, 스멀대는 공포를 털어냈다. 너도나도 책방으로 달려가 를 사서 읽었다. 가난한 아빠는 ‘죄인’이니 부자 아빠가 돼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땐 다들 몰랐다. 미국이 IMF를 앞세워 강요·이식한 경제질서가 삶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부자되기 경쟁에 몰입할수록 왜 이건희 삼성 회장이나 정몽구 현대차 회장 같은 부자들만 더 큰 부자가 되고, 나머지 대다수는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더 많은 야간노동에 시달리는지. 왜 멀쩡하던 가게가 망하고, 청년들이 알바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지.
1997년 IMF 사태 이후 14년이 흘렀다. 2011년 11월22일 한나라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날치기 처리했다. 세계 최강국이자 최대 시장인 미국과 시장을 통합해 더 잘살아보자는 것이다. 한국 경제의 미국화 대장정의 결정적 분수령이다. 그런데 ‘20 대 80 사회’도 모자라 ‘1 대 99 사회’라 불리는 세상에 한-미 FTA를 하면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되고, 영세상인은 가게를 불리고, 알바 학생은 도서관으로 돌아가고, 백수 청년은 일자리를 얻고, 노인만 남은 농촌엔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돈 걱정 없이 병원에 갈 수 있을까. 날치기를 기획·주도한 한나라당 대표 홍준표는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누구를 위한 국익? 드라마 에서 세종이 말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날치기에 반대해 거리에 나선 시민들에게 경찰은 물대포를 난사했다. 수은주는 영하, 바람은 맵찼다. 시민의 온몸을 적신 물은 고드름이 됐다. 윤철규 서울지방경찰청 경비부장은 “정당한 절차에 따른 것이라 문제되지 않는다”고 했다. 안중에 사람이 없다. 유대인 학살의 실무책임자인 나치 전범 아돌프 오토 아이히만의 “상부에서 지시해서 어쩔 수 없었다”던 말이 떠오른다.
한-미 FTA에 관한 한 대한민국 국민의 의견 분포는 찬반이 어금버금하다. 각자의 ‘정의’와 ‘국익’이 있을 터. 이 때문에 정부와 국회의 할 일은 일방의 정의와 국익을 강요·관철하는 게 아니다. 각축하는 각자의 정의와 국익을 조정해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대치의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는 일. 그게 바로 정부와 국회가,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정치의 본령은 ‘(일방의) 정의의 구현’이 아니다. ‘정의의 제한’이다. 그래야 공존과 상생이 가능하다. 광신과 폭력을 피할 수 있다. 일방주의는 정치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적이다.
어찌됐든 한-미 FTA가 발효된다고 내일 당장 부자가 아닌 사람들의 삶이 시궁창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10년 뒤, 20년 뒤, 30년 뒤 달라진 세상은 지금 대한민국의 선택을 비웃을지 모른다. 1997년 IMF 사태 때 우리는 10여 년 뒤 이런 비참한 무한경쟁에 내몰리리라 예상했던가. 소심한 나는, 두렵다.
이제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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