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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된 가해, 그 고통에 감응하려면

등록 2025-11-27 23:12 수정 2025-12-03 13:32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 활동하다 코치에게 그루밍 성폭력과 폭력 피해를 당한 서윤지(30·가명)씨.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 활동하다 코치에게 그루밍 성폭력과 폭력 피해를 당한 서윤지(30·가명)씨.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송백권(당시 34살)은 1970년 자신의 집에 온 아홉 살 아이를 성폭행했다. 이 사실을 알리면 가족을 해칠 것이라고 협박했다.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아이는 성인이 된 뒤 송백권을 경찰에 고소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성폭력 범죄는 친고죄(피해자가 고소해야 처벌 가능한 범죄)였고, 고소 기간도 6개월로 짧았다. 그런 상황에서 송백권의 집에 찾아갔더니 대뜸 욕설부터 했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송백권을 흉기로 살해했다. 1991년 발생한 ‘김부남 살인사건’이다.

김씨는 재판 과정에서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고 진술해 파장을 일으켰다. 여성계에서 탄원 운동이 일어났고, 법원은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성폭력 사건 대응과 피해자 지원 운동의 근간이 됐다. 형사처벌을 강화하고 피해자 보호 시설 설치 등을 포함한 1994년 성폭력특별법 제정의 계기도 됐다.

아버지는 틈날 때마다 어머니를 가죽띠, 돌, 흉기로 폭행했다. 딸 ㄱ씨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현관 앞에서 아버지 얘기만 들은 뒤 집 안을 흘끗 보고선 “괜찮으냐” 말 한마디 없이 돌아섰다. 2011년 8월 아버지가 흉기를 어머니 눈에 겨누며 “장님을 만들어줄까, 난도질을 해줄까” 위협했다. 아버지는 30분 동안 그러다 흉기를 이불 아래 넣고 잠들었다. 어머니는 옆에 있던 넥타이로 아버지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ㄱ씨는 38년 동안 목격한 아버지의 폭력을 법정에서 진술했지만, 어머니는 징역 5년형을 받았다. 재판부가 가정폭력 가정에다 일상적인 부부관계를 대입해놓고 범죄 여부를 판단한 것이다. 2012년 한국여성의전화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ㄱ씨는 “수감 중인 66살 어머니를 접견할 때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상황이 얼마나 억울하고 분노가 치미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하는 내내 울던 ㄱ씨의 모습이 지금껏 잊히지 않는다.

엘리트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였던 서윤지(30·가명)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2013년부터 1년 동안 자신을 가르치던 코치에게 ‘위력에 의한 그루밍 성폭력’(피해자와 관계를 쌓아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적으로 가해 행위를 하는 폭력)을 당했다. 발차기와 쇠파이프를 이용한 무자비한 폭행도 이어졌다. 2014년에야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은 서씨는 2015년 코치를 고소했다. 하지만 검찰은 ‘사귀는 사이였고 강간당했다는 말은 들은 적 없다’는 참고인 2명의 진술에 의존해 2016년 코치를 불기소 처분했다. “폐쇄적인 공동체에 속한 이들을 참고인으로 불러 가해자 편의적인 결정”(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을 한 것이다.

이후 13년 동안 숱한 자살 시도와 자해로 자신을 괴롭히던 서씨는 그나마 트라우마에서 조금 벗어나려 할 때쯤인 2025년 9월 피해를 당하던 장소에서 코치와 우연히 마주친 뒤 흉기를 휘둘렀다.

이 이야기를 서술한 이번호 표지이야기는 읽다보면 날카로운 도구로 살을 베는 듯한 고통이 인다. 동시에 1991년과 2011년, 그리고 2016년을 가로지르며 제도와 수사기관의 도움에서 소외된 성폭력과 폭행 피해자가 자력구제에 나섰을 때 이를 대하는 사법기관이 되레 퇴행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 퇴행을 돌려세우기 위해 강요된 가해자가 겪은 고통을 공유한다.

이재훈 편집장 nang@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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