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0월18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북부 가자시티에서 주민들이 폐허가 된 거리를 지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전쟁이 끝났다는데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선 유혈도 굶주림도 그칠 줄 모른다.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는 요르단강 서안지구 합병을 공식화했다.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의 활동을 방해하지 말라는 권고 의견을 내놓자 미국과 이스라엘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평화로 가는 길이 멀기만 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5년 10월22일 중증환자 41명과 보호자 145명을 가자지구 밖으로 긴급 후송했다고 밝혔다. 세계보건기구 쪽은 가자지구에서 긴급 후송이 필요한 중증환자가 어린이 3800여 명을 포함해 약 1만5600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지난 2년여 전쟁이 만든 참상이다. 이스라엘 쪽은 2024년 5월 이집트로 통하는 가자지구 최남단 라파 국경지대를 점령·봉쇄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은 “가자지구 주민들과 연대해달라. 중증환자 긴급 후송을 위해 모든 통로를 개방해줄 것을 주변국에 촉구한다”고 말했다.
같은 날 가자지구 중부 데이르알발라에선 집단매장식이 열렸다. 휴전협상안에 따라 팔레스타인 무장 정치단체 하마스가 사망한 이스라엘 인질의 주검을 넘겨주자, 이스라엘 쪽이 넘겨준 팔레스타인인 주검 가운데 54구가 한꺼번에 묻혔다. 주검엔 이름 대신 번호표가 붙었다. 일부 주검은 눈이 가려지고 결박된 채였다. 고문당한 흔적이 역력한 주검도 있다. 처형된 것으로 보이는 주검도 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검안을 진행한 현지 나세르병원 의료진의 말을 따 “주검 가운데 3분의 2는 신원을 밝히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 쪽은 이들이 ‘전투행위 가담자’라고 주장했지만, 신원을 모르니 확인할 길이 없다.

2025년 10월19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북부 가자시티에서 구급대원이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다친 주민을 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EPA 연합뉴스
‘휴전’이라지만 죽음의 행렬은 이어진다. 팔레스타인 보건당국은 이스라엘 내각이 휴전협상안을 비준한 10월10일부터 21일까지 이스라엘군 공격으로 가자지구 주민 87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 쪽은 10월19일 ‘기습 공격’을 당해 자국군 병사 2명이 사망했다며 대대적인 공습을 재개하고, 인도주의적 구호품 반입까지 일시 중단시켰다. 그런데도 10월21일 이스라엘을 방문한 제이디 밴스 미국 부통령은 휴전안 이행을 두고 “예상보다 잘 진척되고 있다. 상황이 매우 낙관적”이라고 평가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내놓은 20개 항목의 가자지구 평화구상엔 휴전 뒤 일정 기간 가자지구의 치안을 ‘국제안정화군’(ISF)이 맡는 내용이 포함됐다. 미국 쪽은 자국군 파병 없이 휴전협상을 중재한 튀르키예와 이집트,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 등의 참여를 추진하고 있다. 이스라엘 쪽은 앙숙인 튀르키예군의 가자지구 진입 자체를 꺼리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10월22일 예루살렘의 집무실에서 밴스 부통령을 만났을 때도 이런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지 일간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의 10월23일 보도를 종합하면, 휴전안 비준 이후 네타냐후 총리는 여러 경로를 통해 미국 쪽에 △튀르키예의 가자지구 국제안정화군 참여 반대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의 가자지구 통치기구 참여 반대 △하마스 무장해제와 가자지구 비무장지대화 완성 이전 이스라엘군 철수 반대 등의 요구안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스라엘군은 오래도록 가자지구에 주둔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으로선 지지할 수 없다. 평화구상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일이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10월22일 밤 이스라엘로 출국하기 전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이날 이스라엘 의회는 극우 강경파의 주도로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건설한 불법 유대인 정착촌에서도 “이스라엘의 주권과 법률이 효력을 가진다”는 내용을 뼈대로 한 법안의 예비승인안을 통과시켰다. 이스라엘 의회에서 법안이 최종 통과되려면 네 차례의 투표를 거쳐야 한다. 그 첫 단계가 예비승인이다. 이스라엘의 주권과 법률이 효력을 가지면, 서안지구 정착촌은 이스라엘 영토가 된다. 앞서 극우파인 베잘렐 스모트리치 재무장관은 9월3일 기자회견을 열어 대대적인 정착촌 확대 계획과 함께 서안지구 땅의 82%를 강제 합병하는 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굶주림을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국제법에 반한다. (…) 점령된 땅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식량, 용수, 의복, 침구, 숙소, 연료, 의약품 공급과 지원을 보장할 것을 만장일치로 요구한다.” 국제사법재판소는 10월22일 내놓은 71쪽 분량의 권고 의견에서 이렇게 판시했다. 또 재판소 쪽은 이스라엘 정부에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의 구호 활동을 방해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연계설을 내세워 2025년 1월부터 해당 기구의 자국 내 활동을 금지했다. 권고 의견은 법적 구속력이 없지만, 최고 권위의 국제재판소가 낸 법적 해석이란 점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하다.
휴전안 비준 이후에도 이스라엘 쪽은 가자지구에서 구호품 반입을 통제하고 있다. “ 대단히 중요한 결정이다. 이스라엘이 재판소의 권고 의견을 따를 것을 희망한다. ”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권고 의견 발표 직후 에이피(AP) 통신에 이렇게 말했다. 이어 그는 “ 가자지구에서 인도적 구호 활동을 강화하려 최선을 다하고 있는 시점에 나온 결정이다. 비극적 상황에 처한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필요한 수준까지 구호 활동을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본다 ” 고 덧붙였다.

2025년 10월19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중부 부레이지의 건물에서 이스라엘군의 공습 직후 뿌연 연기가 치솟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미국 쪽에선 전혀 다른 반응을 내놨다. 국무부 쪽은 소셜미디어에 올린 성명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루비오 장관이 중동 평화를 위해 지칠 줄 모르고 노력하는 동안, 이른바 ‘재판소’란 곳에서 정치적으로 편향되고 법적 구속력조차 없는 ‘권고 의견’이란 걸 내놨다. 이스라엘을 불공정하게 비난하고, 하마스에 깊이 연루돼 물적 지원까지 해온 난민기구엔 날개를 달아준 꼴”이라고 비난했다. 이스라엘 외교부도 성명을 내어 “국제법이란 허울을 내세워 이스라엘에 정치적 압박을 가하기 위한 결정이다. 이스라엘은 테러 활동과 연계된 조직과 결코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 국제법의 정치화에 반대하며, 이스라엘을 해할 목적으로 부과된 정치적 결정을 단호하게 거부한다”고 주장했다. 휴전 이후에도 가자지구 주민의 삶이 이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이유를 알 만하다.
팔레스타인 보건당국은 2023년 10월7일 개전 이후 전쟁 747일째를 맞은 2025년 10월22일까지 이스라엘군 공격으로 가자지구 주민 6만8234명이 숨지고 17만373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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