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군주제 국가인 영국에선 의회가 새 회기를 맞는 첫날 국왕이 ‘개원 연설’(킹스 스피치)을 한다. 2022년 9월 73살의 나이로 즉위한 찰스 3세가 첫 개원 연설에 나섰다. 차려야 할 의례가 복잡했다.
2023년 11월7일 오전(현지시각) 찰스 3세와 커밀라 왕비를 태운 육두마차가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을 향해 출발했다. 왕의 ‘무사 귀환’을 보장하기 위해 하원의원 1명이 버킹엄궁에 인질로 남았다. 1647년 의회 의사당에 구금됐다가 재판을 거쳐 2년 뒤 처형된 찰스 1세가 남긴 교훈에서 따온 전통이다.
국왕의 도착에 앞서 울긋불긋한 복장을 한 왕실 근위대가 의사당 곳곳을 돌며 폭발물을 수색했다. 이제는 ‘저항의 상징’이 된 가이 포크스가 이끈 가톨릭 세력이 1605년 개신교도인 제임스 1세를 의회에서 폭발물로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에서 유래했단다.
2868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왕관을 쓴 찰스 3세가 왕좌에 앉아 읽어내려간 연설문은 정작 왕실이 아닌 총리실이 썼다. ‘킹스 스피치’의 ‘실소유주’는 국왕이 아니라 총리다. 2025년 1월 안에 총선을 치러야 하는 리시 수낵 총리 정부가 이끄는 보수당이 제시한 20여 개 정책 비전을 찰스 3세가 대독했다.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 유럽판의 보도를 보면, 11월6일 공개된 최신 여론조사에서 보수당(26%)은 노동당(45%)과의 지지율 격차를 좀처럼 좁히지 못했다.
“참신함이 절실한 때, 낡은 생각만 가득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1월8일치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신문은 “보수당이 내놓은 정책은 수낵 총리가 유권자의 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음을 보여준다”며 “정치 현실은 변하는데 수낵 총리는 변하지 않으니 말이 안 되는 상황 속에서 허우적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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