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얼마나 더 희생돼야 군부에 맞설까

민주화항쟁 34주년 국가비상사태 6개월 더 연장,
미얀마 NUG “유엔 R2P 적용해 무기 지원해달라” 호소
등록 2022-08-13 12:55 수정 2022-08-14 01:05
2022년 8월8일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의 중심가 거리에서 ‘8888항쟁’ 34주년을 맞아 청년들이 미얀마 숫자로 ‘8’이라고 쓰인 우산 4개를 나란히 펼쳐 시위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2022년 8월8일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의 중심가 거리에서 ‘8888항쟁’ 34주년을 맞아 청년들이 미얀마 숫자로 ‘8’이라고 쓰인 우산 4개를 나란히 펼쳐 시위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2022년 8월8일은 미얀마 국민이 군부독재에 맞서 전국에서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벌인 8888항쟁(1988년) 34주년 기념일이었다. 당시 한 달 넘게 이어진 시위는 군부의 무차별 유혈 진압으로 수천 명이 숨지는 비극으로 끝났다. 2015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압승으로 반세기 만에 첫 민주정부가 수립됐다. 이어 2020년 총선에서도 NLD가 압승했으나 군부는 2021년 2월1일 민주정부 2기 출범일 새벽에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했다.

가족에게도 날짜 비밀로, 정치범 사형 집행

미얀마 민주화 진영의 무장투쟁이 1년6개월을 넘긴 8월8일, 군부는 수도 네피도와 최대 도시 양곤을 비롯한 주요 도시 전역에 무장군경을 배치하고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그러나 양곤 중심가의 거리에서 청년들이 미얀마 숫자로 ‘8’이라고 쓰여진 우산 4개를 나란히 펼치는 시위를 벌였고, 민주화투쟁이 활발한 사가잉주와 카친주 등 여러 곳에서 기념집회가 이어졌다. 양곤의 한 편의점 직원은 타이 <피비에스>(PBS) 방송에 “우산 시위는 영리하고 용감하지만 매우 위험했다. 다리에서 문자 그대로 ‘돌을 던지면 닿을 거리’에 경찰서가 있다”고 말했다. 이날 한국을 비롯해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체코, 대만, 일본에서도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연대시위가 열렸다. 미얀마 민주화투쟁의 구심 민족통합정부(NUG)는 온라인 기념식을 열었다. 만 윈 카잉 탄 민족통합정부 총리는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국민의 투쟁을 지지하며 ‘8888 정신’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2022년 8월8일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창설 55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쿠데타를 주도한 군 최고사령관이자 ‘셀프 총리’ 민 아웅 흘라잉은 성명을 내어 “미얀마는 1997년 아세안 가입 이후 책임 있고 능동적이며 건설적인 회원국이자 아세안 공동체 건설의 강력한 지지자임을 입증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호 독립, 주권과 영토 보전에 대한 존중, (내정) 불간섭, 평등 같은 핵심 요소가 아세안 회원국을 ‘다양성 속의 단결’로 묶고 역내 국민에도 이익이 많을 것”이라고 강변했다. 쿠데타 이후 아세안에서조차 고립되는 분위기를 돌파하려는 러브콜이자, 자국 민주화 진영에 대한 지지를 차단하고 쿠데타를 합리화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국제사회와 언론의 관심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그에 따른 세계경제 위기,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미-중 대결 구도에 쏠리는 동안 미얀마 군부 쿠데타 세력은 권력을 다지기 위한 폭압과 국민 분열 책동을 지속해왔다. 8월1일엔 ‘국가비상사태’를 2023년 2월1일까지 6개월 더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2021년 2월 쿠데타 직후 1년간, 2022년 2월 6개월 연장에 이어 세 번째다. 이에 맞서 미얀마 민족통합정부는 외롭고 힘겹게 민주화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까진 시간이 민주화 진영의 편이 아니었다. 현 상황이 지속된다면 더욱 그럴 가능성이 크다.

2022년 7월30일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시민사회단체모임, 미얀마 민족통합정부(NUG) 한국대표부, 미얀마 민주주의네트워크 등 회원들이 검은 옷을 입고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미얀마 민주인사 4명에게 사형을 집행한 미얀마 군부를 규탄하고 있다. 이들은 서울 성동구 옥수동 미얀마 대사관 무관부(해당 국가의 군인들이 근무하는 곳) 앞까지 행진했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2022년 7월30일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시민사회단체모임, 미얀마 민족통합정부(NUG) 한국대표부, 미얀마 민주주의네트워크 등 회원들이 검은 옷을 입고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미얀마 민주인사 4명에게 사형을 집행한 미얀마 군부를 규탄하고 있다. 이들은 서울 성동구 옥수동 미얀마 대사관 무관부(해당 국가의 군인들이 근무하는 곳) 앞까지 행진했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간절한 호소, 미적지근한 반응

앞서 7월25일, 미얀마 군부는 민주주의민족동맹 소속 전직 의원과 민주화운동가 등 4명에 대해 “테러 음모와 요인 살해” 혐의로 사형을 집행했다고 국영 매체를 통해 발표했다. 사형 집행은 사전에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전격 집행됐고, 집행 날짜도 공개되지 않았다. 당국은 처형 직후 주검을 화장하고 가족의 유해 수습 요구도 거부했다고 미얀마 독립언론 <미얀마 나우>가 전했다. 미얀마에서 정치범 사형이 집행된 것은 1980년대 이후 약 40년 만이다. 민주화 진영과 시민에게 두려움을 퍼뜨리기 위한 심리전으로 보인다. 그러나 군부의 사형 집행은 국제사회의 큰 공분을 샀을 뿐 아니라, 외려 민주화 진영의 분노와 투지를 자극하는 자충수가 됐다. 양곤 인세인 교도소 수감자들은 8월2일부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7월30일 민족통합정부의 진 마 아웅 외교장관은 “우크라이나와 아프가니스탄을 지원하는 국제사회는 미얀마에서는 얼마나 더 많은 생명이 희생돼야 군부에 단호히 대응할 것인가”라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유엔의 국제분쟁 개입 근거인 ‘민간인 보호 책무(R2P)’를 적용해 무기와 병력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미얀마 독립언론 <이라와디>는 “진 마 아웅 장관이 (국제사회를 향해) 군사정부를 합법화하거나 실효성 없는 유감 성명을 발표하는 대신, 민족통합정부를 공식으로 인정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다른 정부들에 제공되는 것과 똑같은 권리와 존엄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휩쓴 민주화운동인 ‘아랍의 봄’ 당시 나토 연합군은 ‘R2P’를 발동해 리비아 내전에서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과 싸운 반군을 적극 지원했다.

미얀마 민주화 진영에 대한 무기 지원이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미국·독일·폴란드 등 나토 회원국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고 있지만 미얀마의 요청에는 미적지근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주권국에 대한 러시아의 일방적 침공이 명백한데다, 나토의 이해관계와 직접적 관련이 있다. 그러나 미얀마 사태는 군부 쿠데타로 촉발된 내전 성격이 짙다. 민족통합정부의 법적 정통성과 도덕적 명분은 확고하지만, 그렇다고 국제사회가 ‘내정간섭’ 시비를 무릅쓰고 인도주의적 구호를 넘어 전쟁 무기를 지원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관심이 식어갈수록 인권 상황은 악화

게다가 서방은 미얀마 민주화 진영에 대한 군사적 지원으로 얻을 실질적 이익이 거의 없다. 서방에 미얀마는 지정학적 요충지도, 경제적 가치가 큰 나라도 아니다. 전통적으로 외교적 고립 노선을 밟아온 미얀마 군정은 쿠데타 이후 러시아·중국과의 친교 강화에 더 힘을 쏟고 있다. 특히 중국은 접경국 미얀마에 대한 서방의 군사개입에 날카로운 경계심을 보인다. 중국은 최근 대만을 둘러싸고도 미국과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국제사회의 관심이 식어갈수록 미얀마의 인권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8월9일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의 미얀마독립조사기구(IIMM)는 최근 3년 새 군부가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연례 보고서를 발표했다. 로힝야족 학살과 민주화운동 시민 살상, 마을 방화 등 300만 건이 넘는 정보를 수집하고, 인터뷰·증언·문서·영상·사진·소셜미디어 등에서 증거를 확보했다. 보고서는 “쿠데타 이후 미얀마에서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규모와 방식으로 이뤄졌”으며, “강간 등 여러 형태의 성폭력, 어린이에 대한 고문, 징병, 임의구금, 부모를 붙잡으려는 인질 등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심각한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타이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 정치범지원협회(AAPP)에 따르면, 쿠데타 이후 군부 폭력에 의한 사망자는 2022년 8월10일 기준 2174명, 체포 및 구금된 이는 1만5천 명(누계)이 넘었다. 지금도 거의 1만2천 명이 수감돼 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