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초에 TV 뉴스를 보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현금지급기가 자주 도난을 당하니, 경찰서 60곳에 현금지급기를 설치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을까? 12월17일치 일간 보도를 보면, 2014년 1~11월 250개의 현금지급기가 도둑맞았다. 2013년 같은 기간보다 135% 늘어났다. 폐회로텔레비전(CCTV) 화면을 보면 대담하다. 차로 들이받거나 폭파 장치를 이용한다. 신기하게도 현금지급기를 통째로 훔쳐 달아날 때까지 경찰이나 보안업체가 도착하지 않는다. 2014년 8월에는 공항에서 현금수송 업체가 비행기에 실으려던 현금 약 110억원을 강탈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칠레 역사상 최대의 현금 탈취 사건으로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현지인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고 했더니 “라틴아메리카에 온 걸 환영해요. 여긴 칠레예요”라고 껄껄댄다.
아내는 3년 만에 벌써 네 번째 휴대전화를 쓰고 있다. 소매치기를 당한 탓이다. 그래서 아내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이면 전화를 잘 안 건다. 버스에서 내 전화를 받은 뒤 주머니에 전화기를 집어넣었다가 표적이 돼 도둑맞은 뒤부터다. 우리 동네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산티아고의 빈곤한 지역일수록 거리는 더 음산하고 치안은 더 불안하다. 당연히 삶의 질은 훨씬 열악하다. 길가의 식당과 카페는 가방을 채가지 못하도록, 가방을 걸거나 묶는 고리나 끈이 달린 곳이 많다. 도둑맞을까봐 낡은 소형차까지 운전대나 바퀴에 잠금장치를 해둔다. 한인신문에는 신호등에 걸려 멈췄을 때 차량 강도가 잦으니, 가방을 트렁크에 두라는 안내 기사가 늘었다. 그런데도 자기 나라의 치안이 불안해서 칠레로 왔다는 중남미 이민자들이 있다.
칠레는 중남미에서는 치안이 좋기로 알려진 곳이다. 2013년 유엔이 발표한 인구 10만 명당 살인사건 사망률을 보면, 칠레는 3.1명으로 온두라스(90.4), 베네수엘라(53.7), 콜롬비아(30.8), 브라질(25.2) 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다. 그래서 ‘칠레는 도둑질이나 강도질은 해도 죽이지는 않는다’고 위로를 삼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0.9)과 비교하면 수치보다 체감 격차는 더 크다. 칠레인들이 한국을 갔다 오면 놀란다. 커피숍 같은 데서 컴퓨터나 가방 등을 그냥 놓고 화장실에 가더란다. 그래서 자기가 불안해서 지켜봤다고 한다. 치안 악화는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됐다. 12월14일치는 “공항에서 엄청난 돈을 털리고 석 달이 지나도록 범인은커녕 지폐 한 장 못 찾고, 올해에만 지하철 2개 역에 폭탄이 설치돼 예방 조처로 쓰레기통을 바꿨다고 말하면 외국인이 뭐라고 생각할까?”라며 치안 개선 및 처벌 강화 등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경찰서에 현금지급기를 설치하는 얘기를 꺼냈더니, 친구 리셋은 “어떤 할머니가 경찰서에 가서는 ‘이제 가스비·전기료도 여기서 납부한다고 하던데 맞지요?’ 하며 물었다”고 킬킬댔다. 웃을 일만은 아니다. 곤살로 푸엔살리다 하원의원은 “왜 국가가 상업시설의 운영을 보조하느냐?”며 문제를 제기하고, 감사원에 적법성 여부를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웃 호세는 “국가가 민간에 정부의 역할을 다 맡겨버리는 것도 모자라 아예 보조까지 해주는 것에 칠레는 익숙해져 있다”고 혀를 찼다.
어찌됐든 이곳 칠레에도 사람이 산다. 한 지방에 갔다가 호텔 바에서 가방을 도둑맞았다. 이틀 뒤 ‘도둑이 버린 것 같은데 당신이 주인 맞아요?’라며 전화가 왔고, 수첩과 서류 등을 집으로 보내줬다. 물론 카메라도, 가방도, 딸에게 주려고 산 그 지방 특산물을 말린 파파야까지는 없었지만.
산티아고(칠레)=김순배 유학생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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