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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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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의 딥키스와 낙태

대낮에 포개져 뒹구는 커플들이 만연한 한편에선, ‘낙태법’이 소수 엘리트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표류하는 위선적이거나 이중적인 여기
등록 2015-02-13 15:43 수정 2020-05-03 04:27

민망하다. 가관이다. 한국 같으면 ‘○○ 남녀’ 이름이 붙어 인터넷을 달굴 법하다. 공원에서, 지하철에서 뜨~겁게 키스하는 커플을 자주 본다. 공원에서 대낮에 포개져 뒹군다. 모텔에 가지, 왜 저기서 저러나 싶다. 처음에는 올해 10살 된 딸이 볼까봐 얼른 지나쳤지만, 3년을 살고 보니 그러려니 한다. 나도 그래보고 싶다.

칠레의 중도 우파 국가혁신당(RN) 당사에 낙태에 반대하는 홍보물이 걸려 있다. 김순배

칠레의 중도 우파 국가혁신당(RN) 당사에 낙태에 반대하는 홍보물이 걸려 있다. 김순배

여름은 더하다. 젊은 여성들의 노출은 영화제 여배우들 수준이다. 가슴을 훤히 내놓고 다닌다. ‘가슴골 노출’ 따위는 낚시성 기사의 제목도 안 된다. 고개를 숙일 때 가슴이 보일까 손으로 가리는 여성은 3년간 딱 한 사람 봤다. 오랜만이라, ‘저 여자 왜 저래?’ 싶은 게 낯설었다. 치마 입고 자전거 타는 여성도 흔하다. 바짝 달라붙은 초밀착 스키니는 더 난감하다. 날씬하든 뚱뚱하든, 뱃살이 겹치든 말든, 내키는 대로 입는다. 이것도 ‘정열’이라 부를 만한가?

돌팔이 분석을 하면,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 ‘몸매가 예쁜 여자만 드러낼 수 있다’ 따위의, 여성과 그 몸을 옭아매는 사회적 억압 기제가 최소한 한국 수준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아내는 어깨가 훤히 드러난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는 자유를 여기서 누린다. 혹시나 한국 사람이 볼까 신경 쓸 뿐이다.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당선된 하원의원도 있고, 최근 통과된 ‘시민결합’(Union Civil)법은 동성애자 커플에게도 이성애 동거자와 같은 법률적 권리를 인정했다.

그러면 이 사회는 정말 개방적일까? 공원의 낯뜨거운 연인에 대해 물으면, 칠레 사람들도 대체로 보기 좋지는 않다고 말한다. 이웃의 호세는 “모르는 사람이니까 지나치지, 내 딸이 그러면 온갖 벌을 다 줬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12월 말에는 보건장관이 물러났다. 낙태법 제정을 반대하는 보수층을 겨냥해 “가장 보수적인 많은 가정이 최고급 병원들에서 (몰래) 낙태를 해왔다”고 비난한 뒤다.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을 말한 게 뭐가 잘못이냐? 위선이 역겹다’는 반론은 묻혔다. 성폭력으로 임신했을 때, 산모의 목숨이 위험할 때, 사산이 예상될 때에 한해 낙태 허용을 추진하는 가운데 논란에 기름을 끼얹은 탓이다.

1월 초 조사에서 응답자의 59%는 “상황에 따라”, 18%는 “언제든” 낙태에 찬성했다. 22%만 “어떤 경우든” 낙태에 반대했다. 그래도 논란은 뜨겁다. 소수 보수 엘리트의 힘은 세다. 2013년 발표된 자료를 기준으로, 상원의원의 13.2%가 졸업한 세인트조지 칼리지처럼, 정치 엘리트들은 가톨릭계 명문 사립학교에서 유치원 시절부터 보수적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이런 학교에 입학하려면, 세례를 받거나 부모가 성당에서 정식으로 종교적 결혼을 올린 증명서 제출을 대부분 요구받는다. 칠레 양대 명문 가운데 하나인 가톨릭대 총장은 이렇게 말하며 낙태법 제정에 반대했다. “성폭력에 의한 임신은 가족 사이에 자주 벌어지니 종합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하면 된다. 태어날 생명의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얼마 전 낮에 내가 사는 아파트의 분수대에서 키스하는 여성 커플을 보고 잘못 봤나 싶어 가까이 가서 슬쩍 확인한 적이 있다. 그런데 동성애자 청년이 2012년 공원에서 돌에 맞아 죽은 곳도 칠레다. 젊은 여성에게 휘파람을 불어대는 곳도, “막대사탕을 빨고 있다고 오럴섹스를 원한다는 뜻은 아니다”라는 도발적 포스터가 붙은 곳도 칠레다. TV 속 거의 벌거벗은 여성은 이도 저도 아닌 마초적 상업사회의 성 상품에 불과하다. 칠레는 위선적이거나, 다른 사회처럼 이중적이거나, 길이만큼 갖가지 색깔을 지닌 것이다.

딸은 어느 쪽이 될까? 스페인어를 몰라서 학교에 안 가겠다던 딸이 이제는 집에서도 스페인어를 해댄다. 커서 초밀착 스키니를 입고 공원에서 남자친구와 뒹굴면 나는 어떡하나? 산티아고(칠레)=김순배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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