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잊었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별생각 없이 학교 앞 식당에 들어온 것이 화근이었다. 영국에서는 웬만해서는 밖에서 음식을 사먹지 않으리라고 다짐했건만, 아무 생각 없이 ‘피시앤드칩스’ 가게에 들러버렸다. 감자를 튀긴 두툼한 칩이 버티기 시작했다. 이놈은 감자가 아니라, 분명히 플라스틱이었다. 아마도 내 위장에는 놈을 소화할 만한 효소는 없을 것이다. 2천 년 뒤 내 시체가 흙 속에서 녹아 없어져도, 이놈은 신라시대 금동불상처럼 출토될 것이다. 뱉었다. 음식을 버리는 불경스러운 짓은, 일본 요리만화에 등장하는 까다로운 미식가나 하는 줄 알았다. 칩스와 함께 나온 생선튀김도 물건이었다. 꾸덕꾸덕한 생선 옷을 한 꺼풀씩 벗겨내고 속살만 발라먹었다.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다. 남들이 형편없다는 식당에 가도 별생각 없이 한 그릇을 다 비우는 편이다. 영국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종종 음식 흉내를 내는, 음식 아닌 것들이 입에 담길 때, 나의 너그러움은 무너진다. 가끔은 욕도 나온다.
지난해 아내의 생일에 찾아간 식당도 그랬다. 없는 살림이지만 그날만은 멀쩡해 보이는 식당에 갔다. 해물을 좋아하는 아내와 나는 굴요리를 시켰다. 생굴에 일종의 ‘토핑’을 얹어 오븐에 구운 요리가 나왔는데, 여기서도 불쌍한 굴은 다시 한번 ‘탈의’ 과정을 거쳤다. 짠 토핑 아래에 깔려서 어설프게 익은 굴을 먹으면서, 아마도 이 집 요리사는 사장님에게 원한이 있는 게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굴이 입었던 소금 범벅의 옷들을 감히 손대지 못하고 돌아온 우리는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었다. 그때 라면은 명품 음식이었다.
그렇게 몇 번 당하고 나서 결심했다. 영국에서는 웬만해서는 외식을 하지 않겠다고. 나들이라도 가는 참이면, 우리는 식빵에 잼을 발라서 가지고 갔다. 그게 웬만한 식당 음식보다 낫다. 영국인들에게는, 음식에 손을 댈수록 맛을 사라지게 하는 신기한 재주가 있었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외식에 관한 몇 가지 원칙도 세웠다. 나처럼 영국 음식이 안 맞는 사람이라면 현지에 왔을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첫째, 중국식당이나 인도식당을 간다. 실패 확률이 그나마 적다. 둘째, 패스트푸드점에 가려면 ‘서브웨이’에 간다. 값도 상대적으로 싸고, 신선한 채소를 골라 먹을 수 있다. 셋째, 그래도 굳이 영국식 식당을 가려면, 손님이 줄을 길게 선 곳을 골라서 간다.
이렇게 영국 음식을 피해다니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모양이다.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은 재임 중이던 2005년 “그따위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은 신뢰하기도 어렵다”고 섬나라를 향해 쏘아붙였다. 영국인들한테 무슨 일로 그렇게 골이 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도 어지간히 이쪽 음식이 싫긴 했나보다.
영국인은 스스로의 음식을 어떻게 평가할까. ‘영국 음식, 프랑스 음식’이라는 열쇳말로 기사 검색을 해보았다. 바로 뜨는 제목들이 가관이다. ‘영국인이 프랑스인보다 요리를 잘하는 것으로 확인돼’ ‘영국 음식이 프랑스 음식을 추월하고 있다’ 따위다. 이런 기사를 낸 매체가 너절한 황색언론이 아니라, 멀쩡한 <bbc> 이다. 점잖다는 영국인들마저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음식이 내심 부러웠나보다.
영국 음식은 왜 그렇게 맛이 없을까. 잘 모르겠다. 이 질문과 관련한 하나의 통계가 눈에 들어왔는데, 영국의 인스턴트 식품 소비 총액이 이웃한 프랑스나 독일의 2배, 이탈리아의 5배, 스페인의 6배라는 의 보도다. 어쩌면 영국인들은 맛보다는 편리를 우선하는 게 아닐까, 하는 짧은 공상을 해보았다.
버밍엄(영국)=김기태 유학생</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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