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집에서 나오니, 누군가 내 차에 달걀을 던져놓았어요. 달걀 파편을 보니 기분이 더럽죠. 그런데 백인인 이웃의 차를 보니 거기에도 달걀이 깨져 있더군요. 웃기지만, 그걸 보니 안심이 됐어요.”
한국인 지인의 경험담이다. 소수자의 삶은 신산하다. 피부로 느끼는 차별뿐만이 아니다. 나에게 가해지는 우연한 위해에도 마음에 생채기가 남는다. 차에 묻은 달걀의 파편은 인종차별의 이름으로 마음속에 날아와 한 번 더 부서진다.
운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국에 와서 2년6개월이 넘도록 그런 차별을 받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딱 한 명의 영국인에게서는 그런 대우를 받았다고 느꼈다. 하필이면 우리 과에서 행정을 책임지는 수우 할머니였다.
우리 과 사람들은 학교의 가장 변두리에 있는 ‘집’이 일터다. 내구재가 대부분 나무로 된 자그마한 낡은 건물이다. 여기의 좁은 목조계단을 오르면 집도 함께 삐걱삐걱 장단을 맞춘다. 한때 간호대 기숙사였다는 이 목조건물의 흥얼거림을 나는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수우 할머니가 계단을 올라올 때만은 아니다.
인상이 무척 후덕해 보이는 수우 할머니가 내가 있는 꼭대기 3층 연구실로 처음 올라온 날, 내 책상의 전화기는 먹통이 됐다. ‘과의 비용 절감 차원에서’라는 설명이 붙었다. 새 규칙은 모든 박사과정 학생에게 적용됐다. 워낙 규모가 작은 과라서 박사과정 학생이라야 고작 5명이 있는데, 나를 제외한 영국인 학생 4명은 학교를 드문드문 나올 뿐 주로 집에서 공부를 한다. 그러니 새 규칙은 학교를 부지런히 나오는 나한테만 해당됐다. 뭐, 한갓 학생 주제에 책상에 전화기까지 달린 게 원래 호사려니 생각하긴 했다.
그 뒤로 할머니가 내 연구실에 올라올 때마다 뭔가 조금씩 바뀌었다. 듣고 나면 다 이유는 있는데, 내가 항상 양보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던 차에 생각해보니, 우리 박사과정 연구실 문에 달린 이름판에도 내 이름만 쏙 빠졌다. 딱히 불편한 것이 없어서 그러려니 하고 지냈지만, 영어도 잘 안 되는 외국인 유학생을 사소하게 괴롭히는 할머니가 섭섭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삐걱삐걱, 할머니는 이번엔 혼자 올라오지 않았다. 일꾼 한 분도 무언가 기다란 짐을 낑낑거리며 들고 왔다. 우리 연구실 책상 사이에 칸막이를 설치하겠단다. 나는 그게 달갑지 않았다.
“우리 학생들끼리 상의해서 칸막이를 놓을지 결정하면 안 될까요. 칸막이를 일단 두고 가시면 저희가 처리할게요.”
인정한다. 이렇게 세련된 표현은 아니었다. 요지는 그랬지만, 어설프게 튀어나온 영어는 꽤나 투박했을 거다. 수우 할머니는 그래서인지 도끼눈을 뜨고 일꾼과 함께 사라졌다.
시선은 싸늘했다. 오가다 마주쳐도 할머니는 아예 외면해버렸다. “이게 인종차별인가?” 생각은 심증과 확증 사이를 똑딱똑딱 오갔다. 그렇다면 결국 손해 보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생각해보니, 30명이 넘는 과의 식구 가운데 백인이 아닌 사람은 행정일을 맡는 남아시아계 바알과 나밖에 없었다. 과의 행정 책임자와 척져서 버텨낼 자신은 없었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생각하면 부아가 났지만, 딱히 대놓고 따질 만한 근거도 없었다. “평생을 ‘갑’으로만 살아서 그래.” 나의 고개가 뻣뻣하다며 아내는 등을 떠밀었다.
눈치 없이 무척 화창하던 어느 오후, 수우 할머니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할머니가 여러모로 신경 써주는데 정작 나의 표현이 무례했던 것 같다, 대략 이런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인종차별주의자의 차갑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 마침 컴퓨터 배경화면에는 할머니의 가족사진이 떠 있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얘가 내 둘째딸이고, 쟤는 셋째손자고….”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한 명씩 짚어가면서 설명했다. 그러다 봤다. 그의 남편 자리에는 흑인 할아버지가 웃고 있었다.
그때는 차마 말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나는 수우 할머니에게 정말로 사과할 일이 생겨버렸다.
버밍엄(영국)=김기태 유학생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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