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다 말레이시아에서 넘어온 놈들이죠.”
쇼핑몰 주차장에서 폭탄이 발견됐다거나 테러리스트들의 협박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우리 식당 기사 노빨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여기에는 인도네시아 무슬림이 테러를 저지를 리 없다는 확신이 배어 있다. 노빨은 자존심이 세고 애국심이 강하고 아주 잘 삐치는 무슬림이다. 주요 길목에 숨어 있다가 운전자에게 15만루피(약 1만5천원)를 뜯어내는 교통경찰을 보면 그는 인도네시아의 부패를 한탄한다(나는 이곳 경찰이 제대로 딱지를 끊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다). 그러나 외국인인 내가 이 나라의 부패를 비웃으면 한동안 대화를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그도 내가 테러리스트를 욕할 땐 맞장구를 친다. “걔들은 이슬람이 아닙니다.”
인도네시아는 2억4천만 인구 중 90%가 무슬림으로, 세계에서 가장 무슬림 인구가 많은 나라다. 인도네시아의 무슬림은 매우 개방적이다. 이슬람 개혁을 외친 와히드 대통령을 탄생시켰고 현 조코 위도도 대통령 역시 자유주의 정부를 선택했다. 시골에선 사정이 다르겠지만 자카르타 같은 대도시에서는 여성들이 종교적 제약을 거의 받지 않고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한다. 유흥가에선 현지인 중산층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술을 마신다. 1998년 화교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현재는 자카르타 주지사가 화교일 만큼 다양성이 보장돼 있다.
외국인에게 인도네시아가 이슬람 국가라서 불편한 점은 새벽의 아잔(예배 시간을 알리는 이슬람 사원의 방송) 소리뿐이다. 자카르타에 와서 한 달 동안은 아잔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슬람으로 개종해서 아잔을 편하게 듣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지금은 그마저도 자장가로 들린다.
그러나 요즘 인도네시아에서도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어젯밤 나는 택시 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 뉴스에서 테러에 반대하자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었다. 3월13일 이슬람국가(IS)에 합류하기 위해 시리아로 들어가려던 인도네시아인 16명이 터키 경찰에 체포됐다. 인도네시아 매체들은 이 사실을 심각하게 다뤘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IS에 합류하는 인도네시아인의 국적을 박탈하겠다고 경고했고, 인도네시아 정부도 이슬람 근본주의 내용이 담긴 인터넷 사이트 차단에 나섰다. 3월31일 한 조사기관은 자카르타·반둥·서자와 고등학생 중 7.2%가 IS의 활동에 동의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1998년 이후 인도네시아가 이룩한 민주주의는 위협받고 있는 걸까. 개방된 이슬람, 근대화된 이슬람의 꿈이 근본주의에 흔들리는 걸까. 여기에 대한 대답을 나는 지난해 대선 때 노빨과 나눈 대화에서 찾고 싶다. 당시 ‘강한 인도네시아’를 외쳤던 프라보워 후보는 조코 위도도와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 그때 나는 ‘강한 나라’라는 말이 그 사회의 이방인에게 얼마나 섬뜩하게 들리는지 처음 느꼈다. 노빨은 프라보워를 지지하는 눈치였다. 조코 위도도 얘기만 나오면 눈살을 찌푸렸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프라보워에 대해 물었다.
“나라가 부패했잖아요. 부자들만 잘살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못살아요. 두 후보 다 마음에 안 들지만 프라보워는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 거 같아요.” 이것이 좀더 권위주의적이고 종교색이 짙은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였다. 노빨은 빈부 격차가 심해져서 수하르토 독재 때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서 서민의 박탈감을 읽었다.
나는 나라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애국자 노빨이 이슬람 근본주의로 돌아서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인도네시아 사회가 빈부 격차와 부패에 손을 놓아버린 순간일 것이다.
자카르타(인도네시아)=유현산 소설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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