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는 없어요. 다 치웠어요.”
내가 사는 아파트 매점의 점원이 말했다. 생각해보니 인도네시아 정부가 4월16일부터 소형 소매점과 일반 음식점에서 맥주 판매를 금지했다. 하루의 스트레스를 빈탕 맥주 한 캔으로 풀던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나는 에너지 음료와 주스가 맥주를 밀어낸 매점 냉장고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다음날 나는 도매 할인매장인 ‘롯데 홀세일 마트’에 들른다는 아내에게 캔맥주 두 박스를 부탁했다. 그날 오후 아내는 그곳에서도 맥주가 다 치워졌다는 비보를 전해왔다. 참다못한 나는 쇼핑몰 슈퍼마켓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매장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맥주 진열대가 없었다. 맥주, 맥주는 어디에 있는가. 한 직원이 고객서비스센터에서만 맥주를 살 수 있다고 했다. 가방을 맡아주거나 상품권을 교환하는 서비스센터에서 왜 맥주를 파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가보니 물품 보관함 한쪽에 맥주를 쌓아두고, 손님이 미성년자가 아닌지 확인하며 팔고 있었다.
편의점에서도 맥주가 사라졌다. 늘 술자리를 마무리하기 위해 편의점에서 맥주를 마시던 교민 P씨도 이제 곧장 집으로 가야 한다. 다음 우기에는 그와 함께 편의점 의자에 앉아 맥주와 새우과자를 먹을 수 없다. 비 내리는 자카르타 밤거리도 안녕.
무슬림이 주류인 인도네시아는 주류 규제가 상대적으로 엄격하다. 하지만 맥주 같은 가벼운 알코올 음료는 작은 가게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조처로 그마저 힘들어졌다. 게다가 이슬람 정당들은 발리와 5성급 호텔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술 판매를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통과될 가능성이 크진 않지만 최소한 내게는 끔찍한 얘기다.
인도네시아에서 맥주 판매는 오래된 논란거리다. 이슬람 정당들만 판매 금지를 주장했던 건 아니다. 정부의 이번 조처에 대해 거의 모든 정당들이 지지했고 여론도 지지가 우세하다. 대중은 인도네시아에서 주류 소비가 과도하게 증가하면서 ‘주폭’ 문제나 청소년 음주 문제가 불거진다고 걱정한다. 그런데 주폭? 청소년 음주? 자카르타에 1년6개월 정도 살면서 나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인도네시아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는 인도네시아 정부 관료들을 새벽의 서울 유흥가로 데려가 술에 취해 삿대질하는 열정적인 풍경, 토하는 친구의 등을 두드리는 화기애애한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
이번 조처를 두고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보수주의가 부상하는 신호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나는 출범 초기부터 삐걱거리는 조코위 정부가 지지 기반을 넓히기 위해 취한 조처라고 생각한다. 조코위가 때려잡아야 하는 건 맥주가 아니라 부패다. 그러나 부패 추방은 가게에서 맥주를 치우는 것보다 백배는 어려운 일이다.
지난 4월29일 는 “이완구 총리 사퇴 소식을 인도네시아인이 듣는다면 인도네시아에선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사설에 썼다. 이 신문은 부패 혐의를 받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도네시아 정치인들을 이완구 총리 사퇴에 빗대 비판했다. 그 사설을 쓴 사람에게 “그게 그렇지만은 않아요”라고 말해주고 싶긴 하지만, 어쨌든 부패는 인도네시아의 구조적 문제다.
개혁 열망을 짊어진 조코위 정부는 부패방지위원회를 의욕적으로 출범시켰지만 기득권에 부딪혀 삐걱거린다. 맥주 판매 금지는 실망한 대중에게 흔드는 도덕성의 깃발인 것 같다. 그 덕분에 나는 빈탕 맥주 한 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이 조금 번거로워졌다. 그래도 좋다. 나는 변함없이 이 마지막 칼럼을 쓰고 나서 빈탕 맥주를 딸 것이다. 나는 마실 테니 그대들은 부패를 잡아라. 인도네시아여, 건투를 빈다.
자카르타(인도네시아)=유현산 소설가*이번호로 ‘세 남자의 타향의 봄’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각 나라에서 시차 다른 원고를 완벽하게 마감해주신 자카르타 유현산, 산티아고 김순배, 버밍엄 김기태씨 그리고 칼럼을 사랑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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