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파키스탄이야, 영국이야?
어리둥절했다. 내가 사는 버밍엄시 남동부 스파크힐 지역에 처음 들를 때였다. 큰길에 들어서는 순간, 공간은 거짓말처럼 8천km를 건너뛰어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어느 번화가에 들어서버렸다. 맞은쪽에서 다가오는 수백 명의 인파는 모두가 전통 복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아시아인들이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잠시 정신이 아찔했다. 금요일 오후였다. 인파는 예배를 마치고 모스크에서 쏟아져나오는 행렬이었다. 사람뿐 아니었다. 거리의 색이며 상점의 모양까지 모두 영국색은 쏙 빠진, 낯선 나라의 거리였다. 그 덕분에 거리를 돌며 파키스탄 여행을 싸게 다녀오는 작은 횡재를 누렸다.
그래서였나보다. 새해 들어 미국의 극우 채널인 에 등장한 자칭 ‘테러리즘 전문가’ 스티브 에머슨이 우리나라 종합편성채널(종편)의 출연자 못지않은 횡설수설을 한 이유가. 에머슨은 낮술로 폭탄주 열다섯 잔은 먹은 듯한 표정으로 나타나서는 이렇게 떠들었다. “영국 버밍엄 같은 도시는 무슬림만 살고 있기 때문에, 무슬림이 아닌 사람이 가서는 안 될 곳이다.” 어처구니없는 말은 조금 더 전파를 탔다. “현지 경찰도 무슬림 밀집 지역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여기는 영국 안에서도 따로 노는 지역이기 때문에, 거의 국가 안의 독립국가다.” 파문은 퍼졌다. 여론이 부글거리자,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까지 나서서 “그는 얼빠진 멍청이”라고 쏘아붙였다.
한 편의 촌극으로 끝났을지도 몰랐다. 미국 ‘종편’의 파문이 가시기도 전에 사달은 한 번 더 벌어졌다. 내가 다니는 버밍엄대학 심리학과 건물의 담벼락에서 대문짝만한 낙서가 발견됐다. 검은 스프레이로 쓴 낙서에는 “이슬람은 죽어야 한다”는 문구와 함께 나치를 상징하는 스바스티카(卍) 문양이 그려졌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모스크에도 비슷한 낙서가 나타났다.
흉흉한 민심을 타고 ‘얼빠진 멍청이’를 따라하는 ‘모방범죄’도 등장했다. 주인공은 극우 정당인 영국독립당의 당수 나이절 패라지였다. 그 역시 에 등장해서 “프랑스의 주요 대도시에는 무슬림 신자가 아니면 못 가는 지역이 있다”고 떠들어댔다. 주영 프랑스 대사관이 발끈해서 반박 성명을 냈지만,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영악한 정치인은 프랑스의 도시를 특정하지 않았다. 표현이 두루뭉술하니, 반발도 적었다.
잇따르는 사건들을 보면, 영국 안에서 스멀스멀 퍼져가는 반무슬림 정서를 읽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정서의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는 점이다. 나라 밖으로 눈을 돌리면, 중동의 이슬람국가(IS)나 아프리카의 보코하람 같은 극단적 무슬림 조직들의 만행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리고, 영국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그저 ‘강 건너 불’ 이야기가 아니다. 이유는 다양한데, 한 가지만 예로 들자면, 이슬람국가의 인질 참수 영상에 나타나 망나니짓을 한 ‘복면남’은 런던에서 대학까지 나온 쿠웨이트계 영국인 무함마드 엠와지다. ‘이웃집 총각’이다.
‘강 건너 불’은 안방에까지 번진다. 2013년 5월 평일 오후 2시께 런던 남동부 대로변에서 참극이 벌어졌다. 그때 두 명의 나이지리아계 영국인은 일면식도 없던 영국 군인 리 릭비를 차로 치어 쓰러뜨린 뒤, 장검을 휘둘러 죽였다. 이들이 피해자의 피로 뒤범벅된 채 거리에서 외친 말이 꽤나 아프다. “우리가 살인한 이유는 영국 군인들이 매일 무슬림을 죽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그냥 내버려둘 때까지 우리는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늘 이 현장을 본 여성들에게는 사과하겠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여성들이 같은 광경을 봐야 한다.” 피해자의 주검을 뒤로한 채, 현장에 모인 행인들에게 말하는 살인자의 모습은 공중파 방송을 탔다. 그의 행동은 모조리 틀렸지만, 말이 모두 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에 묻혀버렸다.
무슬림의 일부 극단주의는 영국 안팎에서 조금씩 더 강렬하게 체감되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영국 내부의 시선은 조금씩 싸늘해지고 있다. 이 흐름을 타고 극우들은 정치적 지분을 넓히려는 수작을 벌이고 있다. 두 극단 사이의 ‘적대적 공존’은 이방인의 눈에도 아슬아슬하다.
버밍엄(영국)=김기태 유학생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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