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탁… 타악… 탁… 탁…. 보고야 말았다. 지도교수님의 느릿한 ‘독수리 타법’. 교수님은 50대 중반이다. 아직 창창한 교수님이 자판이 어색한 양, 두 개의 집게손가락만으로 알파벳들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자판과 모니터 사이에서 시선을 부지런히 옮기며 오타를 느릿느릿 수정하는 교수님의 모습을 보다가, 그가 써낸 열 권이 넘는 책과 무수한 논문들이 ‘독수리’의 작품이었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고는, 작은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이봐, 알고 있었어, 마틴 교수님이 ‘독수리’라는 걸?” 로스에게 물었다. 그는 30대 후반의 막내 교수다. 나이도 비슷해서 친구처럼 논다. 답이 가관이었다.
“그래? 몰랐어. 그런데… 나도 독수리인데?”
40대 초반인 이에스틴 교수님은 심지어 한술 더 떴다. 타이핑을 할 때 모니터는 안 본다. 자판만 보고 독수리 타법으로 치는데, 그렇다고 타이핑이 정확하지도 않다. 모니터를 보면 오타가 줄을 선다. 그걸 옆에서 보노라니, 내가 답답해서 몸속에 사리라도 생길 지경이었다. 영국인이 다 이렇게 느린 건 아니다. 연구실 옆자리에 앉은 박사과정 동기 사라제인은 빠르다. 그가 빛의 속도로 자판을 치면, 커서가 헐떡이면서 단어를 토해낸다.
영국인의 시간 개념은 이해하기 힘들다. 모든 것이 빠른 한국에서 영국 땅에 들어오는 순간 세상은 0.5배속으로 돌아간다. 가끔은 세상이 정지화면처럼 멈춰선다. 한국에서는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되지만, 영국에서는 그놈의 예약이란 걸 해야 한다. 응급환자야 응급실에 가면 되지만, 일상적인 질환을 다루는 동네의원을 가려면 하루이틀 정도 기다리는 건 예사다. 오죽하면 병원 예약 기다리다가 병 낫는다는 말까지 한다. 병원만 그런 게 아니다. 자동차를 고치려고 정비소에 전화해도 ‘일주일 뒤에 오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노트북이 고장 나서 서비스센터에 맡기면 흔히 일주일은 기다린다.
그러니 영국에 살다가 가끔 한국에 들르는 교민들은 시차 아닌 새로운 시차에 적응해야 한다. 버밍엄에 사는 한국인 지인이 서울 가는 길에 서비스센터에 고장 난 노트북을 맡겼다. 직원이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으로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며 하는 말이, “오늘 저녁이 돼야 수리가 될 것 같다”였다. 영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이런 ‘신기한’ 경험담을 주고받으며 킬킬거린다.
한국 인터넷 서점에서 하는 ‘당일 배송’ 서비스나 피자업체의 ‘30분 배달’은 저 먼 달나라 얘기다. 영국의 가장 큰 인터넷 서점 가운데 하나인 ‘워터스톤스’에서 책을 주문하면, 배달은 빨라도 사흘은 걸린다. 7천원 정도 웃돈을 주면 더 빨리 보내주긴 하는데, 그래봐야 당일 배송은 꿈도 못 꾼다. 오늘 새벽에 주문해서 다음날에 오면 고맙다.
영국에서 미련하게 한국의 리듬을 고집하면 내 속만 탄다. 그러니 영국인의 시간 개념에 적응하는 과정은 일종의 체념을 동반한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있어야 할 것들이 거기에 없다는 걸 빨리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묘한 건, 그것에 또 조금은 익숙해진다. 몸은 마지못해 낯선 리듬에 맞춰간다.
영국 촌뜨기의 삶에 익숙해질수록, 한국 사회의 돌아가는 속도가 오히려 경이롭다. 속도는 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을 바쁘게 재촉한다. 그 사람들의 리듬을 맞추기 위해 다른 사람도 덩달아 바빠진다. 30분 안에 피자를 받아 먹고 싶은 사람들 덕분에 피자회사가 바쁘고 배달 직원이 바쁘고, 오늘 책을 받고 싶은 독자들 덕분에 택배 직원이 바쁘고 인터넷 서점이 바쁘다. 모두가 바쁘다. 그러다 이곳 영국에 오는 순간 삶은 거짓말처럼 느려진다. 여기 사람들은 또 그렇게 산다.
버밍엄(영국)=김기태 유학생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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