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건, 보기 좋지는 않아요.”
젊은 여직원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영국 케임브리지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우리 가족은 A교수님의 초청을 받고 이 도시를 찾은 참이었다. A교수님은 이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한국의 한 사립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이번에 연구를 위해 모교를 잠시 찾은 참이었다. 우리 가족은 그의 출장길을 하루 묻어갔다. ‘케임브리지 멤버스’를 양복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 학교의 졸업생인 ‘케임브리지 멤버스’가 되면, 입이 떡 벌어지는 입장료를 내지 않고도 뾰족뾰족 화려한 대학 건물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 ‘케임브리지 멤버의 친구’인 덕에 우리 가족도 입을 귀에 달고 교수님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사달은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타이 식당에서 벌어졌다. 조금은 이른 점심시간이었다. 손님은 없었다. 우리가 테이블에 앉은 한참 뒤에도 직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헬로?” 주방 쪽을 향해 두어 번 소리를 지른 뒤에야, 체격이 아담한 동남아시아계 여자 직원이 천천히 걸어왔다. 미간에는 주름이 세 줄 그려져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식당의 에티켓에 대해 훈시를 받았다.
영국에서 식당 직원들은 불친절하다. 그냥 불친절한 정도가 아니라, 자주 오만하다. 그 정도가 심해서 부아가 치밀 때도 있다. 아들이 수두에 걸려 동네병원을 찾을 때도 그랬다. 병원 건물의 앞마당 주차장에 환자를 위한 주차 공간은 없다. 장애인 전용 공간을 제외한 모든 주차면은 이곳 의사들과 직원의 것이었다. 환자들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다른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와야 했다. 동네병원이 응급환자가 찾는 곳이 아니라고 해도,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환자용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첫돌배기 아들을 안은 아내를 병원 앞에 잠시 내려주려고 했다. “여기에 차를 대면 안 돼요.” 금발의 여성이 어느새 나타나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마침 출근하며 차를 대던 의사였다.
우리 동네병원만 이상한 것도 아니다. 우리 대학도, 동네 수영장도 다 이상하다. 건물에서 가까운 명당자리 주차장은 모두 ‘직원용’이다.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쪽은 손님이다. 식당이나 카페에서도 마찬가지다. 손님들은 직원의 리듬에, 때로는 비위도 맞춰야 한다. 맥도널드 카운터 건너편에서 0.5배속 슬로모션으로 일하는 직원들 덕분에 꽈배기처럼 꼬인 줄에 선 손님들이 30분 이상 기다리고 있어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가 없다. 모든 서비스가 초고속으로 이루어지는 ‘빨리빨리’의 나라, 식당에서 직원들이 심지어 무릎 꿇고 주문을 받는 풍습이 있는 나라, 한국에서 ‘왕’ 노릇하던 이방인에게는 속이 터질 일이다. 개인적으로도 영국인들의 이 별난 풍습에 적응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따져보면, 영국의 대학과 수영장과 병원은 손님보다 직원이 더 소중하다고 판단한 것이고, 그에 따라 주차 공간을 갈랐을 뿐이다. 식당에서도 그렇다. 돈을 내고 같은 값의 햄버거랑 맞바꾸는 것이니, 손님인 내가 굳이 더한 대우를 기대할 까닭도 없었다. 그러니 ‘손님인 주제에’ 어설프게 목소리를 높였다가는 영국 땅에서 대놓고 핀잔을 받기 십상이다.
한국에 있을 때, 우연히 초등학생들이 길게 적어낸 미래 희망을 본 적이 있었다. 소방수, 경찰, 대통령 등의 단어는 오히려 드문드문 나왔다. 모든 아이의 꿈은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꼭꼭 눌러 적은 글에서 그놈의 ‘돈’이라는 단어는 쉬지 않고 등장했다. 그때는 너무 일찍 속물이 돼버린 아이들을 안타까워하기만 했다. 생산자가 떵떵거리는 나라, 영국에 살면서야 뒤늦게 우리 아이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소비자가 대접받고, 생산자는 찬밥 신세인 한국에서 아이들이 굳이 노동을 그리고, 생산을 꿈꿀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소비자, 그것도 돈이 많은 소비자가 곧 ‘왕’이 되는 한국에서 그보다 더 나은 직업을 찾을 이유가 없을 법했다. 다른 직업을 마다하고 왕이 되고 싶은 아이들을 누가 나무랄 수 있을까. 풍성해야 할 아이들의 꿈을 간단하게 정리해버린 우리 어른들 탓이 오히려 큰 것 같다.
버밍엄(영국)=김기태 유학생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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