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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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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통장을 가진 사람

확률적으로 매우 희박한 실수가 연달아 터져나와야 가능한 사건이 종종 벌어지는 곳 영국
등록 2014-11-14 15:02 수정 2020-05-03 04:27
위도가 높은 영국에서는 초겨울 밤도 길다. 오후 3시가 지나면 캠퍼스의 차로에 어둠이 내리고, 이른 퇴근을 하는 이들로 ‘러시아워’가 시작된다. 김기태

위도가 높은 영국에서는 초겨울 밤도 길다. 오후 3시가 지나면 캠퍼스의 차로에 어둠이 내리고, 이른 퇴근을 하는 이들로 ‘러시아워’가 시작된다. 김기태

첫아이의 출산을 보러 한국에 다녀오려는 참이었다. 내가 다니는 영국 학교에서는 그러려면 서류를 세 가지나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온갖 서류 작업에 한 달이 흘렀다. 이 모든 서류를 줄줄이 받은 학교 쪽은 마지막엔 ‘아내가 임신했다는 걸 입증하는 영문의 증빙서류’까지 요구했다.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부아가 난 나는 주저리주저리 쓴 전자우편을 학교 쪽에 보냈다. 요지는 이랬다. ‘출산이 임박해서 한국에 있는 아내더러 병원에 가서 증명서를 떼라고 요구할 수도 없고, 설사 그게 가능하더라도 그럴 생각이 없다. 내 신체도 아니고, 내 아내와 아이의 신체에 관한 정보를 왜 내가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등등.’

같은 날, 대학 담당자로부터 다시 기나긴 답 전자우편이 왔다. 결론은, 영국이민국과 대학의 자체 규정에 따라, 내 아내의 임신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관련 규정까지 줄줄이 붙여 넣었는데, ‘Dear Mr. Kim’에서 시작해 ‘Many thanks’로 끝난 장문의 전자우편의 단어 수를 세보니, 403단어였다. 이런 길이로 30번만 더 쓰면 석사 논문 분량은 나오겠다 싶었다. 이토록 비효율적인 성실함이라니.

혹시나 싶어서 직접 관련 규정을 찾아보기로 했다. 내 비자를 보니, 나는 ‘중복방문’(Multiple Entry)이 허용됐다. 영국이민국의 규정에서는 이 비자를 가진 이는 정해진 기간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영국을 들락거려도 됐다. 학교 수업이야 몇 번 빠지면 되는 것이고, 그게 설령 문제가 된다고 해도, 다음 학기에 다시 들으면 되는 문제였다. 그러니까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나의 출국을 보고할 의무가 없었거니와, 그냥 한국을 다녀오면 되는 것이었다! 닭장 밖에 있던 배고픈 여우가 닭을 물고 가는 걸 지켜보는 아이의 심정을, 그때 알 것 같았다.

조금은 극단적인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내가 영국에서 부당한 취급을 받는, 특별히 재수 없는 한국인은 아니다. 한국인들이 모인 자리면, 으레 영국의 지독히도 느리고, 어설픈 행정과 서비스에 대한 ‘뒷담화’와 ‘간증’이 줄줄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들었던 이야기 가운데 단연 최악은 이곳에 사는 한국인 지인이 겪은 일이었다. 하루는 마트에서 장을 보았는데 계산 창구에서 그의 신용카드가 먹통이 되어버렸다. 가까운 은행 지점을 찾아가도 시원한 답을 못 들었다. 며칠 속을 썩고 다시 거래 지점을 찾아간 뒤에야, 그의 국적이 ‘North Korea‘로 잘못 입력된 탓이란 얘기를 들었다. 그의 엉뚱한 국적을 뒤늦게 본 은행 쪽에서 말도 없이 금융거래를 중단시켜버렸기 때문이었다. 확률적으로 매우 희박해 보이는 실수가 따발총처럼 연달아 터져나와야 가능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그런 일이 종종 벌어지는 곳이 여기 영국이다.

대체 왜 그럴까. 영국인들이 하필이면 한국 사람들보다 더 얼이 빠져서 그런 걸까. 개인적 판단으로는, 그런 것 같다. 영국인들은 한국인들보다 얼이 빠져 있다. 한국에 다녀오려면 이런저런 서류를 내야 한다며 나를 괴롭힌 패트 아주머니는 일주일에 사흘만 일한다. 주말을 포함해 월요일도 쉰다. 게다가 걸핏하면 일주일 넘게 휴가를 간다. 패트 아주머니가 아니더라도, 영국의 흔한 직장인 엄마·아빠들은 늦어도 오후 5시에는 일을 접는다. 그러니 영국의 러시아워는 오후 3시쯤부터 시작된다. 감히 얼 빠질 시간을 못 내고, 주말에도 밤낮없이 곤두서서 일하는 한국의 엄마·아빠들과는 업무의 강도에서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사람들이 흔히 누리는 빠르고 시원시원한 서비스는, 직장인 엄마·아빠들이 자녀와 따뜻한 밥을 함께 먹을 수 있는 저녁을 헌납한 대가인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면, 모두에게 ‘저녁이 있는 삶’은 결국 모두가 조금은 불편한 삶이기도 할 것이다. 그걸 우리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지, 잘 모르겠다. 사족을 붙이자면, 이곳에서 오순도순 모여서 열심히 영국 ‘뒷담화’를 늘어놓던 한국 사람들에게 결국 어느 나라에서 살기 원하는지 물어보면, 영국을 선택하는 이가 더 많은 것 같긴 하다.

버밍엄(영국)=김기태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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