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점점 바보같이 되고 있군요.”
지도교수님이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영국인들은 좀처럼 짜증을 내지 않는다. 한국 사람이라면 삿대질을 서너 번은 했을 법한 일을 겪어도, 이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애써 말을 돌린다. 아마도 그게 세련되고, 효과적인 문제 해결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여러 사람에게 보낸 전자우편에서 점잖은 지도교수님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꽤나 ‘센’ 말이다. 평균적인 한국 사람으로 치면, 이미 욕설이 튀어나왔다는 얘기다. 한 달 전 학교에 출입국 관련 문의를 할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 아니 이렇게 너절해질 줄은 몰랐다.
발단은 이랬다. 2012년 여름에 영국 땅을 처음 밟은 우리 부부에게 꽤 큰 변화가 생겼다. 아내에게 아이가 생겼다. 영국의 무상의료 덕을 봐서 이곳에서 아기를 낳자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영국에는 없고 한국에는 있는 것이 있었다. 산후조리였다. 영국의 엄마들이 출산 다음날 차가운 샌드위치를 먹고, 찬물(!)로 샤워 한 번 하고 퇴원한다는 이야기는, 보통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는 외계인의 출몰만큼이나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영국 거리를 걷다보면 태어난 지 정말 한두 주도 안 된 핏덩이를 안고 나온 외계인들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나중에 듣기로는 서양 여성과 한국 여성이 생리적 체질이 다른 탓이란다. 평소 꽤나 씩씩하지만, 그만큼 몸은 부실한 아내는 자기보다 열 배는 더 튼튼해 보이는 영국 임산부들을 보면서 지레 겁부터 먹었다. 임신 7개월째, 아내는 부른 배를 안고, 지구를 찾아 한국으로 떠나버렸다. 첫아이의 출산을 아빠가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산부인과 복도에서 손톱을 물어뜯다가, 아이가 태어나면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탯줄이라도 잘라야 했다. 문제는 아이의 출산 예정일이 하필 학기 중이라는 점이었다. 아이한테 이왕이면 방학 때까지만 엄마 속에서 참아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학교 쪽에 물었다. “한국 다녀오려면 학교에 신고하고 가야 하나요?”
처음에는 간단해 보였다. 행정 일을 보는, 인상 좋은 패트 아주머니는 상냥한 안부 인사와 함께 ‘학기 중 결석신청서’라는 긴 이름의 서류를 보냈다. 처음에는 학생도 아닌 아내도 같이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가, 어리둥절한 내가 이것저것 물어보니, 다행히도 없던 일로 마무리를 내주었다(이때 알아챘어야 했다). 어쨌든 이 서류를 작성하고 지도교수님의 서명을 받아 제출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일주일 뒤 다시 전자우편이 왔다. 이 서류가 아니란다. ‘휴학신청서’가 필요하단다. 두 번째 서류를 다시 지도교수님의 서명을 받아 작성해줬다. 이틀 뒤에 다시 전자우편이 왔다. 여권과 비자를 복사해 보내란다. 보내줬다. 또 일주일 뒤 전자우편이 왔다. 이번 서류도 아니란다. 또 다른 서류가 필요하다고 했다(나중에 다시 보니, 제일 처음에 요구했던 그 서류였다). 무수한 서류가 오가는 와중에 나에게 전자우편을 보내온 학교 쪽 담당자의 수도 모두 4명으로 불어났다. 하찮은 일이 정말 하찮게 커져버렸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지도교수님도, 나도, 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설픈 행정을 (비)웃으면서 받아줬다. 그다음에 학교에서 온 전자우편을 보는 순간, 나의 인내력도 마침내 바닥까지 떨어졌다. 이번에 학교에서 요구한 건, ‘아내가 임신했다는 걸 입증할 증빙서류’였다. 그것도 영어 문서로. “무슨 서류를 보내도 또 트집 잡을 거야. 아예 와잎을 다시 영국으로 부르는 게 어때?” 바로 옆방에서 공부하는 막내 교수인 로스가 위로랍시고 한 말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버밍엄(영국)=김기태 유학생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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