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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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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에 미국의 마음은 설레고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운동이 중동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미국은 친서방 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것에 안도하고 중동 분쟁의 해결점을 찾을거라는 희망에 부풀어
등록 2014-08-22 16:09 수정 2020-05-03 04:27
2011년 12월17일 ‘아랍의 봄’의 불을 댕긴 튀니지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 1주기를 맞아, 예멘 사나에서 그의 죽음을 기리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AP

2011년 12월17일 ‘아랍의 봄’의 불을 댕긴 튀니지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 1주기를 맞아, 예멘 사나에서 그의 죽음을 기리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AP

오사마 빈라덴이 제거된 2011년 5월1일, 미국에는 분명 테러와의 전쟁의 긴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는 빛이 보였을 것이다. 이라크 전쟁이 종식될 희망이 보였다. 더 나아가 중동 분쟁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도 있는 사태가 전개되고 있었다. 2010년 말부터 중동 국가들에서 터져나온 민주화운동인 ‘아랍의 봄’이었다.

존폐 위기에 놓인 알카에다 세력

먼저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이 거의 발을 빼고 있었다. 2008년 2월 미군은 노획한 안바르주의 알카에다 병력 현장 지휘관의 서한을 공개했다. “우리는 우리에 반대하는 이들을 단결하도록 도왔다. …미국과 배교자들은 우리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고, 우리는 작전을 진행하거나 조직하거나 수행할 수 없는 포위망에 갇혀버린 것을 발견했다.” 이 지휘관은 자신들의 조직이 ‘비상한 위기’ 상태라고 진단했다. 이라크에서 극성을 부리던 알카에다 세력의 퇴조를 상징하는 대목이었다.

2007년 이라크 주둔 미군 병력의 증강 이후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사령관이 주도한 반폭동 전략으로 이라크는 상대적인 안정을 취해갔다. 2006년에 최고조에 달하며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내전으로까지 격화됐던 이라크의 폭력 사태는 2008년 들어 격감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80%까지 줄었다는 보고도 나왔다.

퍼트레이어스는 반폭동 전략을 통해 질서 회복에 나서고, 이를 발판으로 주민의 협조를 얻으려 했다. 폭력에 지친 부족세력의 호응이 있었다. 수니파가 다수인 안바르주에서는 ‘안바르의 각성운동’이라는 사태 전개도 있었다. 수니파 부족세력들이 알카에다 연계 지하디스트 세력에 반대하고 치안 회복에 적극 가담했다. 증강된 미군 전략에 덧붙여진 수니파의 협조로 알카에다 연계 세력은 그 뒤 현저한 위축을 보였다.

이미 알카에다 세력은 2006년 ‘알카에다이라크지부’(AQI) 지도자인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가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뒤 방향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AQI는 자르카위 사망 뒤 ‘이라크이슬람국가’(ISI)로 조직을 바꾸는 과정에서 그 헤게모니를 놓고 지하디스트 진영 내부의 갈등을 빚었다. 또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은 이들을 수니파 부족과 대중으로부터 고립시켰다. AQI가 ISI로 전환할 때쯤 이슬람주의 성향의 이라크 민족주의 단체인 이라크이슬람군(IAI)은 이들에 대한 반대를 공식화했다.

2007년 6월 IAI는 바그다드에서 알카에다 세력과 전투를 벌였다. 수니파 각성운동으로 반알카에다 민병대도 조직됐다. ‘이라크의 아들들’이란 뜻의 사와(Sahwa) 민병대원은 2007년 말에 약 6만5천~8만 명으로 늘었다. 알카에다에서 탈퇴한 세력도 포함된 이 민병대는 미군에 의해 무장되고 재정 지원을 받았다. 수세에 몰리던 ISI는 2010년 4월 지도자인 아부 압둘라 알라시드 알바그다디와 아유브 알마스리가 모두 미군에 사살됐다. 이라크의 알카에다 세력은 거의 존폐 위기에 놓였다.

이라크에서 서둘러 발빼기 작업

이라크가 안정화 기미를 보이자 미국은 서둘러 이라크에서 발을 빼는 작업에 들어갔다. 퍼트레이어스 사령관은 2007년 9월 의회 증언에서 “당장 해병대 분견대를 시작으로 내년 여름쯤에 약 3만 명의 미군 병력 철수를 상정한다”고 밝혔다. 퍼트레이어스는 다음해 4월 의회 증언에서는 “우리는 터널 끝의 어떤 불빛도 보지 못하고 있다”며 미군 철수 연기를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여론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염증이 극에 달했다. 누구보다 이라크 전쟁의 원죄를 가진 조지 부시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내에 이라크 전쟁을 종식했다는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길 원했다. 이라크 전쟁 개전에 안달이 나던 2003년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임기 말년인 2008년 12월4일 미군의 이라크 철수 일정을 담은 ‘미국-이라크 병력 지위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은 2009년 6월30일 미군이 이라크의 주요 도시에서 철수하기 시작해, 2011년 12월31일이면 이라크 철수를 완료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라크 전쟁을 ‘멍청한 전쟁’이라고 비판한 버락 오바마가 곧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2009년 2월27일 노스캐롤라이나 르준 해병대 기지에서 연설을 통해 서둘러 이라크 출구전략을 발표했다. 이라크에서 미군의 전투 임무는 2010년 8월31일에 종료된다고 선언했다. 약 5만 명의 과도병력이 남아 이라크군 훈련 임무를 맡고, 이런 지원도 2011년 말에 종식된다고 덧붙였다.

빈라덴이 제거된 지 4개월여 뒤인 8월31일 미국은 마지막 전투병력을 이라크에서 철수시켰다. 약 5만 명의 지원 병력만이 이라크군의 훈련과 자문 등을 위해 남았다.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은 ‘이라크 자유 작전’으로 불리던 이라크에서의 미국의 임무인 전투 종결을 상징하려고 ‘신새벽 작전’으로 재명명하기도 했다. 이날 바그다드에서 열린 기념 행사에서 게이츠 장관은 7년간의 전쟁이 수행할 가치가 있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봉착했다. 게이츠는 “이곳에서 일어난 것에 대해서는 결국 역사가의 관점이 필요하다”면서도 이라크 전쟁은 “어떻게 시작됐느냐는 문제로 인해 언제나 먹구름이 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있지도 않은 사담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를 명분으로 시작된 잘못된 전쟁이지만, 그 정도에서 끝낼 수 있었다는 것에 미국은 안도했다.

이라크에서의 철군에 덧붙여 미국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것은 중동에서 불던 광범위한 민주화 열풍이었다. ‘아랍의 봄’으로 명명된 중동 각국의 민주화운동은 중동 분쟁의 근원적 해결을 가능케 할 저변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미국과 관측통들에게 주었다.

2010년 12월17일 튀니지 중부 내륙의 소도시 시디부지드의 청년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26)가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당국의 노점상 단속으로 팔려던 물품이 압수되자, 그는 주청사로 달려가 압수된 물품 반환과 지사 면담을 요구했다. 그는 자신의 몸에 가솔린을 붓고 거리 한가운데 섰다. “당신들은 내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거라 생각하나?”라는 절규를 남긴 채 그는 몸에 불을 댕겼다. 분신에 앞서 부아지지는 지속적으로 당국과 경찰의 단속에 시달렸다. 전날 200달러나 빚을 지며 마련한 노점 물품마저 압수당하자, 그는 결국 죽음의 항의로 생을 마치는 선택을 한 것이다. 부아지지의 척박하고 고단한 삶은 중동 민중의 전형적인 표본이었다.

매일 테러와 전투로 수십~수백 명이 파리 목숨처럼 사라지는 중동에서 부아지지의 분신은 믿을 수 없는 충격을 줬다. 그의 분신이 있은 지 몇 시간 내에 시디부지드에서 항의시위가 시작됐다. 시위가 폭력적으로 변해 계속되는 동안 경찰의 발포로 부상자가 나왔다. 시위는 12월27일 수도 튀니스로도 번지며 정권 타도 시위로 발전했다. 1987년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분신한 부아지지의 생애 동안 집권해온 독재자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을 겨냥한 시위였다. 벤 알리는 그 다음날 부아지지가 입원한 병원을 찾는 등 허둥댔다. 2011년 1월4일 부아지지가 끝내 숨졌다.

시위는 SNS을 타고 번져나가고

시위 초기부터 이 소식은 페이스북·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튀니지뿐만 아니라 중동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튀니지의 변호사들이 연대 총파업을 벌이는 등 이제 사태는 정권 타도 국민운동으로 번져갔다. 벤 알리는 부아지지의 분신 28일 만인 1월14일 사임을 발표하고 서둘러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길에 올랐다.

중동에서 시민사회 차원의 민주화 시위로 독재자가 물러난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었다. 폭력 사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시민사회 주도의 평화적 대중시위로 큰 유혈 사태 없이 독재정권이 힘없이 붕괴됐다. 1979년 이란에서 시위로 왕정이 붕괴됐지만, 이는 성직자들이 주도한 이슬람주의 세력의 역할이 컸다. 그 결과도 이슬람공화국 수립으로 귀결됐다.

이때까지도 튀니지 사태는 그저 일국의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이상한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튀니지에서의 민주화운동 모습이 소셜미디어로 전파되자, 중동 각국의 시민들은 이를 마치 직접적인 경험으로 느끼며 받아들이는 듯했고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중동에서 정부 대 반정부 세력의 대치가 가장 심한 최대 국가 이집트에서 튀니지 사태는 이미 부아지지의 분신 다음날 그대로 복제되고 있었다.

부아지지의 분신 다음날인 12월18일 이집트 의회 앞에서 한 남성이 분신했고, 연이어 5건의 분신 사건이 이어졌다. 벤 알리의 사임 소식이 전해지자, 이집트에서는 분위기가 극적으로 고조됐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는 무함마드 엘바라데이는 이집트에서 튀니지 스타일의 폭발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야당을 포함한 반정부 세력은 1월25일을 국민궐기의 날로 잡았다. 이날은 경찰의 날이었다. 호스니 무바라크 장기 독재정권의 수족인 경찰의 잔인한 탄압에 항의하기 위해 내무부 앞에서 집회를 열기로 했다. 이집트의 모든 반무바라크 세력이 일어섰다.

‘4월6일 운동’은 이 집회의 실질적 주도자였다. 2008년 이집트의 공업도시 엘마알라 엘쿠르바의 노동자를 돕기 위해 조직된 이 진보적 노동운동 단체는 “나는 나의 권리를 위해 1월25일 궐기할 것이다”라고 쓴 전단 2만 장을 만들어 살포하며 대중을 선동했다. 특히 26살의 여성 활동가 아스마 마푸즈는 이 시위를 촉발한 일등공신이었다. 그녀는 비디오 블로그에서 “시민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나와 함께 동참하자”며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한 세력이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집트의 최대 정치세력이자 무바라크 정권의 최대 반대세력인 무슬림형제단이었다. 1월23일이 되자 무슬림형제단도 이 시위에 참가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자신들의 참여가 무바라크 정권의 탄압을 부르는 빌미를 줄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도권은 그들에게 없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봉기의 날’로 명명된 1월25일 당일이 되자 카이로에서 수만 명의 시위가 벌어졌고, 다른 도시에서도 수천 명의 시위 행렬이 이어졌다. 애초 내무부 장관의 사임, 부패 척결 등을 내걸었던 시위는 즉각 무바라크의 사임을 요구하는 정권 타도 시위로 바뀌었다. 그 뒤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을 중심으로 2월11일까지 16일 동안 계속된 시위는 1981년부터 30년간 장기 독재를 해온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사임까지 몰고 갔다.

무바라크 정권은 튀니지의 벤 알리 정권과 달랐다. 강경한 시위 진압을 했고, 이 과정에서 시위대와 진압 병력의 충돌, 폭도들의 약탈 사태 등으로 모두 846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중에 집계됐다. 이집트에서 폭력을 동반한 시위 사태는 미국을 고민하게 했다. 중동의 최대 동반자인 무바라크 정권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집트 시민 사이에서 애매모호한 균형에서 갈팡질팡했다. ‘모든 폭력에 반대하며, 이집트 정부는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하나 마나 한 얘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점증하는 시위 대열과 폭력 사태 격화를 보면서, 오바마 행정부는 무바라크 정권이 버틸 수 없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1월29일 백악관에서 외교안보 수뇌회의가 열려 2시간의 격론 끝에 무바라크의 사임의 시도를 시작하는 전략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힐러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은 ‘질서 있는 이양’을 제안하며 이를 주도했다. 클린턴은 무바라크의 오랜 친구이며 전 이집트 주재 대사였던 프랭크 위스너를 특사로 파견하자고 제안해 승인받았다.

위스너의 임무는 무바라크에게 사임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자신들이 무바라크를 밀어내는 것으로 비치는 걸 원치 않았다. 위스너가 카이로에 간 지 나흘이 지나도, 무바라크 쪽에서는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위스너가 무바라크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사태는 더 이상하게 돌아갔다. 무바라크 정권은 시위대에 폭력적인 보복을 했다. 이를 놓고 귀로에 유럽의 한 안보회의에 참석한 위스너는 이상한 말을 했다. 무바라크가 안정을 위해 권좌를 유지하는 것이 ‘중대하다’고 말했다. 위스너는 무바라크 설득에 실패한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권력 유지를 승인해준 것이었다. 힐러리는 격노해서 위스너가 워싱턴이 보낸 특사가 아니라고 말했다. 워싱턴 쪽의 분노에 더 기름을 부은 것은 위스너가 그동안 무바라크의 로비를 담당하는 회사의 간부로 일했고, 이집트 최대 은행의 이사로 재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독재 무바라크 정권의 몰락

어쩌면 위스너 사건으로 워싱턴의 입장은 무바라크 쪽에 명확히 전달됐다. 이집트 군부도 1월31일 국민의 합법적 요구를 존중할 것이며 평화적 시위대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집트 내 최대 세력이자 정권의 보루인 군부가 돌아선 것이다. 미국과 군부가 돌아선 지 2주가 안 돼 무바라크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오바마 행정부는 위스너를 특사로 보낸 뒤 “질서 있는 과정의 일환으로 무슬림형제단의 참여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중동의 이슬람주의 세력의 원조이자 최대 세력인 무슬림형제단과 화해와 타협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무바라크 사임 뒤 ‘아랍의 봄’은 예멘·시리아 등 중동 전역으로 번져갔다. 미국이 안심하는 대목 하나는 이 운동에서 주도권이 이슬람주의 세력에 있지 않고, 친서방 성격의 세속주의 세력과 시민사회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동안 미국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도 무바라크의 전철을 밟을 운명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다가왔다.

중동에 거대한 변화가 몰아닥치고 있었고, 이는 분명 미국에 우호적인 지형을 초래하는 것 같았다.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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