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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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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라덴 향해 날아간 토마호크

케냐 미대사관 테러로 미국의 핵심표적 된 알카에다
클린턴은 빈라덴 근거지에 미사일 공격을 승인하고
등록 2014-03-08 15:13 수정 2020-05-03 04:27
탈레반 정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사마 빈라덴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자신을 이슬람 성전의 지도자로 부상시키고자 했다. 1997년 3월 〈CNN〉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를 맹비난했다.한겨레 자료

탈레반 정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사마 빈라덴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자신을 이슬람 성전의 지도자로 부상시키고자 했다. 1997년 3월 〈CNN〉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를 맹비난했다.한겨레 자료

1996년 9월27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탈레반이 입성했다. 카불을 4년 동안 장악했던 북부 타지크족 출신 무자헤딘 지도자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전날 휘하 병력과 함께 근거지였던 북부 판지시르 계곡으로 퇴각해야 했다. 1989년 소련군 철수 이후 7년 동안 계속된 지긋지긋한 아프간 내전은 욱일승천 기세의 탈레반에 의해 결국 평정 단계로 들어갔다.

검은 터번을 두르고 콜이라는 화장먹으로 눈가를 검게 칠한 탈레반 무장병력은 존재만으로도 아프간에서 가장 현대화된 도시인 카불을 갑자기 중세의 기괴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입성 당일 탈레반은 아프간 사회주의 정부의 마지막 대통령인 모하마드 나지불라가 연금된 유엔 단지를 찾았다. 탈레반의 입성이 임박하자 마수드는 나지불라에게 두 차례나 카불을 떠날 기회를 줬다. 마수드와 나지불라는 정적이었으나, 어릴 때 이웃 마을에 살며 서로 알던 사이였다. 나지불라는 이를 사양했다. 그는 탈레반 주축 중 하나가 파슈툰족 길자이 부족이므로 같은 출신인 자신과 타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그 역시 탈레반을 파슈툰족 민족주의 세력으로 봤으나 이는 큰 오산이었다. 탈레반이 찾아간 지 몇 시간 만에 그의 주검이 카불의 가장 번잡한 원형 교차로의 교수대에 공개됐다. 주검에 난 상처는 그가 주먹과 돌, 각목으로 맞아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갔음을 말해줬다.

나지불라의 오판과 비참한 최후

나지불라의 최후는 아프간뿐만 아니라 이슬람권 전체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시도된 사회주의를 통한 현대화의 길이 빚은 참극과 동의어였다. 인류가 고안한 체제 중에서 인간의 이성을 가장 신뢰했고 이성에 기반해 세상을 운용하려 했던 사회주의는 인간의 이성에 의한 최악의 오류를 아프간에서 만들어냈을 뿐이다. 탈레반은 그들의 종교경찰 청사에 붙인 ‘이성은 개들에게 던져줘라’라는 구호로 인간의 이성을 조롱했다. 탈레반이 인간 이성이 빚어낸 최악의 오류에 대한 극단적 반동으로 탄생한 세력임을 스스로 말해주는 어구였다.

어쩌면 이슬람주의는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발원해 인류의 절대적 가치가 된 인간 이성과 그 힘에 대한 반동일지 모른다. 인간이 신봉하는 자신들의 이성이 빚어낸 사회와 그 현실은 결코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았다. 이슬람권의 현실은 더욱 그랬고, 그 속에서 절망한 대중이 신의 섭리와 의지로 회귀하려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하지만 탈레반이 신의 섭리와 의지에 전적으로 종속돼 만들어낸 현실 역시 오류투성이인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현실보다 더 큰 모순과 참혹함을 자아낸다. 탈레반이 라고 다시 이름 붙인 카불 라디오를 통해 발표한 새로운 법 중에는 치약 사용 금지가 있었다. 선지자 무함마드가 천연 뿌리를 사용해 이를 닦았다는 것을 이유로 현대식 치약 사용을 금지한 것이다. 치약 사용 금지는 탈레반의 법과 질서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해 5월 잘랄라바드에 온 오사마 빈라덴은 3개월 만에 잘랄라바드가 탈레반에 의해 전격적으로 장악되는 것을 지켜봤다. 빈라덴은 아프간에 오면서 탈레반과 아프간 무장세력에게 약 300만달러를 후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둥지를 튼 빈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를 비난하는 성명과 언론 인터뷰를 시작했다. 탈레반에게 빈라덴은 뜨거운 감자가 돼갔다.

카불에 입성한 탈레반은 최대 후원자가 된 사우디에 빈라덴 처리 문제를 문의했다. 사우디 정보기관 총정보국의 수장 투르키 알파이살 왕자는 사우디 정부가 “당신들이 그에게 이미 망명을 제공했다면, 그가 사우디 왕국에 해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확실히 하라”고 응답했다고 회고했다. 사우디는 빈라덴을 본국으로 데려와 처벌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우려해, 그를 체포할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를 그냥 흘려버렸다. 투르키 왕자는 탈레반이 빈라덴의 입을 다물게 하도록 책임질 것이라고 당시에는 느꼈다. 그때 빈라덴이 사우디로 송환됐다면 탈레반 정권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고, 9·11 테러, 테러와의 전쟁 등은 전혀 다른 길을 갔을 것이다. 탈레반의 세상이 된 아프간에서 빈라덴은 이제 안식처를 찾게 됐고, 이는 그에게 탈레반을 자신의 성전으로 끌어들이는 기회를 제공했다.

성전 지도자로 부상시킨 언론 플레이

하지만 투르키 왕자의 기대와 달리 빈라덴의 반사우디·반미 홍보전은 오히려 강도를 더해갔다. 그는 잘랄라바드 인근 국경지대인 토라보라의 야산 동굴에 자신의 근거지를 차리고 <cnn> <abc> 등 서방 텔레비전과의 직접 인터뷰를 통해 사우디 왕가가 이슬람의 대의를 배신한 역도들이라고 비난했다. 동굴에 자리잡은 그의 모습은, 동굴에서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신의 예언을 받은 선지자 무함마드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었다. 무슬림의 대의를 위해 싸우다 박해받는 자신의 모습을 상징화하는 고도의 홍보 전략이기도 했다. 1997년 3월 <cnn>의 피터 아네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사우디 왕가는 미국의 종복이라며 “샤리아의 판결에 따라 이 정권을 무슬림 공동체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빈라덴은 자신의 행위가 탈레반을 불편하게 할 것임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아프간에 온 뒤 서방 언론과 처음으로 인터뷰를 하고 반미·반사우디 입장을 공식화한 것은 이슬람권에서 반미 성전 지도력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과감한 전략이었다. 실제 빈라덴은 일련의 언론 플레이를 통해 성전 지도자로서의 지명도를 이슬람권뿐만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높였다.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는 헬기를 잘랄라바드로 보내서 빈라덴을 칸다하르로 초치했다. 두 사람은 칸다하르 공항에서 만났다. 오마르는 빈라덴에게 그를 납치하려는 음모가 발각됐다며 칸다하르로 와서 보호를 받으라고 주문했다. 빈라덴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한 구실이었다. 그리고 언론 인터뷰는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다. 빈라덴은 이미 언론 활동 중단을 결정했다고 말했고, 그는 사흘 뒤 일행을 모두 이끌고 칸다하르로 왔다. 칸다하르에 와서도 빈라덴은 오히려 공개적 활동을 확대했다. 그는 경호원들을 이끌고 칸다하르의 사원들을 다니며 공개 강연을 하는 등 아프간 대중에게 지명도를 넓혔다. 그가 오마르에게 약속한 언론 인터뷰 금지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는 파키스탄 언론과 일련의 인터뷰를 했다.
1998년 3월, 파키스탄 신문 의 기자 라히물라 유수프자이는 빈라덴과의 인터뷰가 끝난 뒤 이슬라마바드로 돌아와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물라 오마르의 격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빈라덴이 지하드를 선포하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나한테 한마디도 안 했다며? 아프간에는 오직 한 사람의 통치자만 있을 수 있다. 나이거나 빈라덴이다.” 오마르는 자신의 권위를 뭉개는 빈라덴에 격노했으나, 그때는 이미 자신의 마음대로 빈라덴을 처리하기에는 그의 위상이 너무 높아져 있었다. 이틀 뒤 빈라덴은 미국 <abc>와 또 인터뷰를 했다.

사우디-아프간의 빈라덴 추방 논의

빈라덴이 아프간에 본격적으로 둥지를 틀고 홍보전을 확장하던 1996년 말 미국은 빈라덴의 측근이던 자말 알파들의 자백을 통해 알카에다라는 조직의 실체를 파악하고, 이미 출범한 빈라덴 추적반인 알렉스테이션을 통해 그의 체포 공작을 입안했다. 1993년 1월 중앙정보국(CIA) 랭글리 본부 정문 앞에서 총기 난사 테러를 일으키고 파키스탄으로 도주한 미르 아말 카시를 잡기 위한 현지 체포조를 빈라덴 체포조로 전환했다. 알렉스테이션은 칸다하르 인근에서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왕족들과 매사냥을 하던 빈라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크루즈미사일 공격으로 빈라덴을 타격할 공작을 실행 직전까지 몰고 갔다. 타국 영토에 대한 군사적 공격, 무엇보다 UAE 왕족의 피해 등에 대한 부담으로 실행 직전이 취소됐다. 또한 이 공격으로 당시 미국이 추진하던 UAE에 대한 대규모 무기 판매가 무산될 우려가 있어, 조지 테닛 당시 CIA 국장이 결행 단계에서 취소했다.
이때까지도 미국에는 국내법에 따른 빈라덴 처벌의 근거가 없었다. 결국 1998년 6월 뉴욕의 연방대배심은 알카에다와 소말리아에서의 미국인 살해 사건 연관 혐의로 빈라덴에 대한 형사 기소 결정을 내렸다. 미 국내법으로도 빈라덴의 처벌 근거는 생겨났다. 앞서 5월에 테닛 국장은 사우디로 날아가 당시 사우디의 실질적 통치자인 압둘라 왕세자에게 빈라덴 문제에 대한 협조를 부탁했다.
사우디도 이제 더 이상 빈라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미국에서 빈라덴 기소가 이뤄졌던 6월 압둘라 왕세자는 투르키 왕자를 불러 “이 문제를 끝내라”고 명령했다. 투르키는 칸다하르로 날아가 오마르를 처음으로 대면했다. 투르키는 빈라덴의 입을 막겠다는 과거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이제 빈라덴을 넘겨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오마르는 당황했다. 그는 파슈툰족의 부족법에서 손님에 대한 배신은 큰 죄라며 “어쨌든 우리는 그에게 망명을 제공했고, 그를 그냥 넘겨줘 비행기에 태우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체면을 살릴 타협안을 내놓았다. 빈라덴이 이슬람법을 어겼는지 판단하고 그의 인도를 결정할 양국 공동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제안이었다. 투르키는 오마르에게 다시 물었다. “원칙적으로 빈라덴을 우리에게 넘겨주는 데 동의하냐.” 오마르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한 달 뒤인 7월 탈레반은 빈라덴 추방 논의를 시작하려고 대표단을 사우디에 보냈다. 대표단은 구체적 계획을 갖고 칸다하르로 돌아갔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 투르키는 오마르로부터 회신을 받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풍전등화에 처한 빈라덴의 운명을 다시 역전시킬 대형 사건이 준비되고 있었다. 빈라덴은 아마 당시 자신의 추방이 진전되고 있음을 알고서, 이를 뒤집기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하던 일을 급진전시켰을 것이다. 며칠 안으로 빈라덴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슬람 전사로 떠오른다.

토마호크, 아라비아해를 날다

1998년 8월7일 오전 10시30분, 아프리카 케냐 수도 나이로비의 미국대사관 정문에 폭탄을 적재한 트럭 한 대가 접근하자마자 폭발했다. 9분 뒤 인근 국가 탄자니아의 수도 다르에스살람의 미국대사관 주차장에서도 폭탄을 적재한 트럭 한 대가 폭발했다. 동아프리카 동시 테러 사건이었다. 나이로비에서는 미국인 12명을 포함해 213명이 숨지고 4천 명이 부상당했다. 다르에스살람에서는 11명이 숨지고 85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1983년 레바논의 미 해병기지에 대한 시아파 이슬람 과격분자들의 자살폭탄 테러 이후 미국을 겨냥한 최악의 테러 공격이었다. 그리고 이는 알카에다가 명백히 주도적으로 저지른 첫 대형 테러였다.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알카에다 테러망을 추적하던 미국 정보 당국은 이 사건이 빈라덴과 알카에다의 작품임을 직감하고, 관련 감청 자료를 분석한 뒤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8월14일 알카에다의 소행임을 결론 내리고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제 빈라덴과 알카에다는 미국의 제일 안보 현안으로 떠올랐고, 구체적 대응은 불가피했다. 워싱턴 지도부에서 샌디 버거 안보보좌관, 조지 테닛 CIA 국장,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재닛 리노 법무장관,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 휴 셀턴 합참의장으로 구성된 안보 이너서클인 이른바 ‘스몰그룹’에 제시된 보복안은 아프간 등 빈라덴의 근거지에 대한 크루즈미사일 공격이었다.
당시 워싱턴 정가는 클린턴 대통령의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 섹스 스캔들로 들끓고 있었다. 클린턴이 텔레비전을 통해 대국민 사과를 하던 8월17일, 이 방안은 대통령에게 보고돼 확정됐다. 클린턴은 섹스 스캔들이라는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안보 현안까지 다뤄야 하는 이중고에 처했다. 곧 CIA에서 빈라덴이 측근들과 8월20일 동부 아프간 코스트의 남쪽 자와르킬리 훈련장에서 회합한다는 신뢰할 만한 정보가 나왔다. 정보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으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클린턴은 이 공격의 목적은 빈라덴 제거라고 명백히 강조했다.
아프간 현지 시각으로 밤 10시, 아라비아해에 있던 미군 전함들에서 75발의 토마호크 크루즈미사일이 아프간의 자와르킬리 계곡을 향해 발사돼 조용히 날아갔다. 동시에 13발의 크루즈미사일도 알카에다의 대량살상무기 생산지로 의심받던 수단 수도 하르툼 인근의 화학무기 공장을 향해 발사됐다. 어둠 속에서 날아가는 크루즈미사일은 마치 제비의 비행 같았다. 빈라덴을 제거하려는 이 미사일은 빈라덴에게 오히려 제비의 비상을 곧 제공하게 된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abc></cnn></abc></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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