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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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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방아쇠 당긴 ‘보복살인’

“종파 전쟁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면 무감각한 이들을 각성시켜…”
전쟁은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이 개입하고 수니-시아파 종파분쟁으로 악화되는데
등록 2014-06-27 13:30 수정 2020-05-03 04:27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ISIL)라는 극력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이 바그다드를 향해 진군하며 전쟁이 다시 격화되는 2014년 6월 현재 이라크 상황으로 오기까지 이라크 전쟁은 몇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1단계(미군의 이라크 침공과 사담 후세인 정권 타도, 2003년 3~5월)-2단계(내란, 2003년 5월~2005년 말)-3단계(내전 및 이라크 신정부 구성, 미군 증강과 안정화 대책, 2006년~2011년 말)-4단계(미군 철수와 내전 소강상태, 2011년 말~2014년 초)-5단계(내전 재격화, 2014년 초 이후)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에는 페다인 민병대 등 수니파 무장세력이, 그다음에는 시아파 무장세력이, 그리고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총을 들고 미군에 대항해 궐기했다. 미군은 처음부터 자신들이 싸워야 하는 적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내란에 휩쓸려 들어갔다.

자르카위-알카에다-ISIL

2003년 6월이 되자 상황은 분명해졌다. 수니 삼각지대, 그중에서도 바그다드와 팔루자, 티크리트에서의 폭동과 소요, 미군에 대한 공격은 이 사태가 내란으로 접어들었음을 말해줬다. 미군도 6월9일 ‘반도 타격 작전’을 시작으로 반군 소탕 작전에 나섰다. 티그리스강 유역 지대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반폭동 작전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루 평균 12건의 공격, 이에 따라 미군 1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했다. 반정부 게릴라는 점점 새로운 전술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도로변에 심어놓은 정교한 수제폭탄, 박격포의 사용, 매복 공격 등으로 미군은 사방에서 적의 공격에 노출됐다.
8월19일 유엔 이라크지원단이 본부로 사용하던 바그다드 카날 호텔에 대한 폭탄테러, 열흘 뒤인 29일 이라크 내에서 시아파들에게 세 번째로 성스러운 사원인 나자프의 이맘알리 사원에 대한 폭탄테러는 이라크 내란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말해주는 새로운 이정표였다. 이라크 내 극렬 이슬람주의 세력인 ‘알타우히드 왈 지하드’를 이끄는 잔악한 지도자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가 저지른 이 사건들은 이라크 내란에 국제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이 본격적으로 개입했고, 또 수니-시아파의 종파 분쟁으로 악화되고 있음을 드러냈다.
특히 이맘알리 사원에 대한 차량 자살폭탄은 자르카위의 장인이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 뒤 유엔 이라크지원단은 철수했고, 시아파는 수니파에 대한 보복 테러에 나선다. 자르카위의 이 조직은 나중에 알카에다의 이라크 지부가 됐고, 2014년 6월 현재 바그다드로 진군 중인 ISIL의 모태다.
10월 말 이슬람의 최고 성절인 라마단에 즈음해 반군의 공세는 고조됐다. 마치 베트남 전쟁 때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구정 공세를 방불케 하는 라마단 공세였다. 공격은 하루 50건으로 늘었고, 미군은 11월 한 달 동안 82명이 사망하고 337명이 부상당했다. 미군도 이에 맞서 11월 둘쨋주 들어 ‘철망치 작전’을 통해 후세인 정권 타도 이후 처음으로 공군력을 동원해 공습을 재개했다. 미군의 강력한 대응에 게릴라들의 공격 빈도가 줄고 있었다. 12월12일에는 티크리트에서 은거 중이던 사담 후세인도 체포됐다.
후세인 체포 이후 2004년 봄에 게릴라들의 공세가 주춤하자, 미국은 내란이 진정 단계에 들어섰다는 낙관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기간에 자르카위가 주도한 이슬람주의 세력의 폭탄테러는 뚜렷한 증가세를 보였다. 자르카위는 이제 이라크 내란의 주요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했다. 비교적 잠잠했던 2004년 봄은 폭풍을 예고하는 전야였다. 미군 점령에 대한 불만은 시아파에게로 퍼져갔다. 실업과 기본 사회서비스의 부재에 대한 불만은 수니파만이 아니라 시아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비디오로 공개된 김선일씨의 참수

사드르시티의 유력 가문이자 시아파 이슬람주의 성향의 성직자인 무끄타다 알사드르는 임시행정처(CPA)의 이라크 현지인 자문기구인 행정위원회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 뒤, 미군 점령에 항의하며 마디군(Mahdi Army)을 조직했다. 4월4일 마디군은 전면적 무장봉기에 나섰다. 나자프, 쿠파, 알쿠트 및 바그다드 일부, 그리고 나시리야, 아마라, 바스라 등 남부 도시를 장악했다. 비교적 내란에서 비켜서 있던 시아파 지역들이었다. 시아파로 구성된 이라크군은 여지없이 붕괴되며 마디군 등 반군으로 넘어왔다.
동시에 수니파의 공세도 가세했다. 3월31일 미국의 군사용역회사 블랙워터의 요원 4명이 팔루자에서 난자당한 채 그 주검이 거리에 공개됐다. 팔루자는 그 뒤부터 이라크 전쟁을 상징하는 도시가 된다. 미군과 이라크군은 시아파 마디군이 봉기한 4월4일 팔루자를 재탈환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벌어진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를 벌였다. 약 2천 명으로 추정되는 게릴라 세력들은 전혀 다른 세력이었다. 분대 규모의 전투 단위를 짠 게릴라들은 소련의 종심방어 전술을 구사하는 등 정규 보병부대의 전술을 정교하게 수행했다. 이는 이들이 후세인의 정예 정규군의 지도를 받았음을 드러냈다.
한 달간 전투를 벌였지만 미군은 팔루자를 탈환하지 못했다. 점증하는 국내외의 우려 여론에 양쪽은 4월30일 휴전을 맺고, ‘팔루자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팔루자의 치안을 맡겼다. 팔루자단에는 미군과 전투를 벌인 게릴라도 참가했다. 결국 팔루자는 반군 게릴라의 수중에 여전히 남았고, 자르카위의 이슬람주의 세력이 큰 몫을 차지했다. 팔루자 전투의 결과 라마디, 사마라, 바쿠바도 수니파 반군세력에 떨어졌다. 팔루자 전투 등 2004년 봄 폭동은 이라크 내란의 한 전환점이 됐다. 반군과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은 확고한 근거지를 장악하고 서로 합종연횡을 시작하며 세력을 불려나갔다.
6월에는 한국인 선교사 김선일씨가 자르카위의 조직에 납치돼 끝내 참수당하는 비디오까지 공개됐다. 이라크 내 내란의 양상과 이슬람주의 세력의 극성을 한국인도 피부로 실감하게 했다. 이미 자르카위는 이라크 내란을 종파 간 내전으로 비화해 그 공간에서 이슬람주의 세력의 확장을 노리는 악마적인 계획을 구상했다. 자르카위가 오사마 빈라덴에게 보내는 편지가 2004년 초 미군에 의해 포획됐다. 그는 편지에서 시아파를 뱀과 전갈이라고 묘사하며 “변화의 열쇠는… 우리가 종파 전쟁으로 그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면, 무감각한 수니파들을 각성시켜 급박한 위험을 느끼게 하는 게 가능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아파를 때려서, 그들이 다시 수니파를 공격하게 하고, 그래서 폭력의 악순환으로 밀어넣어서 알카에다가 시아파의 분노에 맞서는 수니파의 보호자로 부상하게 하자는 전략이었다.
2004년 6월28일 미군 등 연합군의 점령이 공식 종료됐다. 이야드 알라위 총리가 이끄는 이라크 임시정부에 주권은 이양됐다. 반군세력은 알라위 정부를 미국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하고, 오히려 알라위 암살에 28만달러에 달하는 현상금까지 걸었다. 내란 양상은 갈수록 악화됐다.
8월에는 남부 시아파 지역에서 마디군이 다시 봉기했고, 나자프에서 마디군과의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9월 들어 미군은 11월 말 미국의 대통령 선거와 2005년 1월 이라크 선거를 앞둔 정지 작업으로 수니파 지역에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미국의 이라크 침공 명분마저 완전히 증발했다.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 수색 작업을 벌였던 이라크서베이그룹은 9월30일 활동 보고서를 내고, 이라크 내에서 대량살상무기와 그 개발 증거는 없다고 결론 냈다. 자르카위 단체는 10월17일 명칭을 ‘이라크 알카에다’로 바꾸고, 알카에다와 빈라덴과의 연대를 발표했다. 전쟁의 명분이던 대량살상무기는 없었고, 알카에다 등 이슬람주의 세력은 오히려 이라크에서 확장됐다.

부시의 궁색한 변명 ‘파리 끈끈이론’

대선을 치르는 조지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전쟁 악화를 ‘파리 끈끈이론’이라는 궁색한 논리로 변호했다. 부시는 유세에서 “우리는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테러분자들과 싸우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도시 거리에서 그들을 직면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라크 전쟁으로 알카에다 등 테러분자들이 모여들어 그곳에서 그들을 소탕하고 있고 미국은 안전하다는 말이다. 파리를 끈끈이로 유인해 죽인다는 논리다.
자르카위는 성명에서 “신이시여, 무자헤딘의 선사이신 당신이 우리를 바다에 뛰어들라고 하면, 우리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당신이 명령하신다면, 우리는 복종하겠습니다”라고 빈라덴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빈라덴도 “무자헤딘 형제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는 두 개의 강의 땅(이라크) 알카에다 조직의 에미르(왕자)임을 알아야 한다”고 화답했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미군의 공세는 절정에 올랐다. 반군의 반격도 가열됐다. 팔루자를 놓고 미군과 반군의 대대적인 공방이 다시 벌어졌다. 미군의 공세에 다수의 반군은 미리 팔루자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미군은 남아 있는 반군 약 5천 명의 결사적 반격에 주춤했고, 전투가 가열되면서 반군은 다시 1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 전투는 2005년 1월까지 계속됐다. 미군은 팔루자를 점령했으나 이는 풍선 효과만을 불렀다. 팔루자를 빠져나간 반군은 북부 모술과 바그다드 등지로 들어가, 그곳에서 세력을 오히려 확대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 캠페인을 통해 미국 국민의 안보 우려를 자극하며 재선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은 이제 그의 두 번째 임기를 초반부터 레임덕으로 빠뜨리는 블랙홀이 돼버렸다. 2004년에만 미군 848명이 사망하고 9034명이 부상당했다.
2005년 들어 이라크는 1월31일 제헌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 12월15일 총선을 거쳐 신정부 구성을 위한 작업을 마쳤다. 선거 실시는 외형적으로 성공으로 보였으나, 수니파의 대다수 유권자가 불참한 가운데 시아파와 쿠르드족의 민족 몰표 투표였다. 이라크 내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수니파 지역인 안바르주에서 수니파 주민은 단지 2천 명만 투표했을 뿐이다. 이라크 신정부는 사실 시아파 정부였다. 치안을 담당하는 내무부는 시아파 돌격대로 채워졌다. 선거는 오히려 재앙이었다. 내란은 안으로 더욱 곪아갔다.
반군 대열 내에서 자르카위로 대표되는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의 활동이 더욱 거세지고, 이들은 이라크를 본격적인 종파 분쟁으로 몰고 갔다. 2월22일 전세계 시아파의 최고 성소 중 하나인 사마라의 알아스카리 사원에 대한 자르카위 연계 세력의 폭탄테러는 이라크 내란을 전면적 내전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시아파는 격앙했고, 마디군은 바그다드 등 주요 도시에서 군사 퍼레이드를 벌이며 수니파 사원과 성직자들을 공격했다. 수니파 반군과 주민들도 방어군을 조직해 대응했다. 양쪽은 보복 살인을 주고받았고, 폭력의 악순환은 이라크를 전면적 내전으로 밀고 갔다.
6월이 되자, 바그다드에서만 하루 100명이 죽어나간다고 유엔은 보고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10월 알아스카리 사원 테러 이후에만 37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는 등 이라크에서 모두 16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UNHCR가 보수적으로 집계한 난민 수는 2008년이 되면 470만 명, 이라크 인구의 6분의 1로 늘어난다. 중동 역사상 최대의 난민 발생이다.

2006년 민주당은 다수당으로

2006년 11월7일에 치른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다수당으로 올라섰다. 민주당은 이라크 전쟁 등 부시 정부의 실정을 딛고 14년 만에 다수당 지위를 회복했다. 선거 일주일 전 부시는 이라크 전쟁의 주역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자신의 임기 동안 같이 갈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선거 다음날 그는 럼즈펠드의 사임을 발표했다. 럼즈펠드가 선거 전날 사임서를 제출했고, 부시는 이를 선거 당일에 봤다고 한다. 공화당은 부글부글 끓었다. 럼즈펠드의 사임을 미리 발표했다면 선거 참패는 면했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군부 내에서도 2006년 초 미군 퇴역장성들이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사임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장군들의 반란’이 일어났었다.
부시는 2007년 1월10일 “잘못이 어디에서 일어났든 간에 그 책임은 나에게 있다”며 이라크 전쟁 실패를 인정하고, 주둔 병력 2만 명 증강 등 이른바 ‘증강 전략’이라는 새로운 이라크 안정화 대책을 발표한다. 그는 1월23일 의회 연두교서 발표 연설에서도 “우리는 알카에다를 아프간의 그들 안식처에서 몰아내지 못하고 자유 이라크에서 새로운 안식처를 만들게 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아프간 전쟁 이후 사태 전개를 한마디로 인정한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에 대해 새로운 접근책을 모색할 때 아프간에서도 탈레반이 완전히 기력을 회복해 이라크에 준하는 내란이 이미 깊어지고 있었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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