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을 계기로 수면 위로 부상한 이라크 전쟁 문제는 곧 국제적으로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영국의 노동당 대회에서 “예방적 조처는 미래에 반갑지 않은 결과로 되돌아올 수도 있다. …폭탄과 무기들이 얼마나 정확한지 모르겠다. 그것들을 사용할 때 무고한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 논리인 예방전쟁 독트린을 비판한 것이다.
유엔으로 가져가면 안 되는데…
국제사회에서도 영국을 제외하고는 이라크 전쟁을 적극 지지하는 국가가 나서지 않았다. 러시아와 중국은 물론 프랑스, 더 나아가 미국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인 독일과 캐나다도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유엔에서 논란이 격화되는 가운데, 미 의회가 10월 들어 상·하원 합동으로 부시 대통령에게 “필요한 조처들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이라크에 대한 미 군사력 사용 승인 합동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부시에게 이라크에 대한 군사력 사용 권한 결정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 초읽기를 방해한 것이 국제 여론이다.
애초부터 부시 대통령과 그 행정부의 매파들은 유엔으로 이 문제를 가져가길 원치 않았다. 유엔에서 이 문제를 토의하면, 시간만 끌면서 정당성마저 훼손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콜린 파월 당시 국무장관 등 비둘기파들은 국제적 지지를 얻어야만 침공에 따른 부담을 덜고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부시는 마지못해 유엔으로 이 문제를 가져갔으나,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유엔은 격론 끝에 11월8일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441호를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1998년 이후 중단됐던 이라크에 대한 무기 사찰 재개와 이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의 ‘중대한 결과’를 규정했다. 미국과 영국은 이 결의안이 안보리에서의 추가 협의 없이 이라크를 침공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프랑스와 러시아는 ‘중대한 결과’에는 이라크 정권을 타도하는 무력 사용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맞섰다. 어쨌든 유엔은 이 결의안을 통해 이라크에 “군축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서, 무기 사찰단 파견을 결정했다. 후세인 정권은 결의안 통과 5일 만인 11월13일 이를 수용했다.
사찰단이 이라크에 입국함으로써 전쟁을 피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보였다. 1998년 이라크에서 철수한 유엔 사찰단 쪽은 나중에 이라크가 사찰단에 전적으로 협조했으며,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의 90~95%는 이미 제거된 상태였다고 밝혔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쪽도 사찰단 철수 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특히 1998년 사찰단 철수 뒤 감행된 미국의 공습인 ‘사막의 여우 작전’으로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 개발이 의심되는 시설은 물론 재래식 군사적 능력이 심각하게 파괴된 상태였다.
사찰단 활동이 진행되는 동안, 이라크 전쟁 개전을 둘러싼 찬반 논란은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의 2월5일 유엔 연설로 정점에 오른다. 부시 행정부 내에서 외교적 해결을 모색하는 대표적 비둘기파인 파월은 결국 전쟁을 향한 총대를 메야 했다. 그는 연설에서 뚜렷한 증거가 없던 이라크와 알카에다의 연계에 대해서는 일반론적인 주장만 하면서, 대신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관련성을 집중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연설장에서 작은 병을 들고 나와 이 병에 담을 수 있는 탄저균이라면 대량살상 능력이 있다며, 대량살상무기의 위협에 대한 바람을 잡았다. 그는 이라크의 이동식 생물학무기 실험실에 대한 컴퓨터 생성 이미지와 이라크의 농축우라늄 추출에 이용됐다는 알루미늄관을 증거로 제시했다. 외교적 해결을 선호하는 파월의 정제된 연설은 이라크 침공에 회의적이던 프랑스 등 미국 동맹국들로 하여금 반대의 명분을 접을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반대 주장 신빙성 훼손하려 ‘리크게이트’
하지만 파월이 제시한 이라크의 이동식 생물학무기 실험실은 미국 국방정보국(DIA)의 비밀 에이전트인, 암호명 ‘커브볼’이라는 이라크 화학기술자 라피드 아메드 알완 알자미드의 날조된 주장에 근거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그는 2011년 인터뷰에서 자신이 이에 대해 거짓말을 했는데, 자신의 주장이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인정했다. 알루미늄관 역시 파월의 연설 전에 미국 에너지부 등에서 핵개발용이 아니라고 부인한 바 있고, 파월은 나중에 자신이 잘못된 정보에 근거했다고 인정했다. 이라크가 니제르에서 옐로케이크 우라늄을 수입해 이 알루미늄관을 이용해 우라늄을 농축했다는 주장은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 개전을 위한 대표적인 공작이 됐다. 이 문제를 조사했던 조지프 윌슨 전 이라크 대사는 이라크가 니제르에서 옐로케이크 우라늄을 수입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스쿠터 리비 부통령 비서실장 등은 윌슨 보고의 신빙성을 훼손하려고, 중앙정보국(CIA) 비밀요원인 그의 부인 밸러리 플레임의 신분을 언론에 폭로하는 ‘리크게이트’를 일으켰다. 리비는 나중에 검찰에 기소됐고, 그의 사면을 놓고 부시와 체니의 관계는 파탄이 났다.
막무가내식 미국 침공 계획이 현실화되자, 이라크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며 침공을 피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후세인 정권은 타지크 아지즈 부총리까지 내세워 미국 내 이라크 전쟁의 기획자 중 한 명인 리처드 펄 국방정책위원장을 간접 접촉했다. 이라크 쪽은 미국 회사들에 석유 등 자원 이권, 유엔 감시하의 선거, 미국의 직접 사찰, 이라크가 수감 중이던 알카에다 요원 인도 및 아랍-이스라엘 평화과정에 관한 미국 정책에의 전적인 협조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3월 초, 펄의 대답은 ‘우리는 그들을 바그다드에서 볼 것이라고 전하라’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사담 후세인의 망명까지 제안된 것으로 전해진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 개전 전인 2003년 2월22일 자신의 크로퍼드 목장에서 만난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스페인 총리에게 당시 이집트의 중재를 거론하면서, “그(사담 후세인)는 10억달러를 가져가는 것이 허락된다면 망명을 준비할 것이라는 뜻을 표명했다”고 밝혔다. 아스나르 총리가 사담이 정말 떠날 수 있느냐고 재차 묻자, 부시는 “그렇다. 그런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암살당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부시는 “사담 후세인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그는 계속 장난을 칠 것이다”라며 “그를 제거할 때가 오고 있다”고 말했다. 스페인 신문 가 당시 면담의 대화록을 토대로 한 이 보도에 대해 미국 쪽은 논평을 거부했다.
파월의 연설이 있은 지 9일 뒤인 2월14일 한스 블릭스 이라크 사찰단장은 유엔 안보리에 보고했다. 결론적으로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의 지속이나 재개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대량살상무기로 규정되는 것들의 의미 있는 양도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블릭스의 보고는 사실상 미국의 주장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는 앞서 파월이 유엔 연설에서 제시한 증거의 신빙성을 지적하면서도, “각국 정부는 사찰단이 갖고 있지 않은 정보원들을 보유하고 있다”며 한 가지 여지를 남겨놓았다. 그는 이런 것들을 근거로 이라크가 더 협조적으로 나온다면 “사찰을 통한 무장해제 기간이 더 짧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라크 내에 검증해야 할 사항이 더 많이 있겠지만, 그조차 사찰을 통한 비군사적 조처로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기네스북에 기록된 1천만 명 ‘반전시위’
블릭스의 보고 다음날인 2월15일 전세계적으로 대대적인 반전시위가 벌어졌다. 전세계 800개 도시에서 600만~1천만 명이 참가했다. 이는 기네스북에도 인류 역사상 최대 시위로 기록됐다. 부시 행정부는 블릭스의 보고에 부글부글 끓었지만, 여지를 이용했다. 사찰단은 3월에 발표한 공식 보고서에서 이라크가 유엔 안보리 결의안 1441호를 준수했는지 검증하는 데는 몇 달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이라크가 유엔 결의안을 준수하는 데 실패했다는 결론을 내고, 이라크에 대한 군사적 조처에 대해 유엔의 승인을 얻는 결의안 채택을 추진했다. 하지만 러시아와 함께 프랑스, 독일, 캐나다가 외교적 노력을 더 하자고 반발했다. 안보리에서 부결될 것이 명백해지자, 드디어 3월17일 부시는 후세인에게 48시간 내에 이라크를 떠나지 않으면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을 맞을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하는 전국 연설을 했다. 그와 동시에 부시 행정부는 유엔 승인을 요구하는 제안을 철회했고,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 요원들의 이라크 철수를 명령했다. 전쟁은 이제 선포됐다.
3월19일 새벽 5시30분, 미군은 바그다드 인근의 알도라 농장에 지하 시설물까지 파괴하는 4발의 벙커버스터 폭탄을 투하하며 이라크 전쟁을 개전했다. 이 농장에 후세인이 은거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른 것이었다. 홍해와 걸프만에 정박한 미군 구축함들에서도 40발의 크루즈미사일이 발사됐다. 하지만 그곳에 후세인은 없었다. 후세인은 1995년 이후 그곳을 방문한 적도 없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곧이어 미군 24만1500명, 영국군 4만1천 명, 오스트레일리아군 2천 명, 폴란드군 200명으로 구성된 연합군이 지상 침공을 시작했다. 3월20일이 되자 이미 미 중부사령부의 특수군은 이라크 남부 유전지대와 서부 사막지대 등 전 국토의 25%를 사실상 장악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3월21일 새벽 미 해병 1사단이 이라크-쿠웨이트 국경지대를 넘어, 미 정규 지상군으로서는 처음으로 이라크 땅에 발을 디뎠고, 또 주력부대인 육군 3사단이 뒤를 이었다.
이날 부시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가 이라크 영토의 40%, 유전의 85%를 손쉽게 장악한 것 같은데, 하루치 작전치고는 믿기 어려운 전과다”라고 말하며 고무됐다. 그의 말대로 이라크군은 무력했고 변변한 저항도 없었다. 이는 걸프전 이후 10년 이상 지속된 국제제재와 무기사찰, 그리고 그 기간에 반복된 미군의 공습으로 이라크군의 능력이 사실상 와해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또 미국은 이라크 전쟁 개전에 앞서 이미 반년 전에 이라크 북부에 잠입한 CIA 요원들이 구축한 ‘록스타’라는 이라크 현지 정보망, 위성 및 공중 촬영 정보, 통신 감청 등을 통해 이라크군의 전술적 배치 상황을 손바닥 보듯 알 수 있었다. 특히 록스타 스파이망은 미군이 개전과 함께 타격할 공습 목표를 일일이 제공하는 한편, 개전할 경우 이라크군의 자진 탈주와 항복 공작을 유도했다.
후세인 정권도 이상하리만치 미국의 침공에 대비하는 군사 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나중에 이라크 정권 인사들은 후세인 등 정권 핵심 요원들이 미군의 직접적 침공보다는 이라크 내의 시아파 및 쿠르드족 반란에 더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후세인 등은 미국이 이상하리만치 자신들의 대량살상무기에 집착하는 것을 보고는, 미국이 정말 자신들에게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믿는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해, 미국이 대량살상무기를 의식해 바그다드까지 침공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후세인은 걸프전 때도 미국이 바그다드까지 침공하지 않고 정권 붕괴도 밀어붙이지 못한 것은 자신들의 대량살상무기 때문이라고 오판했다고 이들은 전했다. 미국이나 이라크나 이라크 전쟁 개전은 자신들의 도그마와 오판의 악순환이었다.
개전 3주 만인 4월9일 토미 프랭크스 중부군 사령관은 비디오로 부시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전황을 보고했다. 바그다드 남부를 평정했다는 것으로 바그다드 함락이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이날 미군이 바그다드를 가르는 티그리스 강변을 장악하면서 후세인 정부는 붕괴했다. 해병대가 바그다드 시내로 진주해 시민들과 함께 후세인의 동상을 철거하는 장면이 전세계에 생중계됐다. 다음날 에는 레이건 행정부 시절의 안보관리인 케네스 애들먼이 ‘식은 죽 먹기: 되돌아보기’라는 칼럼에서 이라크 전쟁의 참화를 경고한 반전파들의 오판을 조롱했다.
식은 죽 먹기, 기가 막힌 전개
부시 행정부 내의 개전파들은 기고만장해졌다. 전쟁 주역들인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폴 울포위츠 부장관과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경험으로 이같은 확신을 했다는 애들먼에게 체니는 전화해서 식사를 제안했다. 나흘 뒤 이들은 감격적인 포옹을 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스쿠터 리비 부통령 비서실장은 “기가 막힌 전개”라는 말로 이라크 전쟁을 압축했다. 이라크 전쟁을 반대한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을 조롱했고, 파월도 그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한 가지 질문이 남긴 했다. 애들먼은 “우리가 대량살상무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놀라운 사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체니는 바그다드가 함락된 지 “사실 나흘밖에 안 됐다”고 대답했다.
부시는 공개적으로 나섰다. 5월1일 그는 파일럿 복장을 한 채 전투기에 탑승해 샌디에이고 해상에 정박했던 항공모함 에이브러햄링컨호에 착륙했다. 그는 함상에서 “이라크에서의 주요 작전은 끝났다”며 사실상 승리를 선언했다. 그의 뒤에는 ‘임무 완수’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부시가 승전을 선포하는 쇼를 할 때 이라크에서는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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