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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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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기 둘 사선, 그리고 막대사탕 하나

마침내 무르익은 9·11 테러 계획
함부르크 아랍 유학생들, 비행학교 등록 임무를 하달받다
등록 2014-04-04 10:13 수정 2020-05-03 04:27

“막대기 두 개, 사선(/), 그리고 막대사탕 하나.”
2001년 8월29일 새벽 2시30분, 미국에서 모하메드 아타는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람지 비날시브에게 전화를 했다. 암호로 된 이런 수수께끼를 전해받은 비날시브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곧 이것이 ‘11/9’, 즉 9월11일을 의미함을 알았다. 여객기를 이용해 미국 본토의 세계무역센터 및 국방부(펜타곤) 등 주요 시설물을 공격한다는 알카에다의 전대미문 테러 공격의 디데이가 확정된 것이다. 앞서 비날시브는 아타로부터 전자우편으로 이 작전이 완성 단계에 들어갔음을 통보받았다. 아타는 여자친구 ‘제니’에게 보내는 편지로 위장해, “첫 학기는 3주 내에 시작한다. …개인적 교육에는 19학점과 4개의 시험”이라고 전했다. 첫 학기는 9·11 테러 공격을, 19학점은 19명의 알카에다 납치요원을, 4개의 시험은 납치할 비행기로 공격할 4개의 목표물을 의미했다. 이 테러 공격은 디데이가 확정됨으로써 최종적으로 ‘성화요일’ 작전으로 명명됐다.

디데이 확정, 작전명 ‘성화요일’

디데이를 확인한 비날시브의 생각은 1년9개월 전 아프가니스탄의 척박한 산악으로 돌아갔다. 1999년 11월 말 그와 아타 등 함부르크의 아랍 유학생 4명이 찾아간 아프간의 토라보라 인근에 있는 알카에다의 칼단 훈련캠프. 그들에게는 예상했던 훈련캠프 입소라는 초보 과정의 임무가 부여되지 않았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함부르크에서 안락한 서방의 유학 생활을 즐기던 이들 풋내기 지하디스트 지망자에게는 상상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예우와 임무가 갑자기 떨어졌다. 반미성전 전선의 신화적 지도자인 오사마 빈라덴이 그들을 직접 만나 환대했다. 그들은 빈라덴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순교를 다짐했다. 알카에다의 군사사령관인 모하메드 아테프(일명 아부 하프스 알마스리)가 이들에게 고도의 비밀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알려줬다. 함부르크그룹이라고 지칭되는 이들의 리더 격인 아타는 나머지 3명에게 독일로 돌아가 비행학교에 등록하라고 지시했다. 빈라덴과 몇 차례 만나며 이들의 리더로 선발된 아타는 미국의 세계무역센터, 펜타곤, 의사당 등 이들이 공격할 예비 목표물을 포함한 거대한 테러 공격 계획을 지시받았다. 그 뒤 테러 공격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알카에다의 지하디스트로서 전혀 검증이 안 된 풋내기 서방 유학생들에게 할리우드 영화도 상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비밀공작 임무가 갑자기 맡겨지기까지는 3년에 걸친 시행착오와 숙성 기간이 있었다. 9·11 테러의 뿌리는 파키스탄 청년 람지 유세프가 1993년 2월25일 시도한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에 있다. 트럭에 적재한 폭약으로 시도된 이 테러는 이 건물의 지하주차장 시설을 손상시키는 데 그쳤다. 미국의 상징적 건물을 테러한다는 착상은 그의 삼촌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에 의해 거대한 테러 공격 계획으로 거듭났다. 미국 수사 당국에 KSM으로 불리는 그는 이슬람권의 지하디스트 조직과 네트워크를 넘나드는 전형적인 ‘외로운 늑대형’ 지하디스트였다.
파키스탄 발루치스탄이 가족의 고향인 그는 쿠웨이트에서 성장했다. 종교적인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16살에 무슬림형제단에 가입했다. 1983년 미국으로 유학간 그는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자극받아, 졸업하자마자 1987년 파키스탄 페샤와르로 가서 아프간 무자헤딘 투쟁에 동참했다. 그는 그 뒤 보스니아 내전을 거쳐 카타르 정부의 전력수리부 엔지니어로 4년간 일했다. 그가 지하디스트로서 서방 당국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조카 람지 유세프가 기획한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에서 단역을 맡으면서부터다. 유세프는 이 사건을 기획하던 1991~92년 KSM와 여러 차례 통화하면서 진전 과정을 전하고 의논했다. KSM은 유세프에게 660달러를 송금하기도 했다.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을 저지르고 파키스탄 등지로 도피 중이던 유세프를 대동하고 KSM은 필리핀으로 잠적해 이른바 ‘보진카 사건’을 계획한다. 보진카 사건은 미국 여객기 12대를 태평양 상공에서 이틀 간격으로 폭파시키려 했던 음모였다. 이들은 1994년 여름 마닐라의 한 아파트에서 폭탄과 시한장치 제조에 필요한 화학물질을 확보해나갔다. 그들은 홍콩과 서울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여객기를 목표물로 물색했다. 이들의 계획이 실행됐다면 아마 한국인 승객 다수가 희생자가 됐을 것이다.

9·11 테러보다 거창했던 당초 계획

유세프는 1994년 12월10일 마닐라발 도쿄행 마닐라항공 PAL 434기를 상대로 시험적인 비행기 폭파 테러를 감행했다. 그는 여객기 좌석 밑에 폭탄을 감추고 도중 기착지인 세부에서 내렸다. 폭탄은 일본 오키나와 상공 인근에서 폭발했으나, 여객기는 오키나와 공항에 긴급 착륙해 폭탄이 숨겨졌던 좌석의 승객만이 숨졌다. 마닐라의 아파트로 돌아온 유세프는 몇 주 안에 여객기를 상대로 대형 테러를 감행할 예정이었다. 1995년 1월 폭탄 제조 도중 화재가 발생해 유세프는 급히 몸만 빠져나와 도피하게 된다. PAL 434기 테러 사건을 수사 중이던 필리핀 경찰은 유세프의 아파트 현장에서 폭탄 제조 장치를 비롯해 컴퓨터에 남겨진 각종 자료를 확보했다. 이때는 이미 KSM도 카타르로 돌아간 뒤였고, 유세프 역시 파키스탄으로 무사히 탈출했다. 미국 당국이 200만달러의 현상금을 건 채 쫓기던 유세프는 결국 한 달 만인 1995년 2월7일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파키스탄 당국에 체포돼 미국으로 호송됐다.
본격적으로 쫓기는 몸이 된 KSM은 수단·예멘·말레이시아·브라질 등 전세계적인 지하디스트 네트워크를 떠돌다가 1996년 중반 아프간으로 가서 오사마 빈라덴을 만난다. 토라보라에서 빈라덴을 만난 KSM은 조종사를 이용해 비행기로 미국의 시설물을 공격하자는 테러 계획을 제안했다. KSM의 당초 계획은 실제 9·11 테러보다 더 거창했다. 항공기 10대를 납치해 미국의 동부와 서부 양쪽의 주요 시설물을 동시에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펜타곤·중앙정보국(CIA)·연방수사국(FBI) 청사, 핵발전소, 세계무역센터 등 동부와 서부의 최고층 빌딩 등이 공격 대상이었다. KSM 자신도 납치한 마지막 10번째 비행기를 직접 조종해 공항에 착륙한 뒤 남자 승객은 모두 죽인 다음 미국의 중동 정책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풀어줄 생각이었다.
이 만남에서 빈라덴은 별다른 언급 없이 듣기만 했다. 빈라덴은 당시 아프간 정착이 시급해 거창한 테러 공격을 기획할 여유가 없었다. 1998년 8월 알카에다의 동아프리카 미국대사관 동시테러 사건은 9·11 테러 공격으로 가는 분수령이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의 크루즈미사일 공격을 받은 빈라덴과 알카에다는 더 큰 테러 공격을 기획하게 된다. 1999년 3~4월 빈라덴은 KSM을 칸다하르로 호출해 그의 테러 계획을 지원하겠다고 통보했다. ‘여객기 작전’으로 불린 이 테러 음모는 그해 봄 칸다하르 인근의 알카에다 시설물인 알마타르에서 빈라덴과 그의 군사사령관 아테프, 그리고 KSM만이 몇 차례 만나 공격 대상물을 선정하는 등 구체적 기획에 들어갔다.
KSM이 직접 비행기를 조종해 성명을 발표하는 계획은 소영웅주의라는 판단에 따라 빈라덴에 의해 먼저 철회됐다. 그들이 선정한 목표물로는 백악관, 의사당, 펜타곤, 세계무역센터가 우선 들어갔다. KSM의 당초 목표물이던 로스앤젤레스의 라이브러리타워(현재의 유에스뱅크타워) 등 서부 연안의 최고층 빌딩 및 시카고의 시어스타워에 대한 공격도 공작이 너무 복잡해진다는 이유로 빈라덴에 의해 보류됐다.
빈라덴은 알카에다 정예대원인 칼리드 알미드하르, 나와프 알하즈미, 칼라드(테위피크 빈아타시), 아부 바라 알예메니 4명을 선발했다. KSM은 이들에 대한 사전 교육을 맡았다. 4명은 미국에 대한 증오와 이슬람 대의를 위한 순교 의식에서는 모자람이 없었으나, 이는 거대한 작전의 실행 능력과는 별개였다. 이들은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서방 생활에 문외한이었다. 이 상태에서 미국에 정착해 비행학교를 이수하고 목표물을 섭외한다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었다. 무엇보다 일부 대원의 미국 입국이 불가능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인 미드하르와 하즈미는 미국 비자를 받았으나, 예멘 출신인 칼라드와 예메니는 불법 취업을 이유로 비자가 번번이 거부됐다.

CIA는 알카에다의 미국 잠입을 알고 있었다

공작원들의 미국 입국부터 막히자, 빈라덴은 이들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로 보내 작전의 변경을 고려했다. 미국 여객기를 공중에서 단순히 폭발시키는 쪽으로 작전을 축소할 것을 검토하라고 했다. 이때 알카에다 지도부 앞에 등장한 이들이 함부르크그룹이었다. 알카에다 군사령관 아테프는 즉각 이들의 잠재력을 파악했다. 풍부한 서방 생활 경험에다 능통한 영어 실력, 기술적 역량을 갖춘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비행 훈련과 순교 의지뿐이었다. 무서움 없이 열정에 불타는 풋내기 지하디스트 지망자였기 때문에 이들은 오히려 알카에다의 이 거대한 작전을 백지 상태에서 더 잘 수용할 수 있다고 봤다.
변호사 아버지를 둔 이집트 중산층 출신의 모하메드 아타(1967년생), 예멘국제은행 은행원 출신인 람지 비날시브(1972년생), 아랍에미리트 군사사관학교 장학생인 마르완 알세히(1978년생), 레바논의 부유한 집안 아들로 치대를 다니던 지아드 자라(1975년생), 이들 4명은 독일 유학 과정에서 함부르크-하르부르크 기술대학교를 중심으로 만나 현지 모스크에서 이슬람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결국 같은 아파트를 쓰며 동지 의식을 키우다 아프간의 무자헤딘행을 결행했다. 이들이 지하디스트로 변화하는 과정은 유망한 미래가 약속된 지식인들이 극렬한 반체제 인사로 변신하는 동서고금의 사례와 다르지 않다. 현대 중동분쟁의 기원인 팔레스타인 문제가 이들에게도 분노의 출발점이었고, 그 종착점은 지하디스트로의 길이었다.
함부르크그룹의 출현으로 비행기 작전은 이제 두 갈래로 진행된다. 함부르크그룹은 독일로 돌아가 미국의 비행학교 등록을 진행했다. 이 중 비날시브는 비자가 거부돼 함부르크에 남아 배후 지원 역을 맡았다. 또 한 그룹은 빈라덴이 애초 선정했던 미드하르 등 4명으로, 이 중 비자가 있는 미드하르와 하즈미가 2000년 1월15일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다. CIA는 미드하르와 하즈미가 알카에다 정예요원이며 이들이 미국에 입국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이들의 전화가 국가안보국(NSA)에 감청되면서 파악됐다. CIA는 이들의 존재와 입국 사실을 FBI나 국무부에 알리지 않는 등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CIA가 이들의 입국 목적을 알지는 못했으나, 알카에다의 테러 위협이 고조되던 당시에 그들을 방관한 것은 여전히 의문이다. CIA가 이들을 감시하면서 추가적인 정보를 얻고, 더 나아가 이들을 포섭하려는 의도였다는 분석이 있다. 국내에서는 공작이 금지된 CIA로서는 이들의 신원을 FBI 등에 알리면, 이들을 상대로 한 공작이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이들이 9·11 테러를 실행한 데서 보듯 CIA가 이들을 감시·추적한 정황은 없다. CIA의 업무 실패임은 분명하고, 미국은 9·11 테러를 저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함부르크그룹 3명은 2000년 5~6월 미국에 입국해 플로리다의 비행학교에 등록했다. 이미 비행 면허를 가진 또 한 명의 대원인 하니 한주르가 선발돼, 그해 12월 미국으로 와서 캘리포니아에 합류했다. 그리고 납치한 비행기를 장악할 완력조인 13명의 추가 대원들이 2001년 봄 미국에 입국했다. 공작대 구성 완료에 이어 디데이를 통보받은 비날시브는 9월5일 파키스탄으로 가서 메신저를 통해 빈라덴에게 통보했다.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거래

9·11 테러 이틀 전인 9월9일 아프간에서 탈레반에 대한 마지막 저항세력인 북부 판지시르 계곡의 북부동맹 본부에는 ‘텔레비전 기자’ 2명이 찾아왔다. 몇 주 동안 북부동맹의 지도자 아마드 샤 마수드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며 인근에 머물던 그들은 이날 허가를 받고 마수드와 마주 앉았다. 카메라가 켜지고, “각하, 아프간에서 이슬람의 상황은 어떠합니까?”라는 기자의 질문과 동시에 카메라에 장착된 폭탄이 터졌다. 치명적 부상을 당한 마수드는 곧 사망했다. 소련군을 공포에 떨게 했던 대표적인 아프간의 무자헤딘이자, 20세기 탁월한 게릴라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마수드의 암살은 9·11 결행을 앞둔 알카에다가 탈레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마수드는 탈레반의 정통성을 부인하며 그들의 아프간 장악을 저지하던 장애물이었다. 미국의 보복이라는 9·11 테러의 후폭풍에서도 탈레반의 보호막을 유지하려고 알카에다는 마수드 암살이란 뇌물을 준 것이다. 마수드의 암살로 9·11 테러는 그 막을 올리는 전주곡을 울렸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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