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13일 아프가니스탄의 파키스탄 접경 산악지대인 토라보라에서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과 그 대원들을 추적 중인 미군 특수부대의 무선감청기에 빈라덴의 음성이 잡혔다. “이 전투에 참가시킨 것을 사과한다.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면 항복해도 좋다.” 앞서 그날 오전 감청기에는 “때는 지금이다. 불신자들에 맞서 여성들과 아이들도 무장시켜라”라는 빈라덴의 음성이 잡혔다. 오전에 전투를 독려하던 빈라덴이 갑자기 오후 들어 항복을 허락하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현장에 있던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한 요원은 빈라덴이 “뭔가에 대해 대원들에게 사과한다”고 의아해했다. 다음날에도 감청기에는 빈라덴의 음성이 잡혔다. 하지만 이 음성은 미리 녹음된 연설 같았다. 빈라덴은 이미 토라보라의 전투 현장에서 벗어났다.
증오심에 불타는 카르자이, 칸다하르 입성
빈라덴이 다시 미국의 추적을 따돌리고 긴 잠적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빈라덴의 탈출은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는 미국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 순간 미국의 아프간 전쟁도, 테러와의 전쟁 전체의 의미가 증발하면서 방향을 잃고 실패의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아프간 전쟁 개전은 유례없는 성공이었다. 미국은 불과 300명의 지상군 병력과 110명의 CIA 군사요원으로 1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패주시키면서 정권을 타도했다.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의 첫 병력인 게리 슈로엔 등 7명의 CIA 요원으로 구성된 조브레이커 팀이 9월26일 아프간에 발을 디딘 지 2주 뒤인 10월7일부터 미군의 공습이 시작됐다. 10월16일 미군의 첫 지상병력인 미 육군 제5특수부대단의 알파작전분견대(ODA) 595가 북부 도시 마자르이샤리프 인근에 도착했다. 이 병역은 북부동맹의 사령관 압둘 라시드 도스툼이 이끄는 병력과 하루 뒤에 결합했다. 24시간이 안 돼 미군의 공습이 시작됐다. 그곳의 지리와 탈레반의 사정에 정통한 북부동맹 병력의 인도에 따라 미군 특수부대 병력은 정확한 공습 목표를 전달했다.
소규모 미 병력은 공군력의 공습을 인도해, 탈레반 병력과 시설을 먼저 무력화했다. 그리고 북부동맹 등 현지 반탈레반 병력을 앞세워 무력화된 탈레반 병력을 제압하고 거점 도시들을 장악해나갔다. 몇백 명의 미 지상군 병력으로도 탈레반 병력을 패주시키고 정권을 타도하기에 충분했다. 11월9일 마자르이샤리프의 함락과 함께 탈레반의 패주가 시작됐다. 북부의 거점도시 마자르이샤리프의 함락은 곧바로 수도 카불을 위협했다. 사흘 뒤 탈레반은 카불에서 도주하기 시작했다. 카불은 전투도 없이 연합군에 11월13일 점령됐다.
미군의 공습이 시작되고 하루 뒤인 10월8일 모터사이클을 탄 4명이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주로 잠입했다. 두꺼운 터번으로 위장한 사람들 중 한명은 하미드 카르자이. 아마드 샤 마수드의 아프간 임시정부에서 외무차관을 지낸 카르자이는 탈레반 정권과 숙명적인 악연을 가진 인물이다. 아프간 최대 민족인 파슈툰족의 유력 부족인 포팔자이의 부족장 격인 그의 아버지 압둘 아하드 카르자이는 탈레반의 부상에 결정적 도움을 줬으나, 나중에 탈레반에 의해 암살됐다. 능통한 영어와 서방과의 커넥션, 아프간 최대 유력 가문 출신이라는 배경, 그리고 탈레반에 대한 증오는 미국으로 하여금 그를 탈레반 이후 아프간을 이끌 지도자 후보의 하나로 낙점시키기에 충분했다.
칸다하르 지역에 잠입한 카르자이는 곧 지지자들을 모아서 반탈레반 병력을 조직했다. 칸다하르 함락 전투가 준비되던 11월28일, 독일 본에서는 탈레반 이후 아프간의 임시정부 구성을 논의하는 국제회의가 열렸다. 카르자이는 위성 화상회의로 회의 참가자들에게 연설했다. 11월30일 카르자이는 대규모 병력을 조직해 칸다하르로 향했다. 카르자이는 12월6일 칸다하르 인근에서 진지를 꾸린 뒤 탈레반의 항복 조건을 논의하던 중 본으로부터 자신이 아프간 임시정부의 의장으로 선출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몇 분 뒤 또 다른 전화를 받았다. 탈레반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에게서 항복하겠다는 연락이었다. 다음날인 12월7일 탈레반의 공식 항복을 받아들인 뒤 카르자이는 칸다하르로 입성했다. 미국의 공습과 함께 개전된 지 2개월 만이었다.
이는 아프간 전쟁의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미군의 개전 초기 승리는 전술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게릴라 부대에 불과한 탈레반 병력이 정규전으로 미군에 맞선다는 것 자체가 미군의 승리를 이미 내포하고 있었다. 탈레반이 재래식 정규전 전투 태세와 대형으로 미군에 맞선다는 것은 자신들을 미군 정밀 화력의 대규모 먹잇감으로 내놓는 것밖에 안 됐다. 이미 한 나라의 정규 정부군 입장이 된 탈레반 병력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탈레반이 모든 것을 잃은 뒤 다시 게릴라 부대로 돌아갔을 때 사정은 달라졌다. 이들은 소련의 아프간 전쟁 때 소련군을 공포에 떨게 하던 무자헤딘 게릴라로 다시 미군 앞에 나타난다.
빈라덴 잡는 산악특전대 투입 거부
탈레반의 항복으로 미군이 승리에 들떠 있던 12월 초, 파키스탄 접경 지역의 험준한 산악지대 토라보라에서는 사실상 이 전쟁의 운명을 가르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카불이 함락되자, 오사마 빈라덴과 알카에다 대원들은 아프간 동부 접경 도시 잘랄라바드로 신속히 옮겼다. 파키스탄 접경에서 약 80km 떨어진 잘랄라바드는 빈라덴이 1996년 수단에서 추방돼 아프간으로 왔을 때 정착한 도시이자, 그가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간 침공 때 인근 자지 전투를 통해 신화를 만든 곳이다. 그는 1987년 잘랄라바드에서 토라보라의 산악지대를 잇는 험준한 도로 공사를 했다. 아랍의 무자헤딘들이 파키스탄에서 토라보라 산악지대를 통해 잘랄라바드로 가는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빈라덴은 이 공사를 통해 토라보라와 그 인근 산악지대의 지형을 손바닥 보듯 알 수 있게 됐다. 최고 해발 4761m의 화이트산맥 자락에 둘러싸인 토라보라와 알카에다의 요새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박힌 천혜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벙커였다.
11월 말께 미국은 미군의 최정예 델타포스가 주축이 된 80명 미만의 연합군 특공대를 조직해 토라보라 전선에 투입했다. 투입된 특공대에 포함된 공군의 신호전문가들은 곧 레이저 정밀 유도 스마트 폭탄을 인도했다.
알카에다 대원들도 광신적인 용맹을 보이며 저항했다. 600여 명의 아프간 병력을 이끌고 토라보라 전투 최전선에 참전했던 아프간 현지 군벌 무하마드 무사는 “그들은 우리에 대항해 용감히 싸웠다. 체포되면 수류탄으로 자살했다. 그렇게 자살하는 알카에다 대원을 3명이나 봤다”고 회고했다. 그들이 접전을 벌인 곳은 토라보라의 서쪽 전선. 하지만 토라보라 동쪽의 파키스탄 접경 쪽은 전선이 형성되지 않고 텅 빈 상태였다. 빈라덴과 알카에다는 언제라도 접경한 파키스탄의 연방부족자치지역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CIA 본부 랭글리에서 이 작전을 지휘하던 행크 크럼프턴은 조지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에게 빈라덴이 토라보라를 빠져나갈 수 있다고 보고했다.
CIA는 12월3일 빈라덴과 알카에다 대원들의 도주를 막으려면, 미 육군에서 가장 강력한 훈련을 통과한 800여 명의 산악특전대를 투입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미 중부사령부는 이 요청을 거절했다. 토미 프랭크스 사령관은 소규모의 미 지상군 병력으로도 탈레반 정권 붕괴를 이미 훌륭히 수행했고, 토라보라에 미 지상군 병력을 추가 투입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를 들었다. 프랭크스 사령관의 거절을 접한 크럼프턴은 토라보라에서 빈라덴의 도주를 확신했다.
12월로 접어들면서 전투 조건은 더욱 가혹해졌다. 해발 4300m의 토라보라 산악지대는 1년 중 가장 가혹한 환경에 노출됐다. 눈발이 날리고 기온은 영하로 급전직하했다. 12월4~7일 사흘간 미군 폭격기는 70만파운드의 폭약을 투하했다. 이틀 뒤인 9일 미군은 ‘데이지 커터’라는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BLU-82 폭탄을 투하했다. 그날 밤 엄청난 굉음을 들은 토라보라의 알카에다 대원 아부 자아파르 알쿠와이티는 다음날 아침 “셰이크 오사마의 참호가 파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빈라덴은 죽지 않았다. 알카에다 웹사이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신격화한다. “빈라덴은 대원들이 만든 참호의 하나 속으로 전갈 한 마리가 기어드는 꿈을 꿨다. 꿈을 깬 빈라덴은 즉시 참호를 떠나서 200m 밖으로 달아났다.”
국경 넘을 때 “때는 지금이다…” 방송
토라보라 전투의 변곡점은 12월12일에 찾아왔다. 아프간 현지 병력을 이끄는 하지 자만 감샤리크가 알카에다와 항복 협상을 시작했다. 오후 4시가 되자 알카에다 쪽에서 무선으로 항복할 준비가 됐다고 하지 자만에게 연락했다. 알카에다는 “우리끼리 회합할 필요가 있다. 내일 아침 8시까지 기다려줄 수 있는가”라고 제안했다. 자만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날 밤 많은 알카에다 대원들이 탈출했다. 그 다음날 아침 8시가 됐으나, 알카에다로부터 어떠한 항복 의사도 전해지지 않았다.
다음날인 12월13일 이미 전술했던 “때는 지금이다…”라며 항전을 다시 촉구하는 빈라덴의 육성이 감청됐다. 빈라덴은 이날 아침 토라보라를 탈출해 파키스탄 국경을 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적에 대한 교란 작전으로 이 항전 촉구 육성을 일부러 흘린 것이다. 12월17일 토라보라 전투는 종결됐다. 약 220명의 알카에다 전사자와 52명의 대원들이 포로로 체포됐다. 이 중에 빈라덴을 위시한 알카에다 간부는 없었다.
미국은 왜 눈앞에서 빈라덴의 탈주를 사실상 수수방관한 것일까? 빈라덴 탈주의 가장 큰 요인인 미 지상군 추가 배치를 거부한 토미 프랭크스 중부사령관은 나중에 인터뷰를 요청한 언론인 피터 버겐에게 전자우편을 보내 자신의 결정을 해명했다. “추가 병력을 배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아프간 전역에서 누리고 있던 우리 병력의 모멘텀을 상실하게 하는 위험을 감수하게 할 ‘전술 중지’를 만들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빈라덴이 토라보라에 있는지에 대한 불확실성도 있었다. 그가 카슈미르에 있다는 상반되는 정보도 있었다.”
미군은 과연 토라보라 전투에 시의적절하게 추가 병력을 파견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을까? 당시 아프간 전역 안팎에는 이미 약 2천 명의 미군 지상군 병력이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의 K2로 알려진 공군기지에는 제10산악사단의 1천여 명 병력이 배치된 상태였다. 이 병력은 고산지대 전투 특수병력이다. 이 병력 중 수백 명이 이미 카불에서 1시간 거리인 바그람 공군기지에 배치된 상태였다. 높은 기동성을 가진 제15, 제26 해병원정부대의 1200여 명 병력이 11월25일부터 칸다하르 인근 사막지대의 리노 전진작전기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해병부대의 사령관 제임스 마티스 준장은 자신의 병력을 토라보라로 파견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아프간 전쟁에 대한 미군의 공식 전사 중 하나인 (2008년 6판)는 나중에 아프간 전역에서 산악 지형과 헬기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추가 미군을 투입해 파키스탄으로 통하는 길을 봉쇄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었다고 기록했다.
미국과 미군은 아프간 전쟁 초기 승리에 도취해 있었다. 하지만 이는 게릴라 부대에 불과했던 탈레반 병력의 정규전 취약성, 그리고 미군의 압도적이고 정밀한 공중화력에 기댄 것이다. 미국 지도부는 이 승리를 자신들의 새로운 군사 독트린의 개가라고 착각했다. 당시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주도하려던, 첨단 정밀무기 및 화력과 결합한 경량화된 미 지상군의 기동화 개혁의 단초적 시험을 부시 행정부는 이 아프간전에서 성공했다고 봤다.
하지만 그 성공은 탈레반 정권 붕괴까지만이었다. 탈레반 병력과는 차원이 다른 정예 알카에다 대원들이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전통적인 게릴라전으로 맞서자, 미군의 경량화된 소수의 특수병력과 공중화력은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미군은 그때까지 성공을 훼손시키고 싶지 않다는 자기기만적 욕구가 있었고 또 다른 곳에 정신에 팔려 있었다.
토라보라 절정에서 이라크 전쟁 계획안
토라보라 전투가 시작되기 약 열흘 전인 11월21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끝난 뒤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손을 붙잡았다. “나 좀 봅시다. …이라크 전쟁 계획이 어떻게 돼가요? …그걸 시작합시다. 사담 후세인을 제거해 미국을 보호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토미 프랭크스에게 살펴보라고 하세요.” 이라크 전쟁에 대한 명령이었다.
이 명령에 따라 아프간 전쟁을 책임지는 중부군사령부의 프랭크스 사령관 등 모든 참모들은 토라보라 전투가 절정에 오르던 때 하루 16시간 동안 이라크 전쟁 계획안을 짜고 있었다. 워싱턴과 미군 지도부는 토라보라 전투 당시 여기에 별 관심도 없었고, 또 이라크 전쟁에 대비해 미군 병력이 아프간에서 발목이 잡히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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