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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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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날은 간다

중동 민주화 바람 타고 시작된 시리아 내전, 알카에다 등 지하디스트의 성전 무대가 되고…
이집트에서는 군부 쿠데타로 민선정부가 무너지고
등록 2014-09-04 16:55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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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18일 아침 7시. 이라크와 접경한 쿠웨이트의 한 국경 검문소를 약 500명의 미군 병력과 군용 차량 110대가 통과했다. 이라크를 떠나는 마지막 미군 병력이었다. 이라크뿐만 아니라 중동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었던 이라크 침공 미군 병력의 철수는 침공 때와는 달리 조용히 진행됐다. 쿠웨이트 국경에서 약 350km 떨어진 아데르분견대작전기지에서 새벽 2시30분에 출발한 마지막 철군 병력은 아무도 없는 사막지대를 질주해왔다. 국경을 넘는 공식 행사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이 철군 작전은 비밀에 부쳐졌다. 이 조용한 철군은 이라크에 남아 있는 위험과 불확실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수니-시아파 종파 분쟁 재점화

다음날인 12월19일 이라크 정부는 정부 내에서 수니파 세력을 대변하는 부통령 타리끄 알하시미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그가 정부 관료들의 암살 기도에 관여했다는 혐의였다. 수니파 정치세력들은 시아파가 다수인 누리 알말리키 총리 정부에 대한 보이콧을 선언했다. 미군의 침공 이후 이라크 내전의 동력이 됐던 수니-시아파 종파 분쟁은 미군 철수 하루 만에 정치권에서 본격적으로 재점화되는 불길한 조짐을 보였다.

미군 철수 나흘 뒤인 12월22일 바그다드 전역에서 차량폭탄 및 수제폭탄 테러의 물결이 일었다. 적어도 63명이 숨지고 180명이 다쳤다. 미군의 이라크 안정화 작전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2008년 이후 최악의 테러였다. 이틀 뒤 이라크의 알카에다 세력인 이라크이슬람국가(ISI)는 바그다드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며, 그 공격 대상 중에는 “다지알군이라는 역겨운 자들의 집회와 군사행진이 포함된다”고 밝혔다. 다지알군이란 시아파의 최강 군벌 지도자인 무끄타다 알사드르의 민병대 ‘마디군’을 지칭했다.

미군 철수 두 달 만에 약 1천 명이 이라크 전역에서 테러와 전투로 사망했다. 다시 기세를 올린 수니파 반군이 배후였고, 그 중심에는 분명 알카에다 세력의 회복이 있었다. 미군 철수 전에 고사 위기에 몰렸던 이라크 내 알카에다 세력이 회복된 데는 다양한 원인과 배경이 있다.

미군 철수 다음날 수니파 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에서 보듯, 말리키 정부의 시아파 위주의 종파적 국정 운영은 소외되는 수니파를 반란으로 결집시키게 된다. 말리키는 군 내에서 수니파 지휘관이나 독립적인 지휘관들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심복을 앉혔다. 또 미군 철수 전에 안정화에 기여했던 수니파의 사와 민병대를 정식 군으로 편입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해체해버린다.

말리키 정부의 계속된 종파적 국정 운영은 결국 알카에다 등 지하디스트 세력의 부활에 기름을 부었다. 미군이 이라크에서 철수할 때쯤 알카에다 등 지하디스트 세력은 이미 다른 곳에서 자신들의 엘도라도를 발견하고 세력 회복의 불길을 내고 있었다. 그건 이라크 접경 시리아에서 본격적으로 격화되는 내전이었다.

2011년 3월15일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에서 대규모로 일어난 반아사드 정권 민주화 시위는 그해 여름을 지나며 무장투쟁으로 번져갔다. 시리아 정부군을 이탈한 장교들을 중심으로 7월29일 자유시리아군(FSA)이 조직되면서 시리아 사태는 내전으로 빨려들어갔다. 11월 초부터는 레바논에 가까운 서부 도시 홈스를 둘러싸고 정부군과 반군의 공방전이 격화되면서 시리아 내전은 만개하게 된다. 홈스를 봉쇄한 정부군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FSA 등 반군은 성공적으로 이를 막아냈다. 홈스 공방전은 2014년 5월까지 진행된다.

민간 펀딩 통해 반군에 자금과 무기 제공

시리아 내전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이어 지하디스트 세력에 또 하나의 성전 무대가 됐다. 이라크 내 알카에다 세력뿐만 아니라 이슬람권, 더 나아가 전세계 지하디스트 세력이 이곳에 다시 몰려들었다. 무장투쟁 공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자금과 무기가 그들에게 제공됐다. 시리아 내전이 강대국과 중동 지역 국가 및 세력의 대리전쟁으로 격화됐기 때문이다.

1970년 이후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집권해온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쪽으로는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이란과 헤즈볼라 등 중동 시아파 세력이 자리잡았다. 반면 반아사드 진영 쪽으로는 미국 등 서방,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터키 등 중동 수니파 세력이 지원에 나섰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 지역의 보수 왕정들은 차제에 아사드 정권 붕괴를 통해 중동에서 이란이 후원하는 시아파 세력의 확산을 제어하려고 했다. 특히 이라크에 시아파 정권이 들어선 이후 점증하는 이란의 영향력 확대에 사우디 등은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시리아 내전에서 아사드 정권이 살아남을 경우, 이란-시리아-헤즈볼라로 이어지는 중동의 시아파 연대는 이라크의 시아파 정권으로 이어지며 더욱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미국 등 서방이 눈엣가시이기도 했지만,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은 중동 역내에서 세력 균형추 역할을 해왔다. 시리아는 이라크와 함께 지리적으로 중동의 핵심 지역에 있다. 레반트로 불리는 이 지역은 이라크, 터키, 요르단, 레바논, 이스라엘과 접경하고 있다.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은 냉전 시절 친소련 노선을 걸었다. 하지만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의 쿠웨이트 점령으로 촉발된 걸프전쟁에서는 후세인 정권에 반대하는 노선을 취했다. 아사드 정권은 사담 후세인 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줬다. 또한 중동 역내에서 세속주의의 강력한 보루이자 이슬람주의 세력에 대한 방파제였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비공식적으로 협조하며 알카에다 세력 등을 색출하는 데 도움을 줬다. 역내에서도 세력 균형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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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내전은 아사드 정권이 담당하던 역내 세력 균형추 역할을 여지없이 붕괴시켜버렸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반아사드 입장을 표명했지만, 반아사드 세력을 적극 지원할 수 없었다. 내전에 개입할 수 없었다. 이라크 전쟁에서 막 발을 뺀 상태에서 다시 또 다른 전쟁에 개입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더구나 미국은 이라크에서 사담 후세인 정권의 붕괴가 초래한 가공할 만한 힘의 공백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아사드 이후의 대안이 부재한 상황에서 아사드 정권 축출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미국은 내전 종식을 위한 국제평화회담 주재에 역점을 두다 2013년 9월이 되어서야 의회로부터 군사 개입 허가를 받는 시늉을 했을 뿐이다. 아직까지 반군에 대한 공개적인 무기 지원도 하지 않고 있다.

미국이 시리아 내전 개입을 완강히 거부하는 상황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 지역의 보수 왕정들이 비공식적으로 지원에 나섰다. 민간 펀딩 형식을 통해 반군에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다. 접경한 터키는 지하디스트 세력이 자국 국경을 통해 시리아로 가는 것을 눈감아줬다.

ISIS, 이라크 내 강력한 반군세력으로

2010년 5월 이라크 내 알카에다 조직인 ISI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는 이 조직의 지도부를 개편하는 한편 활동 무대를 이라크와 시리아 접경지대로 옮겼다. 시리아 동부와 이라크 안바르주 및 니네베주의 수니파 부족들은 다른 국가 소속임에도 오래전부터 그 부족적 연대 뿌리가 깊었다.

시리아 사태가 무장투쟁으로 격화되며 내전으로 빨려들어가던 2011년 8월, 시리아와 이라크의 텅 빈 국경선 지대에 8명의 남성이 몸을 웅크린 채 잠복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옷 속에 권총과 수류탄, 그리고 폭탄으로 장착된 벨트를 두르고 있었다. 어둠이 깔리자 이들은 국경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시리아 북부의 하사카주로 잠입했다. 이들은 ISI의 지도자 바그다디가 시리아로 파견하는 대원들이었다. 이때쯤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도 수백 명의 지하디스트를 전격적으로 감옥에서 석방하는 수상한 조처를 취했다. 중동 국가 중에서 가장 강력한 반이슬람주의 정권이던 아사드가 이런 조처를 취한 것은 의외였다. 반군세력 간에 내분을 조장하기 위해 지하디스트 세력을 은근히 부추기기 시작했다. 아사드 정권의 완강한 반이슬람주의 정책으로 이슬람주의 세력이 전무하던 시리아에서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이 발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2012년 1월23일 시리아에서는 알누스라전선이라는 알카에다 연계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의 창설이 발표됐다. 알누스라전선은 시리아 반군 진영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해갔다. 시리아 내전을 통해 새롭게 활동 무대를 찾은 ISI는 지도자 바그다디를 중심으로 지도부도 물갈이했다. 바그다디는 전임자인 이라크 내 알카에다 세력의 원조였던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와는 달리, ISI를 이라크 수니파 중심으로 개편했다. 요르단 출신인 자르카위가 해외에 있는 알카에다 본부에서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지도부를 짠 것과는 달랐다. 바그다디는 사담 후세인 정권에서 일하던 바트당 군사간부와 정보요원을 지도부로 영입했다. 대표적인 이가 하지 바크르였다. 후세인 정권 아래 군장교를 지낸 바크르를 ISI의 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후세인 세력의 중용은 이라크 내에서 소외되던 수니파의 역량을 모두 통일하려는 바그다디의 전략이었다. 또 여전히 무장력을 갖춘 후세인 세력을 자신에게 끌어들여 역량을 배가하려는 조처이기도 했다.

바그다디는 2013년 4월8일 ISI를 ‘이라크시리아이슬람국가’(ISIS)로 개편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자신들의 조직이 시리아로까지 확대됐다는 의미였고, 실제 그는 시리아의 알누스라전선과의 통합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알누스라전선 쪽은 이 통합을 즉각 부인했다. 알카에다 본부의 수장 아이만 알자와히리도 ISIS를 해체하고 바그다디의 조직은 이라크 내에서만 활동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하지만 바그다디는 자와히리의 지침을 일축하고 자신의 조직 통합을 밀고 나갔다. 알누스라전선 대원을 흡수하기 시작해, 결국 80%까지 거둬들였다.

바그다디가 국제 지하디스트 세력의 본산인 알카에다 본부와 주도권 다툼까지 할 정도로 역량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7월22일 아부그라이브 감옥에 차량폭탄 테러에 이어 게릴라들의 무장공격이 가해졌다. 이 감옥에 수감 중이던 알카에다 대원 약 500명이 탈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들은 대부분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탈옥한 이들은 고스란히 ISIS로 흡수됐다. 이라크는 완전히 내전 상태로 되돌아갔고, ISIS는 이라크 내에서 가장 강력한 반군세력으로 자리잡았다.

다시 돌아온 지하디스트의 봄

아부그라이브 탈옥 사태가 있기 약 3주 전, 이집트에서는 무슬림형제단 출신의 이슬람주의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가 이집트 군부 쿠데타로 결국 실각했다. ‘아랍의 봄’의 가장 큰 성과였던 이집트의 민선 정부가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온건 이슬람주의를 대표하던 세력의 안착도 실패로 돌아갔다.

아랍의 봄은 이제 완전히 ‘아랍의 겨울’로 치닫고 있었다. 그 자리에 지하디스트가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랍의 봄은 이제 ‘지하디스트의 봄’으로 바뀌고 있었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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