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두 개의 약속이 있다. 하나는 신의 약속이고, 다른 하나는 부시의 약속이다. 신의 약속은 우리의 땅은 광대하다는 것이다. 신의 길로 여정을 시작하면, 이 땅 어디에서도 머물 수 있고 보호받을 것이다. …부시의 약속은 이 땅 위에 숨을 곳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개의 약속 중 무엇이 실현될지 볼 것이다.”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예고된 2001년 9월26일 와의 인터뷰에서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 행정부가 주도한 아프간 침공에서 자신들은 살아남고 결국 미국을 격퇴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10월7일 미국의 아프간 침공 작전인 ‘항구적 자유 작전’이 시작되고 한 달 만에 탈레반 정권이 붕괴되자 그와 탈레반 지도부는 파키스탄으로 잠적했다. 오마르는 일제 혼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도주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당시 파키스탄 대통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에게 “물라 오마르가 바람에 옷과 수염을 날리며 혼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도주하는 모습은 혼다에 최고의 광고가 됐을 것”이라고 농담했다.
신의 약속, 부시의 약속
탈레반뿐만 아니라 오사마 빈라덴과 알카에다 지도부도 파키스탄으로 잠적했다. 미국이 12월 초 토라보라 전투에서 전력을 기울이지 않은 탓에 빈라덴과 알카에다 지도부는 미군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1천 명에 가까운 알카에다 대원이 토라보라 전투에서 벗어나 파키스탄의 아프간 접경지대로 도주한 것으로 미국 정보 당국은 추계했다. 아프간 동·남부와 접경한 파키스탄의 연방부족자치지역(FATA), 북서변경주(NWFP), 발루치스탄주 북부 지역은 미군의 침공을 피해 달아난 탈레반과 알카에다뿐만 아니라 다른 무자헤딘 세력들의 피란처이자 은거지가 됐다. 이들은 이 지역에서 조직을 정비하고 그곳 부족민을 포섭해 세력을 확장한 뒤 자신들의 발진기지로 삼았다.
파키스탄의 아프간 접경지대는 탈레반과 알카에다 등 이슬람주의 세력에게는 천혜의 안식처이자 기지였다. 그 이유는 첫째, 미군 등 연합군의 군사력이 미치지 못했다. 파키스탄의 주권이 적용되는 파키스탄의 영토여서, 파키스탄의 협조가 있어야 군사작전이 가능했다.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의 동맹국인 파키스탄 역시 이 지역에는 공권력과 군사력이 미치지 못했다. 연방부족자치지역이라는 행정구역명이 말해주듯, 이 지역들은 역사적으로 강력한 부족 권력이 작용하는 곳으로 파키스탄의 중앙권력 역시 이를 인정했다. 연방부족자치지역과 북서변경주의 다수 민족인 파슈툰족과 발루치스탄의 발루치스탄족은 파키스탄의 다수 민족인 펀자브족의 중앙 통치에 대해 역사적으로 강력히 저항했다. 이들은 아프간에 살고 있는 파슈툰족과 더 동질감을 느끼고 같은 국가 건설을 열망하기도 했다. 1947년 파키스탄이 인도와 분리독립할 때 무함마드 알리 진나 당시 총리는 이 지역의 주민들을 달래기 위해 연방부족자치지역의 와지리스탄으로부터 파키스탄군 철수와 함께 “파키스탄은 당신들의 내부 자유에 지나치게 간섭할 의도가 없다”고 이들 지역의 사실상 자치를 허락했다.
둘째, 이슬람주의에 우호적인 보수적인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탈레반의 구성원인 파슈툰족이 사는 지역이기도 했다. 최대한의 자치를 용인받은 이들은 파키스탄의 세속통치와는 다르게 이슬람 신앙과 관습, 전통에 따라 부족 단위의 통치를 했다. 사실상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따른 통치를 한 것이다. 이들 지역의 부족과 주민들은 소련의 아프간 전쟁 시절부터 탈레반·알카에다 등과 깊은 유대와 네트워크를 맺었다. 미국과 파키스탄이 이 접경지역에서 무자헤딘 세력을 지원하고 훈련했다. 탈레반은 이 지역에서 파키스탄이 세운 이슬람학교인 마드라스 출신들이 조직한 것이다. 알카에다 등 외국 출신 이슬람주의 세력 역시 북서변경주의 페샤와르 등지를 본부로 하여 소련의 아프간 전쟁에 참가했다.
제어할 능력도 마음도 없는 파키스탄 접경지대셋째, 천혜의 험준한 산악 지형은 탈레반과 알카에다 등 아프간의 이슬람주의 게릴라 세력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아프간남부와 접경한 발루치스탄의 광막한 광야와 사막지대 역시 게릴라들의 무대였다. 아프간과도 접경한 이 지역은 이들에게 게릴라 공격의 발진기지가 됐다.
넷째, 파키스탄은 이 지역을 제어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특히 자신들이 키운 탈레반을 소탕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파키스탄은 자신들의 안보에 사활적 이해가 걸린 아프간에서 대리 세력을 유지하기 원했고, 이곳에 피신한 탈레반은 그들에게 소탕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 대상이었다. 파키스탄은 알카에다 등 외국 출신의 이슬람주의 세력 소탕에는 의지를 보이긴 했다. 하지만 알카에다는 탈레반과 이곳 주민들의 보호 속에 숨어들어갔다.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안식처가 된 파키스탄의 아프간 접경지대는 더 나아가 파키스탄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의 근거지가 되어, 파키스탄 탈레반 등이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기괴한 신정 전제 통치를 강요한 탈레반 정권이 붕괴되고 파키스탄으로 도주한 뒤 아프간은 나름대로 새로운 출발에 대한 희망에 부풀었다.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 내전과 탈레반 통치라는 22년간의 악몽 끝에 적어도 평화와 상식이 회복될 것이라고 아프간 주민들은 생각했다.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피란갔던 약 200만 명의 아프간 주민들이 탈레반 붕괴 직후인 2002년에 돌아왔다. 수백만 명의 어린이가 학교로 돌아갔고, 거기에는 소녀들도 포함됐다. 아프간 임시정부의 수반 하미드 카르자이는 노회한 정치력을 발휘해 이스마일 칸 등 군벌의 무장을 해제했다. 미군의 협조를 얻어 회유와 압박으로 헤라트주의 막강한 군벌 이스마일 칸을 수도 카불로 불러들여 에너지부 장관 자리를 주고 그의 군벌을 해체했다. 2005년 중반까지 군벌 병력 약 6만 명의 무장 해제가 진행됐다.
2004년 10월9일 선거에는 아프간 주민 1천만 명이 투표자 등록을 했다. 이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수였고, 그중 절반은 여성이었다. 탈레반의 근거지이자 가장 보수적인 지역인 칸다하르에서도 많은 여성 유권자가 투표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등 모두 800만 명이 투표를 했다. 카르자이는 이 선거에서 55%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돼 권력을 공고화했다. 카르자이 정권이 출범한 2005년에 미국 <abc>와 영국 <bbc>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아프간 주민 10명 중 8명이 미군의 주둔과 카르자이 정권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다. 무슬림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미국에 대한 지지였다. 탈레반에 대한 지지는 8%에 불과했다.
아프간 주민들은 분명 새로운 질서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아프간의 현실은 이 희망의 실현을 허락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했다. 미국의 개입에도 지독한 빈곤과 봉건적 유제를 타파할 지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프간 신정부는 무능과 부패로 이를 더욱 악화했다. 소수 상류층만이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자유와 풍요를 누렸을 뿐이다. 대다수 주민들은 시간이 가도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물질적 혜택과 생활의 변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러는 동안 탈레반은 남부와 동부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혹은 강압에 의해 점점 탈레반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발칸 분쟁 주민 지원액의 30분의 1
탈레반의 귀환은 미국이 이라크에서 범한 실수를 아프간에서도 동일하게 반복했기 때문이다. 적은 병력과 국가재건(Nation Building) 사업에 대한 등한시였다. 미국은 이라크에서 사담 후세인 정권 타도에만 신경 썼을 뿐 이후 치안 유지와 국가재건 사업을 위한 충분한 병력 유지와 자원 조달을 하지 않은 오류를 아프간에서도 반복했다. 아프간을 침공한 미국의 정책은 ‘탈레반 정권 타도, 그리고 고 홈(집으로 간다)’이었다. 토미 프랭크스 당시 중부군사령관은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에게 “우리는 소련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두 사람은 아프간에서 미군 주둔 병력을 최소로 유지하기로 합의했다고 회고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2002년 4월17일 2차 세계대전 뒤 유럽의 부흥 계획인 마셜플랜의 주인공 조지 마셜 전 국무장관의 모교인 버지니아군사학교 연설에서 “마셜은 2차 세계대전에서 우리의 군사적 승리에는 인류 개개인의 더 좋은 삶을 이루는 도덕적 승리가 뒤따라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프간에서 그런 좋은 삶을 이루는 도덕적 승리를 위한 계획은 없었다. 탈레반 타도 이후 2년 동안 아프간에 지원된 인구 1인당 원조는 1990년대 발칸 분쟁 이후 보스니아 주민들에게 지원된 액수의 30분의 1에 불과했다. 2002~2009년 아프간에 지원된 연평균 원조액은 17억5천만달러다. 주민 1인당 60달러가 지원된 셈이다. 이 돈마저 아프간 주민에게 돌아간 것은 아니다. 영국 원조단체 옥스팸의 2008년 보고서에 따르면, 아프간 원조의 40%는 원조 공여국의 아프간 주재 사무실 유지 비용으로 쓰였다. 국제 원조의 약 20%만이 아프간 주민을 위해 사용된 것으로 집계됐다.
미국 랜드연구소 연구에 따르면, 미국이 지난 60년 동안 개입한 국가재건 사업 중에서 가장 적은 지원을 받았다. 특히 탈레반 타도 직후 미군의 아프간 주둔 병력은 약 6천 명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적은 평화 유지 병력이었다. 미국 텍사스주 크기의 국토인 아프간에 텍사스의 한 도시인 휴스턴의 경찰력이 배치된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더욱이 아프간은 이라크 전쟁에 올인하는 미국의 ‘이라크 퍼스트’ 정책으로 인해 모든 정책 순위와 자원 배분에서 이라크에 밀려버렸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 준비에 신경 쓰느라 2001년 말 토라보라 전투에서 오사마 빈라덴 등 알카에다 지도부를 놓쳐버린 뒤 이런 사태 전개는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9·11 테러를 일으킨 빈라덴과 알카에다 소탕도 뒷전으로 미룬 미국에 아프간의 상황이 중요할 이유는 없었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아프간 경제에 이렇다 할 원조조차 집행되지 않자 아프간 주민, 특히 농민들의 주 수입원이던 양귀비 재배는 더욱 극성을 부렸고, 이는 탈레반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 미국과 아프간 정부는 대안 없이 양귀비 재배를 박멸하려 했고, 이에 반발하는 주민들은 양귀비 재배를 자신들의 수입원으로 삼는 탈레반의 영향력 밑으로 더욱 밀어넣었다. 농민들은 양귀비 재배로 하루에 20달러를 벌 수 있었고, 이 돈은 아프간 재단사들의 한 달 수입이었다. 탈레반은 전사들에게 100달러의 월급을 준 반면, 정부군 병사의 급료는 70달러에 불과했다.
“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탈레반은 시작된다”는 말은 2005년을 지나면서 현실화됐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전의 실패를 자인하고 이라크 주둔 미군 병력 증강을 발표하던 2007년 1월 아프간은 탈레반의 귀환으로 다시 들끓고 있었다. 탈레반을 중심으로 아프간 반군세력의 자살 테러 공격은 2006년 123건이나 늘었다. 이는 전년의 17건에 비해 7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사제폭탄(IED) 공격은 2배로 늘었고, 미군 등 연합군에 대한 공격은 3배로 늘었다. 반군에 의한 아프간 민간인의 죽음도 700여 명으로 기록적으로 늘었다. 미군 등 연합군 병력의 손실도 100여 명에 달했다.
부시가 이라크의 병력 증가를 발표할 때 아프간 남부 헬만드주에서는 영국 해병대가 반군 소탕을 위한 볼케이노 작전에 돌입해야만 했다. 영국 국방부는 곧 아프간 주둔 영국 병력의 증강을 발표하고, 2009년까지 7700명으로 늘린다. 3월4일 파키스탄 접경 낭가하르주의 신와르에서 미군 해병대가 폭탄테러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적어도 민간인 12명을 학살하고 33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신와르 학살을 저질렀다. 전투 병력의 민간인 학살은 전쟁 양상이 진흙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다는 증거다. 미국은 3월 말 3500명의 병력 증강을 발표하는 등 연합군은 2007년 들어 반군 소탕을 위한 공세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한국인 납치 사건, 탈레반 공식 협상자로 등장
아프간 사태의 심각성은 그해 여름 한국에서도 피부로 전해졌다. 7월19일 한국인 기독교 단기선교단 23명이 탈레반에 납치됐다 43일간의 억류 끝에 2명이 살해되고 나머지가 귀환했다. 이 사건은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 이후 탈레반에 의해 발생한 최대 규모의 인질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탈레반은 연합국의 일원인 한국과 공식 협상을 벌여, 한국으로부터 이미 예정돼 있던 것이기는 하나 2007년 말 철군 약속을 다시 확인해 받아냈다. 2001년 미군 침공으로 정권이 타도된 뒤 공식 존재가 부인되던 탈레반은 이 사건으로 내란의 당사자로서 지위를 완전히 복원했다. 이때쯤이면 탈레반은 파키스탄 접경 동부 지역 및 헬만드 및 칸다하르 등 남부 지역의 비도시 지역에서 완전히 영향력을 회복했다. 국토의 절반에서 탈레반은 돌아온 것이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bbc></a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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