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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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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을 위한 두 개의 ‘개조론’

조지 부시 행정부가 알카에다 소탕 기회를 날리면서까지
이라크 전쟁에 몰두한 이유는
등록 2014-05-14 16:38 수정 2020-05-03 04:27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언론인 밥 우드워드와의 인터뷰에서 이라크 전쟁 개전 준비를 하라고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에게 밝혔다는 2001년 11월21일이면, 럼즈펠드의 국방부는 이미 이라크 전쟁 계획을 착착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럼즈펠드는 일주일 전에 중부군사령부로부터 이에 관한 첫 공식 프레젠테이션을 받았다.
럼즈펠드는 9·11 테러 이틀 뒤인 9월13일 애틀랜타의 육군 3군사령부에 이라크의 남부 유전지대를 점령할 작전 계획을 3일 내로 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를 시작으로 육군 3군을 관할하는 중부군사령부의 토미 프랭크스 사령관과 핵심 참모들은 이라크 전쟁을 위한 새로운 작전 계획을 짜는데 아프가니스탄 전쟁 수행보다 더 많은 역량을 투여하고 있었다. 부시의 지시 이후 전쟁 계획은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본보기를 보이자

당시에도 부시 정부가 이라크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과는 달리, 알카에다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과는 관계가 없고, 후세인 정권은 핵무기나 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를 개발할 역량이 없다는 게 미국 정보기관과 국방부에 공지의 사실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관련 증거를 조작하면서까지 이라크 전쟁 개전의 명분을 만들고 전쟁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은 미국 건국 이후 최악의 전쟁이자, 최악의 대외정책 실패로 곧 귀결된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왜 테러와의 전쟁의 주적인 오사마 빈라덴과 알카에다를 소탕할 기회를 날리면서까지 엉뚱하게도 이라크 전쟁에 몰두해갔는가?
조지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전쟁을 감행한 건 9·11 테러 공격에 대한 과잉 대응에서 나왔다. 전무후무한 9·11 테러 공격의 충격 앞에서, 알카에다뿐만 아니라 미국에 맞서며 위협을 가하는 다른 세력과 정권도 응징하는 본보기를 보여 위협의 근원을 근절해야 한다는 인식이 작용했다. 이는 어쩌면 세계 최대 강국으로서의 자신감과 자존감에서 나올 수 있는 인식이다. 문제는 알카에다와 이를 품어준 아프간 탈레반 정권 외의 본보기 대상이 나름대로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굳이 찾자면, 알카에다의 둥지가 돼준 수단이나 무정부 상태로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이 들끓던 소말리아 등이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특히 소말리아는 전임 빌 클린턴 정부가 평화 유지 업무를 위해 병력을 파견했다가 알카에다와 연관된 무장세력의 공격을 받고 이른바 ‘블랙호크 다운’ 사건으로 치욕스럽게 물러난 곳인데다, 국제사회가 원죄처럼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곳이었다. 언론들이 럼즈펠드 등 부시 정부 당국자들에게 아프간 전쟁 개전 이후 그다음 대상이 소말리아가 되느냐고 물었던 것에서 이는 드러난다.
하지만 부시 정부는 이라크를 선택했다. 물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은 미국에 순종하지 않는 대표적인 정권이었다. 미국의 사활적인 이익이 걸린 중동 걸프만의 요충지 국가인 쿠웨이트를 한때 침략해 점령했다. 부시의 아버지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이때 이라크를 축출하는 걸프전을 치렀으나 후세인 정권을 교체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아버지 부시 행정부의 백악관 안보보좌관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걸프전 때 후세인 정권 존속을 용인한 것을 두고 “지정학 때문”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미국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성가시게 여겼지만, 이란의 세력 팽창을 막는 버팀목인 이라크가 와해될 위험을 감수할 조처를 피하기 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더 멀게는 20세기 이후, 미국의 외교안보 노선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인 두 축은 좌파와 우파, 혹은 보수파와 진보파(리버럴) 진영이 아니었다. 리얼리스트와 아이디얼리스트, 즉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진영의 대립과 각축, 그리고 타협이었다. 현실주의란 외교안보는 이념과 가치에 구애받지 말고 현실적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노선을 말한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외교와 무력 등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이상주의는 미국이 표방하는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이라는 가치를 우선적으로 실현하는 게 미국의 외교안보에 궁극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다. 미국의 역대 행정부들은 이상주의에서 다소 편차는 있었으나, 그 기저에서는 결국 현실주의를 기반으로 한 외교안보 노선을 취했다.

목소리 커진 우파 이상주의자 네오콘

하지만 조지 부시 행정부는 달랐다. 부시 행정부는 그 어느 행정부 때보다 이상주의자들이 득세했고, 특히 이들이 국방외교 부처에 포진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비타협적인 우파 이상주의자인 네오콘이었다는 것인데, 9·11의 충격은 이들의 목소리를 더욱 키웠다.
네오콘의 우파 이상주의 외교안보 노선이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매개는 두 개의 ‘개조론’(Transformation)이다. 두 개조론은 이라크 전쟁의 논리이기도 하고, 그 실패를 일찌감치 담보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네오콘 세력의 ‘중동개조론’(Transformation of Middle East)이다. 중동개조론은 중동 지역의 민주화 도미노 이론이다. 중동에서 가장 억압적인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교체하고 친서방적인 민주화 정권을 수립한다면, 이는 인근 중동 국가에 영향을 미쳐 중동 지역 전체에 친서방 민주 정권이 들어설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네오콘 세력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구현할 최적의 기회를 9·11 테러를 명분으로 한 이라크 전쟁에서 실현하려고 했다. 하지만 중동개조론은 중동에서의 민주화 도미노 효과가 아닌 분쟁의 도미노 효과만을 부른다.
두 번째는 럼즈펠드가 앞장서서 주도한 부시 행정부의 ‘군개조론’(Military Transformation)이다. 군개조론은 중무장한 압도적인 지상군 병력의 파견과 구축을 지양하고, 전력을 경량화·기동화한 뒤 첨단 정밀무기와 결합해 신속히 파견해 구축한다는 국방개혁론이다. 이는 재래식 전력을 축소하는 대신 미사일방어망(MD)과 첨단 정밀 초계, 타격 무기 개발에 역점을 둔다. 미국 군수산업의 이익에 충실히 복무하는 이상주의적 개혁론이었다. 군개조론은 그 자체로는 이라크 전쟁의 근본 배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400여 명의 미 지상군 특수병력만으로 탈레반 정권을 손쉽게 붕괴시킨 아프간전 초기 승리는 부시 행정부에 이라크 전쟁의 유혹을 더욱 자극했다. 본격적인 군개조론에 바탕한 이라크 전쟁이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한다. 하지만 군개조론에 바탕한 이라크 전쟁 계획은 결국 최대의 비용과 최악의 효과를 내고 만다.
럼즈펠드가 군개조론에 입각해 9·11 테러 직후부터 중부군사령부에 이라크 전쟁 계획과 관련해 보낸 메시지는 이라크 침공 미군 병력을 ‘더욱 줄여서, 더욱 신속하게 구축하라’는 것이었다. 군개조론은 부시 대통령이 후보 시절이던 1999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시터덜군사대학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걸프전 승리는 인상적이기는 했으나, 그 군사력을 준비하고 구축하기까지 6개월이나 걸렸다며 미국이란 유일의 슈퍼파워가 전세계에 국력을 투사하는 데 걸린 시간치고는 너무 길었다고 지적했다. 부시는 더욱 경량화·기동화·치명화된 군사력을 개발하겠다고 다짐했다. 또 부시는 군사력의 목적은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지, 그 전쟁의 결과로 생긴 국가에 안정을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즉, 클린턴 행정부 등 전임 행정부가 개입한 분쟁 지역에서의 평화 유지 사명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육군 장성 50명을 총으로 쏴죽이면…”

럼즈펠드는 군개혁론을 작성한 부시의 후보 시절 외교안보팀인 이른바 ‘벌컨’ 그룹보다 더 열렬한 군개혁론의 지지자이자 추진자였다. 미국 국방장관 사상 가장 젊은 나이로 1970년대 제럴드 포드 행정부 때 국방장관을 지낸 그는 펜타곤의 고위 장성들이 기득권에 사로잡힌 관료들로, 미국 국방의 제1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펜타곤의 육군 장성 50명을 줄로 세워서 총으로 쏴죽이면 육군의 문제점이 해결될 것이라고 측근들에게 말할 정도였다. 그는 9·11 테러 전에는 사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군 개조 계획에 몰두하다가 9·11 테러에 직면하자 본능적으로 군 개조를 실현할 기회로 판단하고 이라크 전쟁에 매달린다.
9·11 테러 이전에 미국이 이라크의 유사시에 대비해 갖고 있던 전쟁 계획은 ‘오플랜(OPLAN) 1003-98’이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앤서니 지니 중부군사령관하에서 작성된 이 계획은 미군 병력을 40만~50만 명으로 상정했다. 침공시에는 3개 군단, 약 38만 명이 필요하고, 지원병력까지 합치면 적어도 약 40만 명의 병력 구축을 상정했다. 이 계획에도 전후 안정화 대책을 포함한 점령 계획이 결여됐다. 중부군사령부의 전쟁 계획 입안자들은 점령 기간이 10년까지 갈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그래서 당시 지니 사령관은 이를 보완하는 ‘사막 횡단’ 작전을 입안했으나, 이는 관련 부처들의 비협조와 부시 행정부로의 정권 교체로 무산됐다.
럼즈펠드는 오플랜 1003-98 계획을 보고받고는 ‘왜 12만5천 명 이상의 병력이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고, 그것도 너무 많다’고 통박했다. 그는 이후 14만 명 병력을 마지노선으로 요구하며 중부군사령부의 이라크 전쟁 계획 작성에 일일이 간섭하고 실랑이를 벌였다. 토미 프랭크스의 중부군사령부도 럼즈펠드의 지시에 순응하면서도 결국 최대 병력 증강을 27만5천 명으로 하는 대신 병력의 파견과 구축, 그리고 전투 기간을 최소화하는 이른바 ‘코브라 Ⅱ’ 작전을 제시했다. 이는 ‘5-11-16-125 플랜’으로 구체화돼 부시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 대통령이 전쟁 개시 5일 전에 이를 결정하고, 11일 동안 병력을 배치하고, 16일 동안 공습을 하며, 지상군의 전투는 최대 125일 동안 진행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사담 후세인 정권의 붕괴에만 치중한 전투 계획이지 전쟁 계획은 아니었다. 후세인 정권 이후 이라크 안정화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는 요식에 불과했다. 미군 지도부도 럼즈펠드의 요구에 밀리며 후세인 이후의 안정화 대책은 꿈도 꾸지 못했다.
미군 지도부가 위험스러운 이라크 전쟁 계획을 낙관적으로 짜는 동안,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전쟁 개전을 위한 명분 쌓기에 몰두했다. 2002년 1월29일 부시는 의회 연두교서 연설에서 미국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미리 제거할 수 있다는 이른바 ‘예방전쟁’ 독트린을 천명한다. “나는 위험이 집적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위험이 더욱 가까이 접근할 때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세계의 가장 위험한 정권들이 세계에서 가장 파괴적인 무기를 가지고 우리를 위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부시는 이 자리에서 이라크·이란·북한이 포함되는 ‘악의 축’이라는 불량 정권 명단을 드러내, 이라크가 그 공격 대상임을 처음으로 시사했다. 악의 축 정권에는 당초 이란·이라크·시리아 등 이슬람 국가만 포함돼 있어서 이를 중화시키려고 북한을 끼워놓았다. 부시는 그해 6월1일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예방전쟁 독트린을 더욱 명확히 했다. “만약 우리가 위협이 완전히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린다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는 것이다.”
그즈음 미국 언론들은 이라크와 알카에다의 관계,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관해 부시 행정부가 흘리는 각종 부정확한 정보로 지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9·11 테러의 현장 지도자 모하메드 아타와 이라크 정보요원의 접촉설이다. 아타가 9·11 테러가 나기 전에 미국에서 출국해 2001년 4월9일 체코 프라하에서 이라크 정보요원을 만나고 돌아왔다는 정보다. 조지 테닛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2002년 6월18일 의회 증언에서 이 정보를 밝히며 “이 정보를 확인 혹은 부인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정보는 9·11 테러 직후 체코 정보부가 건넨 것인데, 이미 미국 정보 및 수사기관들은 아타의 전화 통화 내역 등에 관한 치밀한 행적 수사를 통해 그가 당시 미국에 있었다는 결론에 내부적으로 도달한 상태였다. 이는 나중에 9·11 테러위원회의 조사에서 입증됐다.

1주기, 이라크전 가능성 공식화

부시가 예방전쟁론 독트린을 공식화한 뒤인 2002년 7월10일 CIA 특수행동국 공작팀은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지역에 잠입해 쿠르드반군 조직에 나선다. 이들은 2천만달러의 공작금을 현찰로 가져가 이 지역의 물가 폭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9·11 테러 1주기가 하루 지난 2002년 9월12일 부시는 유엔 총회에서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추구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며 “우리는 위험이 축적될 동안 좌시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는 드디어 이라크 전쟁 가능성을 공식화한 것이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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