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람들이 ‘뿔났다’. 심상치 않다. 일본 시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총리 관저 부근을 시민들이 둘러싸고 원전 재가동 반대와 노다 요시히코 총리 퇴진을 외친다. 주최 쪽은 6월29일 시위의 규모를 20만 명이라 발표했다. 은 의미를 깎아 내리려고 참가 규모를 2만 명이라 보도했지만 다른 매체들이 10만 명 이상으로 보도하는 것으로 보아 주최 쪽의 발표가 사실에 가까운 듯하다. 게다가 시위 때마다 참가자 규모를 축소 발표해오던 경찰이 이번에는 입을 다물고 있어서 주최 쪽의 주장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1960년 안보투쟁을 떠올린다. 가장 최근의 군중 시위는 2003년 3월에 있었던 이라크 반전 데모였지만 이때는 4만 명 규모였다.
예상밖 시위 규모, 달라진 시위 문화
사실 일본의 이런 풍경은 낯설다. 필자도 이 정도 규모의 시위는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지난해 3·11 도호쿠 대지진 이후 줄곧 원전 반대 시위는 이어져왔다. 가라타니 고진의 말대로 3·11 이후 “일본은 시위를 할 수 있는 사회로 변했다”. 지난 1년여 동안 전국 어딘가에서 반드시 원전 관련 행사나 시위가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9월 6만 명이 참여한 항의 집회를 제외하면 몇천 단위의 집회가 드문드문 일어났을 뿐이다. 그나마 올해 들어서는 그 규모가 점차 줄어드는 추세에 있었다. 그리고 지난 5월5일 홋카이도의 도마리 원전이 가동을 중지해 일본은 47년 만에 ‘원전 제로’ 상태에 들어갔다. 물론 정기점검의 형식이었으니 이걸로 일본이 탈원전으로 접어들었다고 해석할 수는 없음을 필자는 줄곧 주장해왔다. 하지만 원전 제로가 3·11의 후폭풍과 원전 반대 여론을 의식한 결과라는 점은 명확하다.
그런데 일본 정부의 원전 재가동 움직임이 불쏘시개가 됐다. 오이 원전 주변을 둘러싼 데모대의 항의에도 7월5일 오이 원전은 재가동에 들어갔고, 원전 제로는 두 달 만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항의 데모가 다시 대규모로 확대됐다.
이케가미 요시히코 전 편집장은 원전 반대 운동을 ‘아지사이 혁명’이라 부른다고 서울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소개했다. ‘아지사이’는 수국을 뜻한다. 작은 꽃망울이 모여 큰 봉오리를 이루는 수국처럼, 개개인이 모여 큰 목소리를 내면 원전 정책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인 듯하다. 아마 ‘재스민 혁명’을 빗댄 것이겠지만, 뜬금없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다지 일반적으로 쓰는 표현이 아닐 뿐 아니라, 수국의 역사성도 불명확하다. 하지만 수국의 이미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존 시위와는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동영상으로 보니 북소리가 들리고 젊은 층, 특히 여성의 참가가 눈에 많이 띈다. 자유로움과 다양성이라는 점에선 1960년대 베트남 반전운동을 연상시킨다.
과거에는 ‘○○노동조합’ ‘○○연합’ ‘○○분쇄!’ ‘○○타도!’ 같은 깃발이나 피켓 아래 조직적으로 동원된 참가자들이 같은 조끼를 입고 정해진 길을 따라 정해진 구호를 외치는 경우가 많았다. 당파나 이념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피켓이나 깃발의 글씨체도 글자의 모서리를 유난히 강조한 고딕체에 가까운 빨간색을 곧잘 사용했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영향 때문인지 간자체를 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폭력을 뜻하는 독일어의 ‘게발트’(Gewalt)와 글자를 뜻하는 일본어의 ‘지’(字)를 합쳐 이런 글씨체를 ‘게바지’라 하기도 했고, 스탈린주의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트로츠키와 합쳐서 ‘트로지’라 부르기도 했다. 이런 독특한 글씨체의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비합법운동 시대의 일본 공산당의 활동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하고 공안 당국의 서체 감식을 피하려고 고안한 방법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데 이번 원전 반대 시위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부분적으로 깃발이 보이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적다. 손으로 급하게 엉성하게 쓴 종이와 얼기설기 만든 피켓이나 다양하고 자유로운 복장이 눈에 띈다. 조직 동원보다는 알음알음으로 모인 사람들이라는 증거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이번 원전 반대 시위는 그 형식에서 ‘혁명적’ 진화를 보여준다. 시위 ‘디자인의 혁명’이라고나 할까?
저녁 8시 정각에 끝나는 집회
지난 7월6일 총리 관저 앞에 모인 시위 참가자 491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이 중 52.3%가 항의 데모에 처음 참가했다고 한다. 항의 시위 정보를 취득한 경로를 보면, 트위터가 39.3%, 페이스북이 6.7%, 인터넷이 11%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60%를 차지한다. 지인이 17.3%, 신문이 6.3%, TV가 6.5%에 머물렀고, 단체 공지는 6.1%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번 시위는 기존의 조직화된 정파나 언론 미디어 등에 대한 이의 제기의 뜻도 담겨 있다. 그렇다면 20만 명의 시위 참가자는 개개인이 트위터 등을 통해 시간과 장소를 인지하고 개인의 자격으로 모여 개인의 이름으로 피켓과 깃발을 만들고 구호를 외친 셈이다. 모인 뜻은 하나다. 원전에 반대하기 위해! 이렇게 생각하면 이번 원전 반대 시위를 통해 일본의 사회운동은 1960년대 이래 진보운동의 분열·갈등의 망령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지 모른다. 주최 쪽도 이런 점을 의식한 듯하다.
총리 관저 항의 시위를 기획한 단체는 2011년 9월에 발족한 ‘수도권 반원전연합’이다. 스스로를 “단체가 아니라 네트워크”라고 소개하는 것처럼, 운동조직의 연합체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 네트워크가 6월29일 항의집회를 앞두고 사전에 공지한 주의사항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원전 반대와 관계없는 특정 정치단체나 정치적 슬로건을 담은 깃발이나 현수막을 내걸어서는 안 되며, 연설 중에 전단지를 배포해서도 안 되고 원전 반대와 관계없는 주제로 연설해서는 안 되며 어디까지나 단체가 아니라 개인의 자격으로 연설할 것, 만일 주최 쪽의 취지에 맞지 않는 내용일 경우 연설 중단을 요청할 수 있으며 주최 쪽의 지시에 따를 것 등이다. 그리고 7월5일에 공지된 안내문에서는 항의 집회는 저녁 6시에 시작해 8시 정각에 끝내며 비폭력 직접행동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이를 보면 주최 쪽이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기존 진보 진영의 갈등과 대립이 원전 항의 집회에서 표면화돼 이것이 다시 갈등과 대립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폭력 사태로 발전해 원전 반대를 위한 ‘국민운동’이 그 내부에서 와해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과거 사례를 보면 주최 쪽의 우려는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정치적 쟁점인 원전 문제를 정치와 분리하려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시위 참가자 사이에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나온다. 경찰 쪽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저녁 8시가 되면 어김없이 해산을 요구하는 주최 쪽의 타협적인 태도나, 정치적 깃발을 금지하면서도 일장기(히노마루)를 내건 참가자에게 유화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원전 반대에 힘이 된다면 내셔널리즘도 우파도 모두 상관없다는 암묵적인 양해에 대한 우려의 소리다. 비폭력 직접행동주의를 왜곡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비폭력 직접행동주의는 본디 권력 쪽과 ‘충돌’을 원천적으로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쪽의 약점을 파고들고 권력 쪽을 도발해 체포를 감수함으로써 권력 쪽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것인데, 주최 쪽의 태도에서는 이런 점을 찾아볼 수 없다는 비판이다.
원전 문제, 선거에선 이슈 중 하나일뿐?
물론 이런 평화적인 항의 집회를 주최 쪽의 일방적인 지시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폭력과 갈등으로 점철된 일본 사회운동의 역사에서 배운 학습효과가 개인 참가자들의 ‘집단지성’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술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충돌을 피하고 원전 문제를 정치와 분리해 평화롭고 다양한 소리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방법만으로 원전 반대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항의 집회 참가자 수가 늘어나면 일본 정부가 이를 여론의 압력으로 받아들여 원전의 불모에서 벗어나는 정책을 취하게 될까?
이번 시위에서 1960년 안보투쟁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때도 100만 명의 데모대가 국회를 뒤덮었다. 미-일 안보조약을 반대하는 여론을 일본 정부가 무시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문제라 생각했다. 하지만 미-일 안보조약은 비준됐다. 시위대의 요구대로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퇴진했지만 미-일 안보조약은 해체되지 않았다. 그리고 1960년 11월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60%의 득표율로 중의원 국회의석의 63%를 차지했다. 미-일 안보조약하에서 일본은 번영을 누렸고, 이를 일본에서는 ‘평화와 민주주의’의 시대라 부른다.
원전 문제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항의 시위가 민중혁명의 형태로 발전해 정부를 ‘전복’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항의 시위의 정치적 종착점은 선거를 통해 원전 반대라는 목표를 실현시키는 길밖에 없다. 주최 쪽도 이 점을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원전에 대한 반대 여론은 높다. 원전 반대를 내걸고 선거에 나서면 이길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지난해 3·11 이후 총선거는 한 번도 없었다. 지방선거만 있었다. 그런데 원전 반대를 내건 후보가 당선된 사례가 거의 없다. 2011년 4월10일 도쿄 지사 선거에서 핵무장론자에 원전증설론자인 이시하라 신타로는 40% 이상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원전추진론자인 다카하시 하루미도 70%의 득표율로 홋카이도 지사 선거에서 이겼다. 20만 명의 원전 반대 시위대가 총리 관저를 뒤덮었던 7월6일에서 이틀이 지난 7월8일 실시된 가고시마 지사 선거에서 원전 재가동을 주장하는 현직 지사가 원전 반대를 내건 후보를 거의 두 배 차이로 누르고 당선했다. 가고시마는 원전 2기가 정기점검 중이고, 1기는 건설이 계획돼 있는 곳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원전 반대 데모가 총리 관저를 뒤덮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원전 반대 여론이 높은데 선거 때만 되면 원전 반대 후보는 힘을 못 쓴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론조사는 원전에 대한 찬성 여부를 묻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선거는 다르다. 원전만이 쟁점이 아니다. 유권자들은 다른 쟁점 중의 하나로 원전 문제를 생각한다. 전력 부족에 대한 우려나 경기부양 문제와 관련해서 생각하게 된다.
원전 재앙 이후 최초의 총선거
게다가 시위가 오직 원전 반대라는 목적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때, 그리고 원전 문제가 ‘빨대’처럼 모든 정치적 쟁점을 빨아들이고 있을 때, 원자력 기본법이 개정됐고 한-일 군사보호협정을 체결하려 했으며, 중국과의 영토 갈등이 심각해졌다.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해석개헌의 움직임도 본격화됐다. 시위대의 요구대로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사퇴하고 국회가 해산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총선거가 있을 것이다. 총선거에서 원전 반대 후보가 이길 수 있을까? 민주당에서 나온 오자와 이치로 신당은 원전 반대를 주장한다. 파시스트 하시모토 도루가 주도하는 ‘오사카 유신의 회’라는 정당도 원전에 대해 유보적이다. 원전 반대라는 목표를 우파 정당에 일단 맡길 수밖에 없는 현실이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당장 7월29일로 예정된 야마구치현 지사 선거가 분수령이 될 것이다. 야마구치현 가미노세키는 2기의 원전 건설이 계획돼 있는 곳이다. 3·11로부터 여섯 달이 지난 지난해 9월에 실시된 수장 선거에서 가미노세키 유권자들은 원전 추진 후보에게 70% 가까운 몰표를 주었다. 원전 계획이 발표된 이래 원전 추진 후보의 9연승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결과가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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