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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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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으로 강요된 자주규제

<더 코브> <야스쿠니> 등 우익의 힘이 사전 검열한 영화들…제국에 대한 향수를 문화상대주의 가면으로 가린 ‘자주규제’
등록 2011-06-23 17:23 수정 2020-05-03 04:26

다큐멘터리 영화 (루이 시호요스·2009)은 한국에서도 호평을 받았고 아카데미영화제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작품이다. 일본의 작은 어촌에서 벌어지는 돌고래잡이의 잔혹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작품을 일본 사회가 불편하게 느낄 것이라고 어느 정도 예상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극장 쪽이 2010년 6월 상영 직전에 상영을 취소했기 때문이다. 상영 취소는 극장 쪽의 ‘자주적인 판단’인 듯하다. 계속되는 우익들의 항의에 극장 쪽이 손을 든 것이다. 야스쿠니 문제를 다룬 (리잉·2007)도 2008년에 우익들을 불러 사전 공개 시사회를 개최하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예정보다 한 달이 지나서야 상영됐다. 민간 쪽의 ‘자주규제’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실질적 요소로 작동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우익의 방해를 산 일본 영화는 왜 없을까

일본에서는 영화 제작 및 상영에 국가가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제도가 없다. 과거에 존재하던 영화법이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이든 민간단체인 에이린(영화윤리협회)이 인증을 부여하면 영화관에서 상영할 수 있다. 와 는 모두 에이린에서 인증을 받은 작품이다. 그럼에도 극장 쪽이 ‘소동’을 우려해 상영을 중지한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비슷한 사례가 없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위안부’ 문제를 다룬 한국의 다큐멘터리 영화 (변영주·1995)도, 난징 대학살을 다룬 중국과 대만의 합작영화 (오자우·1995)도, 히로히토의 1945년 8월15일 전후의 모습을 그린 러시아·이탈리아·스위스·프랑스 합작영화 (알렉산드르 소쿠로프·2005)도 우익단체들의 방해로 크고 작은 소동을 겪었다.

영화 <야스쿠니>는 일본 우익의 방해로 끝내 일본 극장에서 상영되지 못했다. <야스쿠니>의 한 장면.

영화 <야스쿠니>는 일본 우익의 방해로 끝내 일본 극장에서 상영되지 못했다. <야스쿠니>의 한 장면.

물론 특정의 이데올로기적인 ‘방해’로 표현의 자유가 위축된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1961년 월간지 (中央公論)에 게재된 후카자와 시치로의 소설 (風流夢譚)이 ‘황태자가 목이 잘리는 모습’을 묘사했다고 해서 우익 소년이 살인 테러를 가하고 이 때문에 대표가 사죄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다. 또 월간지 (소문의 진상)가 황실에 대해 경칭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익단체가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등에 대한 우익 테러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밖에도 운동단체나 재일조선인 민족단체의 행사에 공공기관이나 민간시설이 우익단체의 압력에 굴해 시설 대여를 개최 직전에 취소하거나 하는 일도 알려져 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일본 영화계가 영화법 폐지 이후에 최소한의 공적 규제를 담은 에이린 시스템으로 이행했음에도 시장이라는 요건 이외에 우익단체의 개입이라는 또 하나의 팩터가 사실로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익단체의 방해를 받고 극장 쪽이 ‘자주규제’로 상영을 중지하는 영화들이 주로 수입 영화라는 점이 주는 함의는 중요하다. 이는 일본의 영화 제작자들이 우익단체의 ‘방해’를 살 만한 영화를 당초부터 만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익단체의 ‘방해’ 활동은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우익단체의 ‘힘’이 사전검열 기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의 사회문제를 다룬 외국 영화는 표현이나 내용의 문제가 민족 간 혹은 국가 간 대립으로 바꿔 읽히는 측면이 커졌다. 영화 자체가 아니라 일본인 대 외국인, 일본 문화 대 외국 문화의 대립 코드로 읽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는 기존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둘러싼 논쟁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카메라를 작동시킨다. 영화에서 야스쿠니를 은유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일본도’라 불리는 칼이다.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일본도 장인과 야스쿠니의 모습을 교차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은 이 영화의 매력 중 하나다. 여기서 일본도는 야스쿠니를 상징하는 메타포다. 야스쿠니가 ‘모시는’ 신체(神體)가 바로 일본도이기 때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야스쿠니신사의 신체는 일본도인데, 1933년부터 패전 때까지 약 13년간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서 약 8100개의 일본도가 제작되었다”는 표현은 야스쿠니를 둘러싼 역사적·정치적 쟁점을 일거에 일본의 전통문화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전통의 가면을 쓴 폭력

일반적으로 일본도는 살상무기의 성격과 함께 그 자체로 미적 가치를 지니는 예술품의 하나로 인식돼왔다. 전시기에 장교 등에게 지급된 일본도가 한편에서 살상무기로, 다른 한편에서는 미적 권위를 상징하는 일종의 장식품 역할을 한 것도 일본도가 지니는 이중의 성격 때문이다. 패전 뒤, 미군정이 일본도의 폐기 조처를 취한 것은 일본도를 살상무기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의 정책도 모순적이다. 일본도 소지는 총도법(銃刀法)에 의해 제한을 받지만, 그 소유에는 별도의 허가가 필요 없다. 일본 정부도 한편으로는 살상무기로, 다른 한편으로는 미술품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더 코브>는 일본 어촌 마을의 돌고래잡이를 비판한 영화다. 일본 우익은 ‘일본 문화를 왜곡한다’는 논리로 이 영화의 상영을 방해했다.

<더 코브>는 일본 어촌 마을의 돌고래잡이를 비판한 영화다. 일본 우익은 ‘일본 문화를 왜곡한다’는 논리로 이 영화의 상영을 방해했다.

하지만 일본도가 아무리 미술품으로 전통을 상징한다 해도(물론 이 전통도 인구의 7%인 사무라이 계급의 전통에 불과하지만), 미적 기능이 살상무기로서의 가치와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 감독은 장인에게 묻는다. “일본도는 한 사람을 베면 날에 손상에 가서 쓸모없어진다고 하던데요?” 그 때까지 완강하게 침묵을 지키던 장인은 이때만큼은 매우 적극적으로 “그럴 리가 없다. 100명을 벨 수 있다”고 답한다. 장인의 ‘고백’은 순식간에 일본도가 정치나 역사와 분리할 수 없는 구체적 역사성을 지니는 살상무기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일본도를 살상무기로부터 분리해 미적 가치의 기능만 강조해 이를 일본의 전통으로 삼으려는 일본 사회의 시도는 실패한다. 물론 감독이 이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묘사를 통해 관객은 ‘전통문화=일본도=살육=야스쿠니’라는 등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우익단체의 반발은 사실 야스쿠니가 가지는 역사성이 일본도라는 전통문화를 통해 구체적인 ‘폭력’으로 각인되는 데 대한 반발일 것이다.

는 훨씬 노골적이고 직접적이며 구체적이다. 은유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다큐멘터리 그 자체다. 는 그 자체로 보면 돌고래 보호를 주장하는 환경활동가의 시선을 통해 돌고래를 살상하는 반환경적 산업의 잔혹함을 폭로하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줄곧 돌고래·고래잡이의 잔혹함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춘다.

일본만이 고래(돌고래 포함)잡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큰고래잡이(포경)가 금지된 이래, 일본 사회는 이를 일본의 전통적 식문화에 대한 서구의 부당한 압력으로 받아들여왔다. 그래서 감독은 와카야마현의 다이지라는 작은 어촌 마을에서 벌어지는 돌고래잡이가 수은 중독을 통해 미나마타병처럼 일본 소비자의 건강을 얼마나 위협하는지를, 그리고 돌고래잡이가 일본 전통이 아니라 일종의 산업적 이익(대체식용·관상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또 다이지에서 돌고래잡이가 대규모로 그것도 잔혹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무지한 일본인의 인터뷰를 통해, 이것이 전통이라기보다는 한정된 지역의 산업적 이익에 불과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일본인을 중국인으로 오인하기

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감독의 의도와 관계없이 영화가 인종적 대립 구도로 읽혔기 때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환경활동가는 모두 백인이다. 이들의 촬영을 방해하는 사람은 모두 ‘일본인=황인종’이다. 경찰도 공무원도 현지 주민도 깡패도 모두 황인종이다. 문명적 백인종 대 미개한 황인종이라는 대립 구도다. 영화 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에 등장하는 ‘백인 해리슨 포드=문명 vs 원주민=미개’의 대립 구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활동가와 감독들의 긴장감 넘치는 잠입 취재는 한편에서는 백인들의 용맹함과 아울러 이를 방해하는 일본인들의 미개함을 극적으로 은유한다.

따라서 일본 언론의 태도가 이 영화에 우호적이지 않은 것은 이를 ‘일본인=일본 문화’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은 ‘단순화의 공죄’라는 2010년 7월20일의 기명 칼럼에서 가 권선징악적 영웅담을 지극히 단순화함으로써 돌고래잡이 어민들과의 교감을 회피하고 “일본인을 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일본인의 내셔널리즘을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중에 야스쿠니 참배 반대를 외치는 두 청년이 경내 밖으로 쫓겨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경내 밖에까지 집요하게 따라와 “중국인은 중국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일본인의 모습은 에서 백인 제작자들에게 현지 주민들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반복해 외치는 장면과 오버랩된다. 사실 두 청년은 중국인이 아니라 일본인 활동가다. 그럼에도 이를 일본인이 ‘중국인’으로 착각한 것은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일본인은 있을 수 없다는 일본 사회의 ‘믿음’을 감독 자신이 비틀어 표현한 것이다.

에 등장하는 백인과 원주민(일본인)의 대립 구도나 에 등장하는 중국인과 일본인의 대립 구도는 감독 자신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나 를 보편적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이문화 간 충돌이나 민족·국가 간 대립으로 읽고 싶어하는 일본 사회의 바람이나 믿음을 감독이 비틀어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우익단체의 항의가 상업용 영화관의 상영 중지라는 자주규제를 이끌어냈고, 이런 자주규제를 일본 사회가 승인하고 있다면(물론 이에 대한 사회적 반발도 적지 않다), 두 영화를 둘러싼 소동에서 두 영화가 담고 있는 보편적 메시지를 불편하게 느끼는 일본 사회가 저변에 존재한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제국의 향수가 방해를 지탱해

산업적 이익도 그리 크지 않고 일본 사회의 상식(常食)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며 건강상에 피해를 줄 수 있는 돌고래잡이를 국제적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속시키는 이유는 어디 있을까? 이런 질문은 야스쿠니 문제에서도 동일하다. 이를 에서는 “제국에 대한 향수”라 표현한다. 자신들이 가치를 정하고 자신들의 의사에 따라 규칙을 움직일 수 있던 시대에 대한 향수가 문화상대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우익단체의 ‘방해’, 즉 자주규제를 지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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