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콰도르에 도착해서 별다른 계획 없이 찾아올 우연을 기다렸다. 그러다 우연히 에콰도르의 안데스산맥 트레킹 안내책자 복사본을 몇 페이지 발견했고 그것이 우리의 길이 되었다. 돌아갈 곳도 없고 돌아갈 날도 정해지지 않은 우리에게 계획된 길은 없었다.
수도 키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모양의 화산산이 있다. 이름은 코토팍시(Cotopaxi), 잉카의 언어 케추아(Quechua)어로 ‘불덩어리’라는 뜻이다. 그들이 살던 때 큰 화산 폭발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나 보다. 또 다른 인디언 부족 언어인 카야파(cayapa)어로는 ‘달의 목’이라 불렸는데, 나는 달에 가본 적도 없는 그들이 외계 행성을 걷는 듯한 코토팍시 위의 돌바닥을 절묘하게 표현했다는 것에 놀랐다.
코토팍시 여행은 아마존을 떠나 7개월 만에 우연히 에콰도르에서 다시 마주친 베네와의 재회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키토에서 버스를 타고 마차치라는 마을에서 내렸다. 이 루트는 보통 관광객들이 가는 길이 아니므로 입장료를 내는 검문소를 거치지 않아도 되고, 가는 길에 코토팍시 주변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대신 하루 6시간씩 이틀을 걸으면 된다. 마을에 도착하고 트럭을 히치하이킹하는 데 성공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중간에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줄기차게 오는 비에 비옷으로 갈아입고 진흙길을 3시간이나 걸었을까? 우리는 벌써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텐트를 칠 만한 곳을 찾아 짐을 풀고 저녁으로 간단히 치즈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은 뒤 깊은 잠이 들었다. 딱딱하고 축축한 바닥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다음날 서둘러 텐트를 접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전날 생각보다 많이 걷지 못했기에 마음이 급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큰 장애가 눈앞에 펼쳐졌다. 짙은 안개 때문에 10m의 시야도 확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라 길이라는 표시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리오의 천재적인 방향감각과 허접한 지도 한 장에 의지해 걸었다. 길을 잃을 것 같은 상황에서 ‘에라, 모르겠다! 밥이나 먹고 보자’며, 하루 만에 엄청 딱딱해진 빵에 참치 캔 하나를 열어 나누어 먹었다. 그 사이에 안개가 걷히는 것 같았다.
간신히 길을 찾아 내려간 언덕에는 새까맣고 건강한 황소들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들 사이를 지나 언덕 위에 서니 안개 사이로 코토팍시의 완벽한 봉우리가 보였다. 적당한 평지를 골라 텐트를 쳤다. 전날보다 더 높은 고도에 추위가 느껴졌다. 우리는 재빨리 마른 장작을 주워다 불을 지펴 따뜻한 요리를 했다. 양파와 버섯을 넣은 라면이었다. 별거 아니지만 먹는 내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날 7~8시간 정도 걸은 것 같았다. 뱃속이 따뜻하게 차오르자 추위와 피로에 지친 내 볼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온기를 느끼며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아무 대화가 필요 없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리고 나는 수많은 별의 신호를 받았다.
다음날 아침, 우기에 잔뜩 흐려야 할 하늘의 모습이 화창했다. 코토팍시의 만년설 봉우리가 구름 사이에 수줍게 걸려 있었다. 우리의 ‘무작정 걷기 중심적’ 여행 일정을 따라오기가 피곤했는지 베네는 남겠다고 했고, 나와 다리오는 코토팍시에 오르기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장비 없이 올라갈 수 있는 한계인 4800m의 대피소까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죽기 살기로 올라온 우리는 대피소 아저씨가 공짜로 준 따뜻한 물과 마른 빵을 점심으로 먹었다. 관광차를 타고 대피소 가까이까지 올라와 피곤한 기색 없이 차를 마시던 사람들은 우리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지금 생각하니 우린 꽤나 없어 보였다.
텐트와 베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해가 막 지려고 했다. 베네는 언덕 위에서 우리가 오는 것을 보고 미리 불을 피워놓았다. 마지막 만찬으로 어제와 똑같은 라면을 먹었다. 베네는 우리가 없는 사이에 강 주변에서 수영을 하다가 영역 본능이 강한 새들의 공격을 받은 이야기를 하며 씩씩거렸다. 어제보다 덜 추운 밤 날씨에 우린 불이 꺼지고도 한참 동안 그곳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지와 다리오 ‘배꼽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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