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어날 때부터 까맸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여자는 모름지기 피부가 백옥 같아야 사랑받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 뒤 첫 미팅에 나갈 때 엄마는 파운데이션을 목까지 두껍게, 마치 케이크에 생크림 바르듯 발라주며 오늘 모든 남학생이 너를 우러러볼 것이다, 라고 했다.
결과는 정확히 그 반대였다. 첫 미팅 때 나는 영락없이 일본 게이샤처럼 보였다. 목까지는 하얗고 목 아래는 까매서 어떤 사람은 얼굴과 몸을 잘못 이어붙인 여자 프랑켄슈타인 같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돌연변이 고양이 같다고 했다. 그 사건이 내 스타일을 결정하는 인생 첫 번째 사건이 되었고, 파운데이션을 바르지 않는 까만 맨피부는 나의 저항정신이 되었다(고 하면 뻥이고) 게으름 때문에 저절로 내 스타일이 되었다. 즉, 파운데이션은 머스트 낫 해브 아이템이다. 나는 화장은커녕 머리도 말리지 못하고 출근했다. 물기 뚝뚝 떨어지는 머리로 뛰어다니다 보면 겨울에는 머리칼에 섬세한 고드름이 달렸다. 엘리베이터에 타면 고드름이 녹으며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예의 바른 내 직장 동료들은 ‘사는 게 쉽지 않지?’ 하고 내 얼굴을 외면했다.
나는 원피스 마니아였다. 원피스는 특별한 코디가 필요 없어서 나처럼 부분적인 것에 열광하느라 전체를 조망하는 데 손톱만큼의 재능도 없는, 그러니까 한 그루 나무를 보느라 숲을 볼 생각도 못하는 사람에겐 딱 맞는 패션 아이템이었다. 게다가 원피스는 입는 데 몇 초 걸리지 않으니 시테크용으로도 제격이었다. 그런데 겨울에도 맨발로 뛰어다니다 보니 발목 관절이 시렸다. 그래서 발목을 위해 스타킹만은 꼭 챙겨 신거나 들고 뛰었다. 그런데 직장생활의 영원한 과제는 반복되는 것, 지루한 것, 권태로운 것, 처음엔 실망스러워 보이는 것, 부질없어 보이는 것, 허망함을 견디는 것이다.
힘없고 우울한 날에 형형색색의 원색 아이섀도와 스타킹은 내 즐거운 장난감이었다. 직장생활이 덜 활기찬 날일수록 기를 쓰고 카리브해 바다 빛깔, 아마존 원시림 색깔 아이섀도와 스타킹을 갖고 다녔다.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생의 리듬 속에서 나는 사소한 반란의 조짐 같은 반짝이는 빛깔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이상하게 눈에 튀는 스타킹들이 날 탄탄하게 조여주며 나를 만들어갔던 것도 같다. 도덕적이고 정말로 패션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은 나의 무질서한 화장과 총천연색 패션에 곤혹스러움을 느끼고 심심풀이용 화제로 삼고 유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한낮 질서정연한 회사에 뛰어든 열대 나방같이 굴 수밖에 없다. 스타일은 내면의 증거는 아니다. 그러나 내면의 장난감 정도는 된다.
C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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