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나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던 19인치 브라운관 TV와 결별하게 된 건 순전히 야구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LG트윈스의 선전 때문이었다. LG트윈스가 ‘엘롯기’ 동맹에 속해 있던 지난해까지만 해도 TV를 바꾼다는 것은 불필요한 낭비로 여겨졌다. 엘롯기란 엘지-롯데-기아 등 만년 하위권 세 팀을 묶어서 일컫는 표현이다(지난해부터 ‘엘히롯기’라는 신조어도 간혹 눈에 띈다. 히어로즈가 추가된 것이다).
그렇다. 남들은 주말이 되면 낚시를 간다거나 연애를 한다거나 하다못해 영화라도 본다지만, 나는 야구를 본다. 물론 반드시 LG트윈스 경기라야 본다. 침대에 벌러덩 누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야구를 보는 것은 나의 유일한 주말 오락이자 낙이었다.
물론 조건이 있다. LG가 가을에도 야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비록 오래된 LG팬이라고 하지만 최하위권을 전전하는 팀에 변함없이 응원을 보낼 만큼 충성스런 팬은 못 되는 것이다.
올해는 일찌감치 감이 왔다. 4월10일이었다. 그날 잠실에서는 잠실 맞수 LG-두산의 시즌 첫 대결이 펼쳐졌다. 말이 맞수이지 LG는 2000년대 들어 시즌 전적에서 두산에 우위를 보인 해가 거의 없을 정도로 밀렸다. 올해 두 팀이 처음으로 맞붙은 그날도 8회말까지 4-5로 끌려다녔다. 9회말 어렵게 만든 1사 만루 찬스. 타석에는 LG의 외국인 선수 페타지니가 들어섰다. 상대 투수는 두산이 키우는 신인 마무리 이용찬이었다.
만약 그때 페타지니가 과거 LG 선수들이 그랬던 것처럼 유격수 앞 병살타로 게임을 끝내버리거나 터무니없이 높은 공에 허리케인급 ‘선풍기’(헛스윙을 말한다)를 돌리며 삼진으로 물러났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페타지니가 친 공은 멀리멀리 날아가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이 됐다.
페타지니의 역전 만루포 한 방으로 나는 멀쩡하던 브라운관 TV를 버리고 디지털방송 수신이 가능한 32인치 LCD TV를 사게 된다. 3개월 무이자 할부로. 파란 하늘과 초록 잔디, 하얀 공의 선명한 대비를 즐기려면 화질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었다.
2009 시즌이 전반기를 모두 마친 지금 나의 야구용 TV는 필요할 때 생활소음을 내주는 바보상자로 전락했다. 6월 이후 답답한 경기로 일관한 LG의 순위가 뚝뚝 떨어져 마침내 7위 자리를 굳히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7월25일 올스타 전 이후 기적적인 하반기 대공세를 시작할 수도 있지만, 엘히롯기 동맹 가운데 나머지 세 팀이 보여주고 있는 탄탄한 전력을 고려한다면 LG가 4위 자리까지 치고 올라가기란 매우 버거울 것으로 보인다.
뭐, 이런 식이라면 나의 올해 야구는 마감될 것으로 보이지만 남는 것도 있다. 7월25일 마지막 결제분이 돌아오는 TV 할부금, 그리고 나의 야구용 TV다. 물론 야구 경기가 실망스럽더라도 야구용 TV 할부금을 LG에 청구하거나 팔아치울 생각은 없다. 야구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석방이 웬말” 시민들 ‘윤석열 구속 취소’에 다시 거리로
대검, 한밤중 논의에서 윤 석방에 무게…최종 결론은 미지수
윤석열 석방? 즉시항고? ‘구속 취소’ 뒤 혼돈에 빠진 검찰
윤석열 지지자들, ‘구속 취소’에 사법부 위협 거세져…“처단하자”
미국 15년 만에 ‘총살형’ 집행…언론에도 공개
‘윤석열 구속 취소’에 한남동은…“애국시민 승리” vs “구속 촉구”
탄핵 기각됐던 이정섭 검사, 결국 검찰에 기소됐다
박찬대 “심우정 검찰총장 ‘윤석열 석방 기도’ 의심…수사 방해 말라”
경찰, 윤 파면 촉구 집회에 행진 금지 통고…주최 쪽 집행정지 신청
“평생에 한 번”…10개 태양계 천체를 한 장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