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한국 사회에는 격투기 바람이 불어닥쳤다. ‘하이브리드’와 ‘퓨전’이 시대적 코드였다. 구기 종목을 빼고는 거의 유일하게 프로의 명맥을 잇던 씨름과 권투는 갈수록 쇠락의 길을 걸었다. 세계선수권과 아시안게임, 올림픽에 목매는 것 말고는 30대 이후의 삶을 기약할 수 없는 유도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동시에 부와 명예에 목마른, 엘리트 종목 선수들은 잇달아 종합격투기에 출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한때 ‘변절자’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격투기에 달려들던 그들의 모습을 요즘 보기가 쉽지 않다. 승전보는 가물에 콩 나듯 한다. “K-1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오더라도 모래판에는 서지 않겠다”며 악에 찬 사자후를 토해내고 격투기에 뛰어든 최홍만은 4연패의 수렁에 빠졌고, 그의 씨름 선배이자 격투기 후배인 이태현은 결국 글러브를 벗고 샅바를 다시 맸다.
챔피언으로서 천하장사로서 메달리스트로서 과거 언젠가 ‘영웅’의 반열에 올랐던 그들은 지금 100m 달리기를 하듯 마라톤을 시작한 뒤 반환점에 앉아 잠시 쉬고 있다.
최홍만. 연합
사람들의 궁금증은 애초 이런 거다. 리샤오룽(이소룡)과 청룽(성룡)이 전성기의 체력과 실력으로 맞붙으면 누가 이길까? 여기에다 리롄제(이연걸)를 끼워넣으면 흥미는 더해진다. 그러고 보니 이들은 주로 쿵후 전공자들 아닌가? 그렇다면 영화 시리즈에서 맨몸 액션의 진수를 보여준 무에타이 선수 출신 토니 자까지 더해지면 그럴듯한 그림이 나온다. 토니 자가 순간적인 무릎이나 팔꿈치 공격에 들어가면 리샤오룽은 어떤 수비와 반격을 할까?
일정한 규칙 아래 맨몸으로 싸웠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센 사람은 누구일까에 대한 마초적 호기심, 이른바 이종격투기 탄생의 배경이다. 1976년 당시 권투 황제 무하마드 알리(미국)와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일본)의 역사적 대결이 링 바닥에 드러누운 이노키의 소극적 경기 운영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사건은 이 호기심에 더욱 불을 붙였을 뿐이다.
90년대 들어 일본과 미국 등에서는 종합격투기 대회가 만들어지고 상업적 흥행까지 거두었다. 격투기가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 건 2004년 7월 일본 격투기인 케이원(K-1)이 처음으로 한국에서 대회를 열고 같은 해 12월 씨름 천하장사 출신 최홍만이 K-1 진출을 선언하면서부터다. 당시 사회적으로 ‘민족 자긍심’ 논란이 일며 그의 선택을 놓고 여론조사까지 벌어졌는데, 86%가 넘는 사람들이 최홍만을 지지했다. 이후 국내 유명 스포츠 스타들이 일본 격투기 시장에 속속 뛰어들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유도 은메달리스트 김민수와 당시 47연승 기록 보유자인 ‘비운의 유도 스타’ 윤동식은 물론이고, 천하장사 출신 이태현과 김영현 등 주로 씨름과 유도 출신 스포츠 스타들이 주인공이었다. 세계 챔피언을 지낸 권투의 최용수와 지인진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이 일본 사이타마 수퍼어리나와 같은 큰 경기장에서 수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이는 경기 장면은 실시간으로 안방에 생중계됐고, 격투기는 축구와 야구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심지어 최홍만이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 레미 본야스키(네덜란드)와 맞붙은 2005년 11월19일 K-1 월드그랑프리 결승전은 국내 시청률 20.4%를 기록해 케이블 채널 역사를 새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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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08년 한 해 동안 이들 스타 출신 격투기 선수가 뛰는 경기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나마 승리하는 경우는 가물에 콩 나듯 한다. 그라운드에서 팔꿈치를 꺾어 상대의 기권을 받아내는 기술 ‘암바’로 잇단 승리를 따내던 ‘암바왕’ 윤동식은 지난 9월 앤드루스 나카하라(브라질)에게 지면서 2경기 연속 패배를 기록했다. 최홍만은 12월7일 주먹이 센 레이 세포(뉴질랜드)에게 지면서 4연패의 수렁에 빠졌다. ‘씨름 황제’ 이태현은 아예 격투기를 접고 모래판 복귀를 선언했다. 3전1승2패, 2년5개월 동안 그가 남긴 초라한 성적표다. 그나마 김민수는 지난 8월 경기에서 판정승을 거뒀으나, 그게 올해 김민수가 뛴 경기의 전부다. 김영현도 지난 7월 대만 대회에 한 차례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고, 최용수는 올해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일본과 미국 격투기 시장에 진출한 한국 선수가 해당 체급의 챔피언에 오른 적은 그동안 단 한 번도 없다. 최근 이들 선수가 보여주는 모습은 3년 전의 뜨거운 열기와 극명히 대비된다. 그 많던 한국의 천하장사와 챔프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한국 선수들의 쇠락과 함께 격투기 마니아를 뺀 일반 팬들의 관심도 시들해졌다. 격투기에 거품이 끼었다는 지적은 3년 전부터 제기된 것이었다. 열악한 격투기 저변에 비해 워낙 최홍만이 초반 ‘인기 상승 주도주’의 구실을 한 탓에, 그의 기량과 성적에 격투기 인기가 연동돼 있던 측면 때문이다.
왼쪽부터 일본 종합격투기 시장에 진출한 최홍만, 김민수, 김영현, 최무배, 추성훈. 미디어가든 엠파이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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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세계 격투기 시장이 전반적인 구조조정 국면을 맞는 동시에 한국 선수들의 격투기 기량 또한 숨고르기에 들어간 것이다. 지금까지 세계 격투기 시장은 막강한 자본력을 무기로 삼은 일본과 미국에 의해 양분돼왔다. 그러다 지난해 최고의 종합격투기 선수 집합소인 일본 프라이드가 미국 UFC에 팔리면서 격투기 시장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프라이드는 야쿠자 자금 유입설이 끊임없이 불거지는 가운데 가 주관방송사를 그만두고 스폰서들마저 손을 떼면서 무너졌다. 결국 자본의 건전성이 문제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종합격투기 시장이 미국 UFC ‘1극 체제’로 재편됐다. ‘60억분의 1의 사나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헤비급 세계 최강 예멜리야넨코 표도르(러시아)와 ‘도끼살인마’라 불리는 미들급 최고 스타 반덜레이 시우바(브라질) 등 프라이드의 주요 선수들이 대거 UFC로 건너가기에 이르렀다. 고미 다카노리, 미사키 가즈오 등 몇몇 스타만 일본에 남아, 이후 만들어진 종합격투기 대회 ‘센고쿠’에 남았다. 동시에 입식타격 대회 정상을 지키던 K-1마저 새로운 선수 수급의 난맥 등 문제를 겪으며 시들해졌다. 한국 선수들이 미국보다는 일본 시장에 압도적으로 많이 진출한 상황에서 시장은 요동치고 출전할 대회 자체가 줄어든 것이다. 격투기 전문 온라인 매체인 의 이성호 편집장은 “우리 선수들이 일본 격투기 시장을 타기팅하다 그쪽 시장이 불황을 겪으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동시에 스타 출신 한국 격투기 선수들의 기량이 한시적으로 한계에 이르렀다는 분석에 격투기 전문가들은 대체로 동의한다. 일본 격투기 단체들이 2004년 말부터 한국 엘리트 체육 출신 선수들을 집중적으로 영입한 데는 몇 가지 상업적 노림수가 있었다. 첫째는 한국 시장 개척이다. 당시 포화상태에 이른 일본 시장을 넘어 이웃나라 한국으로 시장을 확대하려면 한국 선수의 대회 출전은 불가피했다. 여기에 한-일 선수들의 맞대결은 두 나라에서 늘 흥행을 보장한다. ‘씨름 천하장사 출신의 최홍만 대 스모 요코즈나 출신의 아케보노’ 카드가 대표적인 경우다. 시드니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인 다키모토 마코토와 다키모토를 유도 시합에서 두 번 붙어 모두 이긴 바 있는 윤동식의 격투기 대결도 성사됐다.
이런 식이다 보니 일본 쪽은 한국 선수들을 실력이 아닌 이름값을 보고 데려갔다. 이들을 우수한 선수로 키우기보다는 ‘흥행 도구’로 삼으려는 일본 쪽의 미끼를, 국내 현실에 답답해하던 한국 선수들은 덥석 물 수밖에 없었다. 최근 간단한 허리수술 뒤 요양 중인 김민수는 과의 통화에서 “처음엔 격투기 룰이 뭔지도 모르고 밥 샙과 붙었지만 그 뒤 굉장한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말했다. 윤동식도 불과 2주일 훈련하고 일본 종합격투기의 선구자 격인 사쿠라바 가즈시와 붙어 어이없는 패배를 당한 바 있다. 반면 UFC는 선수의 실력을 주로 본다. 이름값만으로는 계약하지 않는다. 천하장사와 챔피언 출신 한국 선수들이 UFC로 거의 진출하지 못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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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대부분의 선수들은 무모하게도 격투기 전향 선언 뒤 한 달 안팎의 짧은 연습 기간만을 거친 채 링에 올랐다. 그 뒤 맞아가며, 때론 이겨가며 종합격투기 혹은 입식타격기가 씨름이나 유도, 권투와 얼마나 다른 경기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거기서 살아남은 몇몇 선수들은 훈련 방법을 깨닫고 훈련 중이지만, 절반 이상은 몸과 마음의 상처만 입은 채 링을 떠나고 있다. 천하의 이태현도 최근 “난생처음 바닥까지 왔구나 하는 심정이었다”고 첫 경기에서의 패배를 기억했다.
윤동식이 후배 김대원과의 연습 경기에서 로킥을 시도하고 있다(위). 윤동식이 스파링에 들어가기 전 주먹에 붕대를 감고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최홍만도 최근 패배 뒤 K-1 쪽의 경고를 들어야 했다. K-1의 다니카와 사다하루 대표가 “최홍만의 실력이 전보다 늘지 않았다”며 “(입식타격기가 아니라) 종합격투기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이다. 2m18cm, 160kg이라는 천부적인 하드웨어로 4년 동안의 격투기 선수 생활을 이어온 최홍만에게는 또 다른 변신이 요구되는 때가 왔다. 지금보다 더 가볍고 빠른 몸놀림을 링 위에서 보여줘야 한다.
이런 흐름에서 다소 예외적인 선수가 바로 재일동포 추성훈이다. 유도 출신임에도 타격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데다 투지도 좋아 한국인 선수 가운데 데니스 강과 함께 가장 정상급에 다가선 것으로 평가받는다. 게다가 방송출연 등으로 탁월한 노래 실력까지 인정받아 자동차와 가전 등 각종 상업광고에도 등장하고 있다. 격투기 인기가 더 이상 폭락하지 않는 방어선 구실을 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경기 상대방을 이길 만한 선수로 고른다는 일부의 비판도 제기된다. 최근 K-1 쪽과의 계약이 끝나 UFC 진출설이 돌지만, 업계에서는 K-1과의 재계약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점친다.
이동기 MBC-ESPN 해설위원은 “우리 선수들은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출전해왔는데, 지금은 그 정리 단계”라고 말했다. 숨고르기 국면이 왔다는 것이다. 이 위원은 “일본만 해도 판크라스, 슈토, 딥 등 중급 대회가 많고 또 거기에 출전하기 위해 하부 리그에서 준비하는 선수들도 수두룩하다”며 그에 비해 취약한 토대 때문에 실전 훈련과 경험을 쌓기 힘든 국내 현실의 아쉬움을 지적했다.
그 사이 엘리트 스포츠 출신은 아니지만 종합격투기 자체를 주종목으로 착실하게 실력을 쌓아온 선수들이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UFC 대회에 나가 2승을 쌓고 내년 2월 세 번째 경기에 나가는 김동현도 원래 유도를 전공하기는 했으나 유명 선수는 아니었다. 그는 국내 격투기 대회인 ‘스피릿MC’에서 뛴 바 있다. 격투기계는 지난 8월 일본 센고쿠 대회에서 세계 정상급의 고미 다카노리(일본)에게 아깝게 판정패한 방승환과, 같은 대회 헤비급 경기에서 애틀랜타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출신 선수를 꺾고 깜짝 승리를 보여준 양동이 등의 선수들을 주목하고 있다. 스타 출신 선수들이 소강 상태를 보이는 가운데 무명의 설움을 딛고 종합격투기를 꾸준히 연마한 선수들은 새싹을 밀어올리고 있는 셈이다.
‘끄∼응’ ‘퍽∼퍽∼퍽’. 지난 12월10일 찾은 서울 강남의 종합격투기 도장 ‘팀태클’. 문을 열자 땀냄새가 코를 콕 찌르는 가운데 윤동식과 그가 만든 격투기팀 ‘팀윤’의 선수 5명이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윤동식은 후배 김대원과 함께 태클 연습에 열중했다. 스피릿MC 헤비급의 김재영은 이를 악물고 역기와 아령을 들었다 놨다 하며 팔 근력을 키웠다. 5분마다 한 번씩 휴식 시간을 알리는 공이 자동으로 울렸다. 1분 뒤 다시 시작 공이 울린다. 그렇게 계속 공은 울려댔고, 선수들은 운동하고 휴식했다. 대개 2·3라운드를 5분씩 운영하는 종합격투기의 리듬에 맞추기 위한 것이다. 글러브를 끼고 나자 타격 훈련이 시작됐다. 처음엔 장난처럼 슬슬 시작한 윤동식과 김대원의 타격 훈련은 갈수록 불이 붙었다. 허벅지를 노리는 로킥 소리가 도장 안을 쩌렁쩌렁 울린다. 한 대 맞으면 꼭 한 대 되돌려주기 위해 두 선수는 치열하게 주먹과 킥을 날렸다.
“처음 링에 올랐을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매트와는 달리 링은 도망갈 곳도 없지, 수많은 관중이 지켜보고 있지. 프라이드 쪽에서 훈련을 따로 체계적으로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요. 다른 운동 경기는 실전 같은 연습을 할 수 있지만, 격투기는 그게 안 돼요. 진짜로 때릴 수가 없잖아요. 결국 실전이더라고요. 5경기 정도 뛰어보니 좀 알겠더라고요.” 지금까지 10경기를 치른 윤동식은 이제 좀 알 것 같다고 했다. 많은 좌절을 겪으며 기량을 발전시켜온 그는 이제 후배들과 함께 운동을 하고 있다. 후배들은 윤동식이 치렀던 시행착오를 어느 정도는 줄인 채 무대에 오르고 있다. 이렇게 훈련한 선수들이 한국 격투기의 숨고르기가 끝날 즈음이면 새로운 물결이 돼 링에 오를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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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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