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격은 복합적 메커니즘의 행위다. 신체의 거의 전부가 사용되고, 결정적 순간 응축된 힘을 폭발시켜야 한다. 그 모든 뒷받침을 하체가 한다. 무너지지 않는 하체가. 정용일 기자
몇 년 전, 손대면 툭 하고 칠 것만 같던 안타를 못 치던 날. 4타수 안타 없음·의미 없음·재미 없음의 ‘3없음의 결과’를 곱씹으며, 서둘러 다음 경기를 위해 더그아웃을 빠져나오던 날. 바로 그날. 굳게 결심했다. 방망이를 사야겠다. 사고야 말겠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이 참혹한 모든 현실의 피폐함, 그게 다 방망이 때문이다.
그 뭐가 있다던데. 스치기만 해도 3유간으로 공을 빼내고, 얼추 갖다 대기만 하면 공을 중견수 앞에 떡하니 떨어뜨려준다던 그런 요술 방망이. 요물. 검색했다. 간드러지는 간증들이 이어졌다. 더 묻고 따질 것도 없다. 단언컨대, 방망이는 가장 완벽한 물질입니다. 사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좀 비쌌다. 사람이 이렇게 계산적 아니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 요물만 있어준다면, 그깟 몇십만원쯤. 지금 통장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이자 할부라는 선진화된 금융제도가 있고 세상사 늘 그렇듯 간절히 기도하면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돈 있다고 잘살고 없다고 나앉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 이 결심을 잊지 말자. 할 수 있다, 아니 살 수 있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그깟 방망이 하나 못 살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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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개의 원대한 포부들이 그러하듯,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 그 무렵 아들이라 쓰고 ‘아드느님’이라고 읽어야 하는 정말 손 많이 가는 혈족이 세상에 출몰했다. 매 순간 먹고, 싸고, 울고 또 울고 또 우는 녀석과 181구를 던졌던 박충식의 사투처럼 싸우고 있는 와이프에게 그 말 한마디를 할 타이밍을 끝내 잡지 못했다. “나 방망이 한 자루만 사면 안 될까.”
그 방망이가 대기를 가르는 순간 내가 맛볼 우주적 쾌감에 대해, 그 방망이의 일점에 회전하는 일구의 일점이 스스로 달려와 부딪히는 신비로운 그 순간 폭발하게 될 직선 에너지의 웅장함에 대해, 말하려고 하면 바로 그 녀석은 왜 그러냐는 듯 사납게 울어댔다. 그렇게 꺾였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아비들이 그러하듯 담담히 받아들였다. 토요일 한나절을 오붓하게 치고 달리는 것에 투자하기 위해 내가 담보할 것이 너무 많아졌다. 혈족의 성장에 도취되며 ‘안타 없음’의 슬픔을 잊었다. 경기를 뛰어야 안타를 칠 기회가 생길 텐데 그마저도 자주 포기했다. 그리고 다시 리그에 복귀했을 때, 방망이는 내 마음처럼 징징징 울어주지 않았다. 133km로 날아오는 공에도 두려움 없이 맞설 수 있을 것 같던 나의 1.3m짜리 공용 팀 방망이는 울돌목에서 침몰한 왜선처럼 자주 쓸데없어졌다.
첫 야구 레슨, 코치님이 물었다. “고민이 무엇인가요?” “공이 뜨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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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내 공은 부양의 힘을 잃었다. 우주의 기운을 모아 진실된 힘으로 휘둘러도 땅볼, 경쾌한 타구음보다 뾰족한 알루미늄 소리에 익숙해졌다. 코치님은 스윙을 해보라 했다. 토스 배팅(Toss batting)을 명했다. 그리고 무릎이 닿기도 전에 진단을 내리셨다. “회원님은 뒷무릎이 완전히 무너지네요. 그러니까 공을 못 띄우죠.” 그랬구나. 무너지고 있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방망이를 탓하고, 세상을 탓하고, 나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구나.
무릎을 세워야 한다. 구부리고 기다리지만, 방망이의 일점이 공의 일점을 가격한 순간부턴 무릎이 바로 서야 한다. 그래야 공도 뜬다. 양준혁 선수가 그렇게 ‘만세’를 해댔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그도 고민하지 않았을까. 나는 왜 이승엽처럼 공을 멀리 띄우지 못하나요. 누군가 그의 무릎을 보며 넌지시 말했을지 모른다. “무릎이요, 무릎을 세우세요. 잘 안 되면 완전히 상체가 들린다는 기분으로.”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새 연재 ‘생존체력記’를 시작합니다. 김완 기자(야구), 김선식 기자(크로스핏), 김지숙 기자(복싱)가 한 주씩 번갈아 체험담을 씁니다.※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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