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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은 친구 동생 앞니로

등록 2009-04-30 17:45 수정 2020-05-03 04:25
불운은 친구 동생 앞니로

불운은 친구 동생 앞니로

누구나 그렇겠지만 불현듯 술 생각이 날 때 연락할 친구가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나에게도 그런 친구들이 있었으니 바로 마군(馬君)과 윤양(尹孃)이다. 대학 1~2학년 때 만난 15년지기 술친구들이다.

하지만 술자리를 자주 함께하면 사고도 공유하는 법. 이 친구들에게도 미안한 일이 많다. 그 가운데서도 잊혀지지 않는 한 사건이 있다. 2003년 또는 2004년의 일이다. 그해 추석 전날 저녁에 만난 우리 셋은 서울 홍익대 인근 맥줏집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친한 술친구라는 것은 얘기가 잘 통하는 사이라는 뜻. 그날도 역시 유쾌하고 흥겨운 얘기들이 오갔다. 밤 12시께는 H대 미대 대학원생이었던 윤양의 여동생과 그의 여성 친구가 술자리에 합류했다. 술자리 평균 연령도 낮아졌겠다, 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어느덧 시간이 꽤 흘렀고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그때만 해도 밤새울 정도의 체력은 됐다). “밤새 마셨는데 차례는 어떻게 지낼지 걱정”이라는 한숨과 함께 술자리가 파할 무렵, 나는 윤양 동생과 게임에 빠져 있었다. 서로 왼손을 악수하듯이 잡고 오른손으로 묵찌빠를 해서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손등을 때리는, 아주 간단한 게임이었다. 꽤 재미있었는지 우리는 술집을 나오는 와중에도 게임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 마지막 몇 판을 연거푸 이긴 나는 장난 삼아 윤양 동생의 손등을 전보다 더욱 세게 때리며 놀려줬다. 약이 오른 윤양 동생은 어떻게든 한판을 이겨 복수하고 싶어했지만, 장난기가 발동한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난 그만 할란다, 흐흐.” 왼손을 갑자기 빼낸 나는 도망가는 시늉을 했다.

“오빠, 그런 게 어디 있어욧!” 윤양 동생이 항의를 하며 나를 붙잡으려 했다. ‘나 잡아봐라~’는 식의 유치찬란한 술래잡기가 시작됐다. 잡힐 듯 말 듯 그렇게 뛰는데, 윤양 동생의 손끝이 내 등을 스치는 게 느껴졌다. 그때 슬쩍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윤양 동생이 나를 잡으려 팔을 내뻗은 상태 그대로 땅바닥에 ‘철퍼덕’ 하고 엎어지는 것이 아닌가. 모두들 깜짝 놀랐다. “언니, 나 너무 아파.” 윤양 동생이 고통을 호소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앞니 한 개가 없는 게 아닌가. 엎어지면서 앞니가 시멘트 바닥에 닿았고 그 충격으로 부러진 것이었다.

‘아, 어떻게 이런 일이….’ 좌절했다. 비록 내가 밀어뜨린 것은 아니었지만, 엄연히 내 책임도 있었다. ‘차라리 내가 다쳤으면….’ ‘지붕에서 떨어지고 담배 간판에 부딪히더니 이제 불운이 전염까지 되는 것인가….’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 친구 마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고로 이빨은 지붕에 던져야지. 까치야 까치야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 부러진 이빨 조각은 그렇게 술집 지붕으로 던져졌다.

결국 이튿날 윤양 동생은 병원에 갔고 임플랜트를 해넣었다. 나의 불운이 옮아가서 멀쩡한 처자의 앞니를 부러뜨린 것 같아 괴로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게다가 ‘밥이라도 자주 사주겠다’는 약속마저도 다른 술자리를 쫓아다니느라 이행하지 못하고 있어 더욱 미안할 따름이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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