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맥이 끊겼다는 말에 좀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며 탄식이 흘러나왔고, 머릿속이 아득해지며 두 눈이 감겼다.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으련만….’ 누운 채 깊은 한숨을 내쉬는데 당직 의사가 나타났다. 착한 인상의 젊은 의사는 이마 왼쪽 관자놀이 근처의 사고 부위를 살피더니 부분 마취를 한 뒤 곧바로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베였네요. 어쩌다 여기를 다치셨어요?”
“사실은 담배 간판에 부딪혔거든요.”
“….”
익숙한 손놀림으로 바느질을 하던 의사가 갑자기 웃음을 참느라 입에 힘을 주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선생님, 끊긴 동맥은 어떻게 연결하죠?”
“연결하는 게 아니고 양쪽을 꽉 묶으면 옆에 있는 핏줄들로 우회해서 통하게 됩니다.”
“그러면 술은 얼마나 오랫동안 못 마시죠?”
“음, 한 일주일 정도는….”
의사가 어이가 없었는지 말끝을 흐리는데, 갑자기 치료실 문이 벌컥 열렸다. K였다. K는 한 손으로 문을 잡고 고개만 쑥 내민 채 갑자기 코맹맹이 소리로 “의사 샌님~, 예쁘게 꿰매주세요~”라는 장난기(?) 가득한 멘트를 날렸다. 다시 ‘쾅’ 하고 문이 닫혔고, 멀쩡한 처자의 이상한 행동에 당황했는지 의사는 문 쪽과 나를 몇 차례 번갈아 쳐다봤다.
어느덧 봉합 수술이 다 끝났고, 간호사가 붕대를 감아줬다. 수술대에서 일어나 제일 먼저 거울을 찾았다. 이마와 관자놀이, 뒤통수를 두껍게 둘러싼 붕대에 밀린 머리털들이 하늘을 향해 삐죽삐죽 솟아 있는 게, 마치 무슨 만화 프로그램에 나오는 배추도사 같았다. 밖에서 수다를 떨며 기다리던 일행들도 웃음으로 나를 맞이했다(수습이 됐으니 다행이라는 뜻의 웃음인지, 배추도사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워 나온 웃음인지, 그때나 지금이나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여하튼, 이들은 나를 둘러싸고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담배 간판을 설치한 편의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자는 둥, 안 그래도 흉악한 얼굴에 흉터까지 생겼으니 성형수술비를 갹출하자는 둥 한참을 논의하더니 “어쨌든 오늘 2차는 예정대로 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날 사고로 참담했던 나는 혼자 집으로 가려고 했지만, 일행들 모두 “자취하는데 혼자 있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하냐”며 극구 만류했다. 결국 우리는 L의 집으로 ‘2차’를 함께 갔고 술상이 차려졌다. “무리하지 말라”며 나를 방 한쪽에 눕힌 일행들은 자기들끼리 와인잔을 부딪쳤다. 그때 누군가 건배사를 했다. “자, 이거 순혁의 피로 생각하고, 건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 얼마나 넉살 좋은 술친구들이란 말인가.
그날 황당한 사고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즐겁게 놀아주던 그들이 오늘따라 참 그립다. 멀리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각자 워낙 바쁘게 사는 관계로 자주 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I선배! L형! K누나! 언제 비 오는 날 그 용산 술집이나 한번 갑시다. 내가 한번 연락할게.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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