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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록 2009-03-27 17:17 수정 2020-05-03 04:25
심야생태보고서- 음주①

심야생태보고서- 음주①

기자들의 밤 이야기, 그 가운데서도 술자리와 관련된 이야기를 칼럼으로 써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문득 예전에 우연히 봤던 글이 생각났다. 6~7년 전 에서 본 소설가 현기영 선생의 칼럼이었다. 잠시 인용해보자.

“나는 술을 즐기는 편이다. 어리석은 생각인지 모르지만, 음주가 나의 건강에 도움을 준다고 여긴다. …내가 지금 이만큼이나 폐활량이 커지고 넉넉해진 것은 술의 조화가 분명하다. 마음의 병이 육체의 병을 초래하거니와, 병들기 쉬운 내 마음을 다스려준 것이 바로 술이라는 묘약이다. …술을 양껏 마신 이튿날이면, 가슴속에 딱딱하게 맺혔던 응어리들이 풀려 심신이 아주 후련해진다. 폭음한 이튿날 찾아오는 속쓰림과 내면이 황폐해진 듯한 우울한 느낌도 나는 좋아한다. 그 우울한 속 쓰라림은 지나친 욕망을 버리라고 나에게 가르친다.”

이 칼럼은 각계 유명 인사들이 돌아가면서 자신만의 건강관리법을 소개한 ‘건강 만들기’라는 코너에 실린 글이었다. 필자마다 매우 독특한 건강비법을 소개해서 그런지 지금도 일부가 기억이 남는다. “따로 운동할 시간이 없기에 아파트 14층에서 걸어서 출퇴근하는 것으로 대신한다”던 황운하 대전중부경찰서장(당시 서울 강남경찰서 형사과장), “아령을 들고 뒷산을 걸으며 아침 식사 전 1ℓ가량의 물을 마신다”던 정동기 민정수석(당시 법무부 보호국장) 등이 대표적이다.

그중에서도 현기영 선생의 글은 신선함을 넘어 충격 그 자체였다. 나름 애주가로 자처하던 나로서도 폭음을 건강비법으로 삼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엔 속쓰림에 전날의 과음을 후회하다가 저녁 땐 새로운 술자리를 찾아가는 ‘술과의 애증관계’ 속에 놓여 있던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삶이었다. 흡사 길을 가던 꼬마가 득도의 경지에 오른 강호의 고수와 맞닥뜨린 듯한 느낌이랄까.

하여튼 그 칼럼을 읽은 뒤로 나는 훨씬 편한 마음으로 술자리를 갖게 됐다. 그전에도 일주일에 4~5일은 술자리에서 밤을 맞았지만, 그 뒤로는 웬지 모를 자신감 같은 것이 생겼다. 술을 상대화하거나 관리 대상으로 삼는 것에서 벗어나 술과 편안하게 혼연일체가 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 섞인 다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술과 혼연일체까지는 쉬웠으나(!) 즐겁기는커녕 온갖 사건·사고가 잇따랐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몸과 마음 모두 피폐해지기 시작했고, 알코올성 치매 초기 증세와 복부 피하지방이 덤으로 따라붙었다. 어느덧 술자리 사고뭉치로 이름을 떨치는 신세까지 됐다.

물론 이런 희생 끝에 남겨진 소소한 것들도 있었으니, 바로 술자리 온갖 사건·사고의 추억들이다. 아픈 상처도 시간이 흐르면 추억이 되듯이, 당시에는 심각했던 사건·사고들도 시간과 함께 발효돼 이제는 에피소드로 남았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들은 이 칼럼을 시작하는 이유가 됐다. 하여 망가진 내 몸의 절반은 현기영 선생의 칼럼 탓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연재될 글들의 절반은 그 칼럼에 빚지고 있다 하겠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 심야생태보고서는 기자들이 주제별로 집필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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