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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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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종말’이 ‘희망의 종말’로

1994년은 미국 절대 패권의 절정기,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된 2014년은 좌파가 ‘로스트 제너레이션’에게 비전을 제시하기에 수월해
등록 2014-03-06 17:38 수정 2020-05-03 04:27

이 창간된 20년 전에 나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에서 가야사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국어 실습을 겸해서 나의 고향에 유학 온 한국인들과 자주 만났는데, 상당 부분은 운동권 출신이고 그중 대다수는 이미 전향한 뒤였다. 그들이 1980년대에 꿈꾸었던 사회주의 본고장 소련이 망가지고 난 뒤 러시아의 처량한 모습은 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한국 국내든 국외든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려는 사람에게는 한 치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경제 호황이 표면적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세계화·국제화’, 즉 하나의 준(準)경제 열강으로서 국제질서에 합류하는 것이 주류의 화제였다. 국외에서는 팍스아메리카나,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미국의 절대 패권이 그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보낸 고문관들이 러시아 ‘경제개혁’(즉, 약탈적 민영화)에 대한 지침을 내리면서 관료들의 복종을 당연시했다. 바로 1994년에 클린턴이 대북 공격을 심각하게 고려했다가 북한 장사정포에 의한 미군의 대량 희생 가능성 때문에 마지막 순간 사실상 한반도를 초토화할 수 있는 전쟁 계획을 번복했다. 그나마 대미 저항력이 잠재적으로 있던 중국·인도·브라질 등의 나라조차도 신자유주의적 질서하에서 대미 마찰을 적극적으로 피하려는 상황이었다. 정말로 미 제국의 권력하에서 ‘역사의 종말’이라도 맞이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패권 약화된 뒤 일부 전략 프로젝트에만 올인

20년이 지난 지금, 팍스아메리카나는 그 화려함을 많이 잃은 듯하다. 20년 전 같으면, 구미 언론들이 ‘불가피한 북한 붕괴’ 못지않게 자주 거론했던 것은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와 같은 친서방 우파 세력(‘민주세력’)의 중국 공산당 타도(‘민주화’) 가능성이었다. ‘중국 공산당 퇴장’의 꿈은 일부 서방 우파 사이에서 지금도 잔존해 중국 자유주의 세력의 우두머리 중 한 명인 류샤오보의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이 꿈이 허망하다는 것을 이제 대부분의 분석가들이 인정한다. 서방식 ‘민주주의’ 유무와 무관하게 중국 공산당은 미국 경제 패권을 잠식할 만큼 국가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생산력을 키웠다. 동시에 제한적이긴 하지만 재분배 정책을 실행해 복지망을 꾸준히 넓혀왔다. 그 복지정책은 약자층에게 태부족하기에, 서방이 바라는 대로 중국에서 자유로운 다당제 선거가 이루어진다면 아마도 류샤오보보다는 좀더 재분배에 적극적인 강경 마오주의자들에게 승산이 있을 것이다.
중국만큼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1994년에 미국의 신식민지가 된 듯한 러시아도 관료자본주의적 질서를 재정비해 적어도 발틱 3국을 제외한 나머지 옛 소련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고수하겠다고 서방에 선언한 셈이다. 물론 이 선언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보듯 미국이 계속해서 러시아의 주변부에서 친미 정권을 수립하려는 노력을 쉬지 않지만, 아직 완전히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다. 2004년 ‘오렌지혁명’ 이후 미국이 우크라이나에서 친미 정권의 공고화에 실패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인데, 그만큼 미국의 패권이 상대적으로 약화됐다. 심각한 장기 침체에 빠진 미국은 이제 군사력 감축 방침을 세우면서 중국에 대한 포위정책(‘동아시아에의 회귀’) 등 일부 전략적 프로젝트에 올인하려는 셈이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국가는, 아무리 힘이 빠졌다 한들 1980년대 초반 이후 미국의 지배층이 앞장서서 추진해온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2008년 위기에 빠졌다 한들 여전히 교체되지 않는다. 2008년 세계공황 시작 이후 각국의 대응 방법은 대체로 1998년 외환위기 때 김대중 정권의 ‘해결법’과 그 궤를 같이해왔다. 금융산업의 과도한 팽창에 의한 은행 부실화 문제를 공적자금을 무제한으로 부어서 해결하는 척하고, 그렇게 해서 생긴 국가 재정위기를 각종 ‘구제금융’으로 해결하는 척하고, ‘구제금융’과 동시에 긴축재정을 도입해 복지망을 최대한 줄이고…. 1998년 이후 한국은 특히 중국 수출 등에 힘입어 위기를 일시적으로 모면할 수라도 있었지만, 위기를 맞은 대다수 국가는- 독일 등 일부를 제외하면- 그렇게 넘어갈 수 없었다.

한편에선 우민의 사회주의, 극우민족주의가

결국 신자유주의를 포기하지 못한 자본의 세계는 지금 끝이 보이지 않는 장기 침체기에 돌입했다. 복지망 붕괴는 다수의 구매력을 떨어뜨리고 내부 시장을 축소시키기 때문에 위기의 장기화와 기존 중산층의 점진적 빈곤화는 불가피하다. 일본·한국·독일 등 주요 제조업 경제들은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와 임금 축소 정책을 펼치며 포화상태의 국제시장에서 출혈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 궁극적 결과는 다수의 빈곤화일 것이다. 1994년의 ‘역사의 종말’은 로스트 제너레이션(잃어버린 세대)이 되는 다수의 중하층·하류층 젊은이들에게는 2014년 ‘희망의 종말’로 변해간다.
계급 모순의 심화가 계급투쟁의 격화로 이어진다는 것은 옛날 소련 사학의 상투어였다. 아쉽게도 이 말은 부분적으로만 맞다. 즉,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지식층의 상당 부분이 적극 참여하거나 적어도 소극적으로 긍정하는 계급조직이 위력적으로 작동하는 경우에만 그렇다. 예를 들어 지식인의 상당 부분은 전통적으로 좌파적 지향이 강하고, 노조와 좌파 정당의 영향력이 상당한 남유럽 일부와 남미의 다수 나라에서 급진좌파의 부흥으로 이어지긴 했다. 베네수엘라는 제한적으로나마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으며, 그리스에서 불만 계층의 대다수는 극우파(‘황금의 새벽’ 같은 파시스트 조직)가 아닌 급진좌파를 선택한다.
하지만 스탈린주의적 구좌파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전투적 저항을 해본 적이 없는 옛 동구권에서는 상황이 훨씬 더 열악하다. 2006년 헝가리에서 극우파 주도의 폭동이나 오늘날 우크라이나 사태가 보여주듯, 좌파가 조직하지 못하는 불만 대중은 쉽게 ‘우민의 사회주의’라고 19세기 말에 명명됐던 극단적 민족주의로 단결돼버리고 만다. 동유럽에서 극우민족주의가 하는 역할을, 중동에서는 종교근본주의가 맡는다. 최근 몇 년 동안 중동 국가들에서 불만 대중의 격렬한 가두운동이 있어왔지만, 대부분 종교근본주의자들이 궁극적으로 그 주도권을 탈취하는 데 성공해왔다. 극우민족주의나 종교근본주의가 주류적 정치세력이 될 수 없는 중국의 경우에는 공산당 안팎의 급진좌파는 아직도 독자적으로 세력화하지 못하고 국가자본주의적 개발정책의 가시적 성공에 압도당하고 있다.

멸망한 듯 보였던 공룡의 반격

궁극적으로는 종교도 ‘민족’의 유령도 중국 공산당식의 ‘좌파적 개발주의’도 신자유주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기에 급진좌파가 새롭게 부상할 가능성은 객관적으로 충분하다. 문제는 좌파가 스스로를 사상·조직상 재구성해 다시 한번 오늘에 맞는 비전을 로스트 제너레이션에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주관적 조건들이다. 사회주의가 과거에 스스로 멸망한 공룡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입체적으로, 구체적 정책을 통해 보여줘야 한다는 것은 팍스아메리카나와 신자유주의 위기의 시대, 그리고 대중의 불만이 격렬해지는 시대에 좌파의 급선무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전성기인 1994년보다 그 위기가 심화돼가는 2014년에 이 과제를 해결하는 것은 더 수월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는 제326호(2000년 9월21일치)에 ‘북유럽 탐험’으로 에 데뷔했습니다. 한국을 떠나 노르웨이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한 것이 연재 계기였습니다. 하지만 노르웨이에서도 그의 시선은 한국에 박혀 있었습니다. 칼럼은 유유자적한 꼭지명을 버리고 ‘세계와 한국’으로 바뀌었고(2004년 3월4일치 제498호까지), 연재는 ‘박노자의 동아시아 근현대 탐험(제500호~제680호),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제683호~제773호), ‘박노자의 국가의 살인(제777호~제850호 2011년 3월4일치)까지 쉬지 않는 열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도 혜안이 필요할 때 은 자주 박 교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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