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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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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진 곳, 유명자를 잊지 마시라

아직도 끝나지 않고 7년째 이어지고 있는 재능교육 지부장의 투쟁
등록 2014-03-14 14:38 수정 2020-05-03 04:27
서울시청 환구단 앞 재능교육 농성장은 파라솔에 비닐을 둘러 겨우 바람을 막고 있다. 7년째 길거리 농성장을 지키는 유명자 전 지부장(왼쪽), 강종숙 전 위원장(오른쪽)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박승화

서울시청 환구단 앞 재능교육 농성장은 파라솔에 비닐을 둘러 겨우 바람을 막고 있다. 7년째 길거리 농성장을 지키는 유명자 전 지부장(왼쪽), 강종숙 전 위원장(오른쪽)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박승화

2011년 11월, 한 일간지에 썼던 칼럼의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한진중공업 노사 간 합의 소식을 듣고, 단체협약 회복과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1419일째 노숙농성 중인 재능교육 유명자 지부장을 찾았다. ‘아, 그 곱던 얼굴이…’ 내 말에 ‘그렇지요? 제가 본래 좀 예뻤지요?’라고 재치 있게 받는다. 그러한 여유가 그이를 1400일이 넘는 거리농성을 견디게 했을 것이다.”

‘해결함’과 ‘마련함’ 사이

유명자 지부장의 그 거리농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벌써 7년째다. 길거리 농성천막에서 보낸 추석 연휴, 설 연휴가 여섯 번이나 된다는 뜻이다. 겨울 끝자락을 못내 아쉬워하는 꽃샘추위가 마지막 위세를 떨치던 지난 3월5일, 서울시청 앞 환구단 재능교육 농성장을 지키는 강종숙 위원장, 유명자 지부장을 찾아갔다. 매서운 칼바람이 농성장에 세워둔 ‘거리농성 2267일’ 엑스배너 현수막의 목덜미를 잡아채 사정없이 땅바닥에 내팽개쳐버렸다. 말이 쉬워서 2267일이지… 그동안 쌓인 사연들이 소설책 수십 권 분량은 충분히 되고도 남을 것이다.

두 사람을 여전히 ‘위원장’ ‘지부장’이라고 부르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번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던 사람에게는 노동자들이 존경의 뜻을 담아 영원히 ‘위원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듯, 두 사람을 계속 ‘위원장’ ‘지부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다.

강종숙씨는 재능교육 교사는 아니다. 학습지노조 위원장으로서 재능교육지부 투쟁을 함께했을 뿐이다. 지난해 말, 유명자 지부장을 위해 마련한 송년모임에서도 그는 “저는 재능교육 소속이 아닙니다. 경쟁회사 업계 1위 ‘눈높이’ 대교 학습지 교사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을 정도로 사람들은 그를 곧잘 재능교육 교사로 오해한다. 그만큼 열심히 했다는 뜻이다.

천막 설치가 불법이라고 계속 철거해대는 바람에 파라솔에 비닐을 둘러 겨우 바람을 막고 있었다. 파라솔도 지지대를 사용해 곧게 세우면 ‘위법’이라고 해서, 눕혀진 파라솔의 반대쪽만 겨우 가린 형국이다. “그래도 대문이 있다”면서 한쪽 입구를 가렸던 피켓을 열어준다. 철거하면 다시 치고, 철거하면 다시 치기를 7년째 계속하고 있다. 비바람 속에 플라스틱 의자만 달랑 갖다놓고 농성장을 지킨 적도 여러 번이다.

지난 2월26일 열린 민주노총 서비스연맹의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진풍경이 벌어졌다. 2013년 사업을 평가하면서 재능교육지부의 투쟁 내용 중, 그동안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주요 요구사항이던 단체협약의 원상회복과 해고자 전원 복직에 대해 ‘해결 기반을 마련함’이라고 표현된 문구를 ‘해결함’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이 있어 받아들여진 것이다. ‘해결 기반을 마련함’이라는 표현을 굳이 ‘해결함’으로 바꿔야 한다고 예민하게 반응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두 명 이상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

재능지부가 지금처럼 소수의 조합원들만 남아 7년이나 되는 장기 농성 투쟁을 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2007년 단체협상 과정에서 당시 이현숙 지부장이 이끄는 집행부가 회사가 요구한 수수료 제도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그 합의안은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불과 4표 차이로 가결됐다. 대리투표 등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 무렵 다른 학습지 회사들도 비슷한 수수료 제도를 도입하려고 했지만 대부분 현장 교사들의 반발로 실패하거나 유보됐다. 당시 분위기를 유명자 지부장은 “노동조합이 현장 교사들을 사지로 내몬 꼴”이라고 표현했다.

이후 많은 교사가 회사를 떠났다. 2007년 6천여 명이던 재능교육 교사 노동자 수는 한 해 만에 4500여 명으로 줄었다. 결국 재능교육노조 조합원들은 새 지도부를 구성해 2007년 말부터 단체협약 원상회복을 위한 농성투쟁에 나섰다. 그 투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합원 수는 계속 줄어들어 2010년에는 11명만 남았고 결국 모두 해고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재능교육 투쟁은 “단체협약 원상회복, 해고자 전원 복직” 이 두 가지의 요구사항이 “변할 수 없는 원칙”으로 자리잡았다.

잠깐 곁길로 빠져보자. 지난 학기 중간시험에서 대학생들에게 ‘노동조합의 생성 과정과 미래 사회 노동조합의 전망에 대해 설명하라’는 문제를 냈더니, 한 학생이 답안을 이렇게 시작했다. “두 명 이상 있는 어느 단체에나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많이 웃었지만 차마 부인할 수 없는, 일리 있는 주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물며 7년 동안이나 싸운 노동자들 사이에 어찌 갈등이 없으랴.

2013년 2월6일, 재능교육의 두 조합원이 서울 혜화동성당 종탑에 올라가 농성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유명자 지부장에게 “사전에 합의된 투쟁 전술이냐?”고 물었고, 유명자 지부장은 아니라고 했다. 이때부터 재능교육 투쟁은 혜화동 종탑 농성과 서울시청 앞 환구단 농성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오죽하면 투쟁 2천 일 기념 집회를 종탑과 환구단에서 따로 열어야 했을까?

그 무렵 종탑 농성을 지지하는 박일환 시인이 환구단 농성을 지지하는 나를 겨냥해 글을 하나 썼다. 점잖은 문체지만 노회한 시인답게 ‘명망가라는 덫’이라는 제목부터 맘먹고 상대방 가슴에 비수를 꽂는 내용이었다. 나는 유명자 지부장에게 “과거 5년 투쟁하는 동안 박일환 시인이 재능교육 투쟁에 얼마나 참여했느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라고 했다. 나는 이것이 중요한 차이라고 생각한다. 종탑 투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비로소 재능교육 투쟁에 결합한 사람들에게는 종탑에까지 올라가 고생하는 노동자들을 선뜻 지지하지 않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둘도 없는 ‘악인’처럼 보였을 것이다.

2013년 8월26일 종탑 투쟁은 회사와 합의안을 타결하고 끝났다. 당사자들은 ‘단체협약 원상회복’이라 주장했고 언론도 그렇게 표현했지만 “합의안을 들여다보면 결코 ‘원상회복’이라 할 수 없고 그 정도 수준의 합의안이었다면 몇 년 동안 이렇게 싸울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 유명자 지부장의 주장이다. 그래서 유명자는 이 싸움을 멈출 수 없다고 했다.

다시 혜화동 본사 앞으로

유명자 지부장에게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싸우는 이유가 뭐냐?”고 상투적인 질문을 했다. “기본을 지킨 것밖에 없어요. 그래서 인터넷 아이디도 ‘답게살자(dobgesalja)’예요”라며 수줍게 웃는다. 기본을 지키기 위해, 인간답게 살기 위해 길바닥에서 7년을 싸워야 하는 세상이다. 이튿날 세 사람은 시청 앞 환구단 농성장을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으로 옮겼다. 너무 외진 곳이라 시청 앞으로 옮긴 게 4년쯤 전인데, 다시 외진 곳으로 갔다. 잊지 말아주시기를….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2001년 6월29일 제365호부터 2004년 2월26일 제498호까지 꼬박 2년8개월을 썼습니다. 시작은 ‘휴먼포엠’이었는데 곧 ‘진짜 노동자’로 바뀌었습니다. 2년8개월을 썼다고 마지막 글에도 나오는데, 전화 통화에서 그는 “2년6개월 정도 썼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은 보통 부풀리게 마련인데 하종강 선생은 기억도 겸손합니다. 마지막 글에서 그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이 이런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 우리 사회의 모순된 억압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 사람, 운동권 내에서조차 중심에 우뚝 서 있지 않은 사람….” 우리는 하종강이 그런 사람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반론문]
창간 20돌 기념 특대 1호(제1002호)에 실린 ‘리바이벌21’ 중 ‘하종강의 진짜 노동자’ 일부 내용에 대해 박일환 시인이 사실과 다르다며 반론 성격의 글을 보내왔다. _편집자  
하종강 선생께  
1년 전 페이스북에 잠시, 정확히 말하면 밤 1시쯤에 올리고 새벽 5시쯤에 지운 제 글이 무척 가슴 아팠던 모양입니다. 그때 선생께서 ‘고맙습니다’라고 댓글을 남기셨지요. 고언이 충분히 전달된 거 같아 바로 글을 내리고, 누군가 다른 사이트에 퍼나른 걸 담당자와 통화를 해가며 지웠습니다. 선생께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고, 자칫 소모적인 논란으로 번질까 우려를 했던 거지요.
그 무렵 재능 노조원들은 환구단과 종탑으로 갈려 있었고, 선생께선 종탑 농성자들을 비난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습니다. 글이 지워져서 원문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지만 제가 기억하기로는 종탑 농성자들이 나중에 정치판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을 거라고 했지요. 그 짧은 글이 당사자들에게 얼마나 가슴 아픈 비수로 날아가 꽂혔을까요? 당사자들의 해명 요구에 선생은 나중에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지면 그때 가서 사과하겠다고 하셨지요. 선생께서 종탑 농성자들을 모리배 집단 정도로 여길 만한 무언가가 있었을 겁니다. 다만 누구든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밝혀야 하는 건 상식이고, 나름대로 영향력을 갖고 계신 분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노동가수 김성만씨가 환구단과 종탑으로 갈라진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선생께 양쪽 입장을 들어보는 공개토론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선생의 답변은 역시 싸늘했고, 그런 논란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선생께 드리는 글을 썼습니다.
선생은 다수 조합원이 유명자라는 헌신적인 운동가를 소수로 만들어 핍박하고 있으며, 자신을 공개적인 자리에 불러내 망신을 주려는 것으로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종탑 농성자들을 설득하거나 최소한 자신의 입장을 담은 글이라도 내놨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선생께서 종탑 농성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악인으로 만들고 있다고 하셨는데, 선생께서 거꾸로 종탑 농성자들을 악인으로 만들고 계시지는 않았나요?
유명자씨가 저를 전혀 모르며, 그게 중요한 차이라고 하셨지요? 맞습니다. 저는 유명자씨와 한 번도 대화를 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환구단 앞 1200일 투쟁 문화제 때 연대시를 낭송했고, 연대 발언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걸 알아달라는 게 아닙니다. 저는 성격이 소심해서 남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탓에 낯선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잘 맺지 못합니다. 이런 말을 늘어놓는 제 자신이 한없이 비참해지고 있습니다. 종탑 농성이 알려진 뒤에 합류한 사람들이 그전의 과정을 모른 채 환구단을 배제하고 있다는 식의 발언은 무책임합니다. 저는 선생께 글을 올리기 전 며칠간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양쪽 입장을 최대한 알아봤습니다. 선생은 충분히 유명자씨를 옹호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상대방을 슬프게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졸지에 제가 ‘노회한 시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노회하다’를 사전에서 찾으면 ‘경험이 많고 교활하다’라고 나옵니다. 선생께서 ‘노회하다’의 뜻을 모르고 쓰셨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알면서 썼다면 저는 어째야 하는 걸까요?
주어진 지면이 너무 짧아 하고 싶은 말이 넘치는데 수습이 되질 않는군요. 부디 건승하시라는 마무리 인사도 허언이 될 것 같아 삼갑니다. 이 글 역시 교활하게 비쳐졌다면 제 그릇이 그 정도일 테니, 그냥 쓴웃음으로 넘기십시오.
박일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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