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그곳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남해의 푸른 물빛과 흩어진 섬들의 곡선과 붉게 피어난 동백의 단호한 낙하 같은 것들을 직접 감각해봤다면, 이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의 심성을 짐작하는 데 좀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라는 후회가 들었다. 물메기탕의 시원함도 맛봤다면 좋았을 듯싶다. 이런 바다의 향취와는 당최 인연이 없는 도시 대전에서 인권운동을 하는 이상재(42)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의 고향은 뜻밖에 그곳, 통영이다.
가난했고 가난하기 때문에
대전. 그곳은 내 고향이다. 하지만 25년 전 서울로 떠나온 나와 21년 동안 대전에 살고 있는 그 중에서 지금 누가 ‘대전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이상재 국장이라고 해야 맞겠다. 내 머릿속 지도에서는 이미 가물가물한 서대전사거리 근처에 그의 사무실이 있다. 통영 출신인 그가 대전에서 대학을 다니고, 취직을 하고, 시민운동에 뛰어든 내력이 궁금했는데, 이야기를 듣다보니 좀 서글퍼졌다.
그를 대전에 데려온 건 가난이라고 해야겠다. 학비·생활비를 대주며 대학에 보내기가 버거운 집안 형편 탓에 대전에 사는 이모님 집에 의탁해야 했다. 밤이나 새벽에 아파트 세차, 물류회사 배송, 우유 배달 등을 하며 등록금을 벌었다. ‘낮에는’ 학생운동을 했다. 데모를 실컷 하면서도 집에서 등록금이나 용돈을 받아쓰는 친구들이 제일 부러웠다. 그래서 학생운동도 더 독하게 했다.
그러던 대학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것도 가난 때문이었다. 장례를 마치고 여동생이 다니던 학교에 찾아가 ‘산업체 학교’로 옮겨야겠다고 이야기했다. 여동생은 부산에 있는 방직공장에서 3교대로 일하며 고등학교를 다녔다. 전학가던 날, 옷가방 하나만 들고 학교 기숙사 정문을 들어서는 여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빠는 많이 울었다. 최근 일어난 ‘세 모녀의 비극’ 같은 사건이 그에겐 가장 가슴 아픈 뉴스다.
‘생계유지 곤란’ 사유로 병역을 면제받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가난은 끈질기게 그의 발목을 잡았다. 등록금은 절반도 마련하기 힘들었다. 휴학도 하고 급기야 자퇴까지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선배들의 도움으로 복적해 졸업하고 첫 직장을 잡은 게 2000년이었다. 한창 경기가 좋던 제약회사에 영업사원으로 들어갔으니 생계 걱정은 드디어 벗어나는 듯했다.
하지만 가난이 그의 가슴에 새겨놓은 신념은 좀체 떠나지 않았다. 가난이 사람들에게 지우는 짐을 덜어내는 것은 개인이 아닌 사회의 책무라는 신념. 4년 만에, 그는 적당히 때를 묻혀야 하는 영업 업무와 적당한 선을 넘겨 때를 묻힌 직장 선배들에게 미련 없이 작별을 고했다. 시민단체 활동가가 됐다.
후원금 중 얼마를 월급으로 할 것인가서울.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서울이란 곳은 시민운동이나 인권운동마저도 ‘독점’하고 있다. 지역에는 장애인·여성 등 특화된 영역의 인권을 옹호하는 단체는 있어도, 검찰·경찰·군대·교도소 등 권력기관 감시와 시민인권 교육 등을 담당하며 오롯이 ‘인권단체’로 자리매김한 비정부기구(NGO)는 드물다.
지역에서 시민운동을 하던 이상재 국장은 2008년 처음 서울과 인연을 맺었다. 그때 인권과의 만남도 이뤄졌다. 성공회대 NGO대학원에 다니면서다. 조효제 교수의 수업은 인권 문제를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였고, 그가 새로운 결단을 하는 계기가 됐다. 바로 ‘지역에 뿌리박은 인권운동’이다.
다시 대전. 혼자서 인권단체를 만들어보겠다고 했을 때 아내는 반대했다. 지역에 연고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혼자서 단체를 꾸려나가겠다는 것인지, 그게 과연 가능은 한 것인지 의아해했다. 이 국장은 연애할 때처럼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다. 새로운 시민단체의 전형을 만들어보고 싶다. 명망가나 전문직 인사들을 내세우지 않고, 재정은 철저히 후원회원을 통해 해결하고, 정부 지원은 어떤 형태든 받지 않겠다. 무엇보다 ‘사람을 억누르는 부자유와 억압을 없앨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게 지역에서도 필요하다. 그리고 ‘세 자릿수’ 월급은 받을 수 있다. 제약회사를 그만둘 때처럼, 아내는 ‘쿨하게’ 받아들였다. 아내는 한번 결정한 뒤에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좀처럼 후회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신기한 재주를 지녔다.
2년 전, 그렇게 ‘1인 NGO’ 대전충남인권연대는 지역 인터넷 언론사 사무실에서 책상 하나를 얻어 시작했다. 이제 ‘이론’이 ‘현실’의 벽에 부딪힐 차례였다. 좀처럼 전범을 찾을 수 없는 길을 용감하게 나섰으니 길을 열어나가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활동 구상을 하고 함께할 운영위원·후원회원을 모으고 재정 문제를 처리하는 일들을 모두 혼자 하다보니, 그는 ‘다중이’가 되어갔다. 잠자리에 누워 온갖 고민을 되뇌면서 중얼중얼하곤 했다. 심지어 후원금 가운데 얼마를 자신의 월급으로 할 것인지까지 모든 기준을 스스로, 또한 적절히 정해나가는 일은 고독할 뿐 아니라 힘겨운 일이기도 할 터다.(궁금해하는 이들을 위해 밝혀두자면, 이 국장이 책정한 자신의 월급은 130만원, 올해 3인 가구 기준 최저생계비는 132만9118원이다.)
이 국장은 그걸 잘 견뎌냈다. 조금씩 보답이 왔다. 벌집을 짓듯이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며 회원이 220여 명까지 늘었다. 무엇보다 권리를 침해당한 이들이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러 찾아올 때가 기뻤다. 최근에는 보험사 남성 직원이 교통사고를 당한 여성의 민감한 상처 부위를 촬영한 사건을 공론화해 보험사 쪽의 사과와 인권교육 약속을 받아냈다. 전국적인 주목을 끄는 사건들은 아니지만, 감춰졌던 인권침해 사안을 드러내고 이를 개선할 통로를 열어준다는 건 지역 인권운동 단체의 필요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외로운 섬들이 모여 다도해 이룬학생들의 자살이 잇따랐던 카이스트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인권학교도 열었다. 강좌마다 50~70명씩 찾아와 경청하는 모습을 보며, 인권이란 주제에 목말라하는 이가 많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지역의 인권 제도를 구축하는 데도 진전을 이뤘다. 다른 시민단체와 함께 국가인권위원회 대전사무소 개설을 추동해 올해 7월 개소를 앞두고 있다. 대전시와 충청남도의 인권조례에 내실을 기하는 후속 작업도 진행 중이다.
이제 겨우 창립 2년을 맞았으니, 앞으로 또 어떤 도전과 성취가 전개될지는 알 수 없다. 이 국장 말대로, 인권운동은 어떤 권리를 얻기 위해 투쟁하고 그것을 쟁취한 이후에 또 다른 권리 문제가 생겨나고 그것을 위해 또다시 투쟁해야 하는 생명체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인권이란 문제의 변화무쌍함, 정해지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인권운동의 운명이야말로 고난이자 매력이라고 이 국장은 말한다. 그건 그가 살아온 내력과도 상통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몇 번의 선택 지점을 거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무슨 운명의 여신이 자석처럼 이끌어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곤 합니다.”
다시 통영. 연대도, 비진도, 한산도, 연화도, 욕지도…. 외로운 섬들이 모여 아름다운 다도해를 이룬 그곳. 그 풍경을 활자화하면 ‘연대’(連帶)라는 단어가 되지 않을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각 지역에서 자리를 지키며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 이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풍경이 그런 게 아닐까. 전국 각지에 그런 섬들이 흩뿌려져 있으니, 대전에 가면 통영 연대도를 빼닮은 섬 하나가 선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전 편집장· 사회부장 piao@hani.co.kr* 박용현 기자는 31살 청년이었습니다. 1998년 사회팀 기자로 와서 1999년(제284호 11월25일치)부터 2000년(제307호 5월11일치)까지 6개월간 매주 사람을 만나 ‘인물탐험’을 썼습니다. 그만둔 것은 인사 발령으로 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10년이 된 2008년 ‘편집장’을 붙이고 로 다시 옵니다. 그 설렘은 이렇습니다. “‘그’가 그리웠다. 10년 동안. 1998년 봄, 기자로 왔을 때 ‘그’의 앞에 처음 선 서른 즈음 총각은 발그레 얼굴을 붉혔던 기억이 난다.” 최장기 편집장(제703호~제854호)이 되었습니다. 장장 3년입니다. ‘만리재에서’ 마지막 글은 이랬습니다. “152권째, 마지막 연애편지를 바칩니다. 힘겨웠지만 가슴 뛰었던 사랑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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