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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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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한 짝짓기

저마다의 ‘서바이벌 키트’
등록 2014-03-12 15:12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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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부른데도 더 먹거나 번식과 무관한 교미를 하는 동물은 지구상에 인간밖에 없다. 최근 안철수 세력과 민주당의 신당 창당 발표를 놓고 “저급한 짝짓기”라 비판한 새누리당 대변인의 대변을 보며 진지하게 ‘고급한 짝짓기’를 생각해봤다.

모두를 두루 만족시키는 거? 세상에 그런 짝짓기가 어디 있나. 번식을 목적으로 하는 거? 지금 하려는 게 그거잖아. 어떻게든 새끼 까고 살아보겠다는. 기실 민망한 것은, 누가 봐도 하룻밤 응응응 할 방 예약해논 건데 마치 백년해로할 것처럼 구는 것이다. 일찍이 과장·확대·반복이라는 포르노의 3공식이 창궐한 정치권에서 기승전‘섹’이야 대단한 일이 아니나, 발표를 한 분들조차 그리 설레고 흥분한 표정이 아닌 것이 한 분은 사탕 뺏긴 아이 같고 다른 한 분은 얼빠진 할배 같았다. 어떤 표정과 절차를 거쳤어야 고급한 짝짓기가 됐을까.

이번 창당 발표는 단순 번식을 향한 욕망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갈망에 더 가까운 듯하다. 후자라면 혹한에 맞서 홀딱 벗은 몸을 서로 비비거나 망망대해 쪽배 위에서 상대의 배설물을 받아먹는 것도 감수할 일이다. 그런데 그럴 ‘가망’이 별로 안 보인다. 먹을 만큼 먹고도 내 밥그릇 뺏길까봐 눈 부라리는 저들이나 발단과 동시에 결말을 내놓고는 대하드라마 찍는 것처럼 제작발표회 하는 그들이나, 인간… 맞구나.

한 시절, 욕망의 ‘까리뽕삼’한 실현을 위해 손석희도 아닌 주제에 ‘한발 더 들어가는’ 칼럼을 쓰고자 노력했으나, 어느덧 생존이 더 큰 화두인 시대로 넘어와버렸네. 이거 참. 물론 세상은 계속 후끈하다. ‘잠 안 재우는 연하남, 뭐 먹나 봤더니’(초콜릿), ‘남편 몰래… 충격적인 아내들의 비밀’(경품 응모)류의 낚시질도 여전하다. 미니홈피가 페북으로, 메신저가 카톡으로 무한 확장하면서 공중을 떠다니는 정보량과 속도는 몇 년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성애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선남선녀들을 썸남썸녀로 만들다 출연자 자살이라는 비극을 낳은 방송 프로그램 이 이를 설명해준다. 다른 ‘선택지’가 없는 극단적 환경에 갇혀버린 탓이다. 보여지고 골라지지 않으면 패배자가 되니, 오로지 ‘썸을 타는 것’만이 목적이자 수단이다. 이런 강퍅하고 빈곤한 성애라니. 그 어디서든 젖과 꿀은 겉으로만 흐른다. 그거라도 핥아야 살 수 있을 지경으로, 저마다의 ‘서바이벌 키트’가 절실한 나날인데 말이다.

내 서바이벌 키트의 첫째 목록은 욕망을 잘 실현하는 게 아니라 잘 관리하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7살 이하, 70살 이상만 나를 쳐다보는데(아, 저주받은 747),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섹시를 끊을 순 없잖아. 덕분에 역지사지도 된다. 이민호나 김수현을 (화면에서) 혼자 실컷 만나고 돌아온 뒤, 노곤히 코 고는 파트너를 보고 “뭐지? 이 오징어는?” 화들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던가(걔들 엄마가 설령 내 동창이라도 이해해줄 것이다). 물론 다음 같은 경우는 곤란하다. 40대 며느리가 혼자 된 70대 시아버지에게 “어디 좋은 분 좀 알아볼까요?” 물었다가 “음, 딱 네 나이 정도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몸둘 바 몰랐다는데. 딱한 할배, 도파민의 원활한 분비를 위해서라도 ‘자기 객관화’는 필요하다. 그래야 갈 수 있는 길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호그와트 마법학교 교장 선생님도 말씀하셨다. “진정한 참모습은 능력이 아니라 선택을 통해 드러난다”고.

김소희 시민* 호시절 자타 공인 ‘밤의 편집장’으로 틈틈이 지면을 달궜으나, 지금은 만두가게 아저씨와 문방구 사장님을 힐끗거리며 현모양처를 장래희망으로 살고 있는 전 기자, 라고 글쓴이는 글의 말미에 붙여 보냈습니다. ‘오마이섹스’라는 인터넷 검색이 안 되는 유일무이한 칼럼은 등장하자마자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아들과 함께 보는데 정기구독을 끊겠다는 전화가 사무실로 걸려오고, 친구들과 이것만은 꼭 돌려본다 하고, ‘존경합니다’라고 말하는 전자우편이 도착하고, 타사의 칼럼에 인용되고. 아직도 회자되는 칼럼이 이렇게 오래전에 연재됐다니 깜짝 놀랄 겁니다. 제563호(2005년 6월14일치)에 시작해 1년간 격주로 연재됐고(2006년 6월13일치 제613호), 1년 뒤 다시 돌아왔다가 또 1년 연재됐습니다(2007년 6월22일 제665호~2008년 4월4일 제7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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