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멤놀’이란 게 있다. ‘멤버놀이’의 줄임말인데 인터넷 채팅방에서 회원들이 아이돌 캐릭터를 한 명씩 맡아서 역할놀이하는 것을 일컫는다. 내가 에이핑크 손나은이면 너는 미쓰에이 수지, 내가 엑소 시우민이면 너는 카이 같은 식으로 말이다. ‘빙의’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오갈 정도로 한국 아이돌 문화에서 이와 같은 동일시 메커니즘은 전례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멤놀이 시작된 건 ‘아이돌 공화국’이 한창이던 2000년대 중·후반. 이제는 멤놀 커뮤니티 사이트만 해도 1천여 개, 회원 수는 10만여 명에 달한다. 게다가 카카오톡·라인 등 스마트폰 메신저로 무대가 확장되면서 멤놀의 일상화 현상마저 일어나고 있다. 유비쿼터스 시대를 맞아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아이돌 역할놀이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재료만 있으면 그들은 어떻게든 문화를 만든다.
자기들끼리 사는 세상, 이 세계에 들어서는 통과의례를 보통 ‘임관’이라 한다. 아이돌 캐릭터를 담당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임관한 캐릭터를 ‘낯’이라 하고 때로는 다른 임관으로 ‘외도’를 하기도 한다. 단, 이때 다른 멤놀인과 캐릭터가 겹치면 안 된다. 행여나 남의 역할을 빼앗아 ‘도금’(도용금지) 규칙을 어기면 강퇴는 당연한 일이다. 채팅방에서 나갈 때도 ‘자아’(자진아웃)라고 명기해서 ‘멤놀팸(패밀리)’에 혼란을 끼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아이돌 역할놀이가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으레 그렇듯 어른들은 그들의 창조성에 주목하기보다는 비난을 일삼는다. 자기가 아이돌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에 빠져 살다니! 잘 시간에 잠은 안 자고 충혈된 눈으로 스마트폰이나 보고 있다니! 수업 시간에 집중은 안 하고 멤놀에 빠져 면학 분위기를 해치다니! 또래들과 어울릴 생각은 안 하고 가상공간에 빠져 따돌림을 자초하다니! 그마저도 그 세계에서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면 또 한 번 따돌림을 당하다니!
그러나 대다수 멤놀인들은 이런 시각에 반대한다. 혈기 넘치던 시절을 ‘흑역사’로 간직한 채 ‘멤접’(멤놀을 접음)을 했더라도 마찬가지다. 이 칼럼을 통해 누누이 강조했듯이 대다수 청소년 문제(?)는 알려진 것에 비해 그리 심각하지 않다. 혹시 멤놀을 하더라도 어른들 언어처럼 ‘빠져’ 있는 게 아니라 ‘즐기고’ 있는 쪽에 가깝고, 그들은 나름대로 사회적 평형감각을 유지하며 분별력 있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멤놀 하는 10대가 다른 또래나 어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잔뜩 겁먹은 채 매가리 없이 살기보다는 문화적 에너지로서 잉여력(?)이 더 충만할 뿐이다.
순전히 내 관심사에서 보자면,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멤놀이 소셜미디어 시대에 맞춰 앞선 시기의 팬픽이나 동인녀 문화를 계승한다는 점에 있다. 동인녀 문화가 이성애적 관계를 교란시키고 자신들 고유의 섹슈얼리티를 구성하듯이, 멤놀 문화 역시 나름대로 수위를 조절하면서 ‘장미’(남남커플), ‘백합’(여여커플), ‘해바라기’(남녀커플)같이 다양한 성적 관계를 실험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멤놀 텍스트들은 지극히 즉흥적이며 집단적인 창작물이라는 점일 것이다. 여전히 어떤 어른들은 멤놀 하는 10대를 보고 닮고 싶은 인물이 없어 아이돌 행세나 하냐며 혀를 찰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정말 모른다. 아이돌 흉내가 문제이기 전에, 오늘날 10대에게 닮고 싶은 어른이 없다는 사실이 더 문제라는 사실을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10대는 문화를 창조하고 어른들은 길들이지 못해 안달이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10대 청소년의 하위문화를 본격적으로 분석한 ‘김성윤의 18 세상’은 제854호 ‘여기는 청소년 노스페이스 공화국’(2011년 4월1일)부터 제899호(2012년 2월27일)까지 연재됐습니다. 최근 꼭지명 제목 그대로 책으로 출판됐습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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