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거대한 절망’을 예견하다

정부도 파악하지 못한 금융위기의 징후 경고한 <한겨레21>… 한국 사회 덮친 절망에서 우린 탈출했나
등록 2013-10-22 15:36 수정 2020-05-03 04:27

“필자가 1990년대 중반 이후 관찰하기로는 금융 부문과 관련하여 경고 신호를 가장 지속적으로 보낸 대중매체는 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우리 사회의 어떤 미디어나 경제학자, 사회과학자도 만큼 나름대로의 성실성과 국가의 장래에 책임성을 갖지 못했다는 점은 별로 항변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 점은 이후 학계에서 보다 냉정하게 평가해야 마땅하다.” 사회학자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냉정한 평가’( 120쪽)다.

재벌·외채·금융 통해 분석

1997년 12월3일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오른쪽)가 정부중앙 청사에서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 기금(IMF) 총재와 구제금융 양해 각서를 체결한 뒤 악수하고 있다.

1997년 12월3일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오른쪽)가 정부중앙 청사에서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 기금(IMF) 총재와 구제금융 양해 각서를 체결한 뒤 악수하고 있다.

1997년은 세기말의 거대한 절망이 한국 사회를 덮친 해였다. ‘오직 성장’만을 외치며 질주하던 한국으로선 경험해본 적 없는 종류의 절망이었다. 한 해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란 모르핀을 스스로의 팔뚝에 놓았던 ‘자아도취적 성공’의 실체가 뿌리째 까발려지는 절망이었다. 군부독재를 종식시킨 첫 정부의 탄생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의 절망을 희석시키진 못했다.

은 엄습해오는 절망에 누구보다 예민했다. 정부도 파악하지 못한 징후를 예견했고, 위기를 진단했으며, 파국을 경고했다. 1995~96년 재벌·외채·금융을 통해 절망의 싹을 집요하게 분석해온 은 새해가 밝자마자 ‘대한민국이 절망스럽다’(제141호)는 제목의 표지이야기를 내보냈다. 그리고 물었다. “한국은 지금 총체적 으로 망가져가고 있다. 21세기에 과연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절망의 핵심 원인은 ‘절망의 정치’였다. 은 양해각서 체결 직후 ‘청와대·재경원 차기 정권에 경제파탄 떠넘기려 했다’(12월18일 발행 제187호)는 특종 기사를 내보낸다. 한국은행이 11월6일 한국 경제의 파탄을 막으려면 IMF에 구제금융을 시급히 요청해야 한다는 긴급보고서를 청와대와 재정경제원에 제출했으나 강경식 부총리와 청와대 경제수석실이 대통령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11월10일 홍재형 부총리와의 통화 이전까지 외환위기의 심각성조차 모르고 있었다. 보고서가 나온 11월6일부터 정부가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한 11월21일 사이에 국내 금융시장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악화됐다. 외환보유고도 70억달러 밑으로 추락했다. ‘고통은 언제나 국민의 몫’(제185호)이었고, 결과는 ‘해고천국’(제186호)이었다.

1996년 12월26일 새벽 신한국당의 노동법 날치기가 밝힌 새해는 김영삼 ‘문민독재’의 조종(제142호)을 울리며 ‘파리목숨들’의 거센 저항을 불렀다. 재계 서열 14위였던 한보그룹의 부도와 정치권을 잇는 검은 커넥션의 몸체가 ‘소통령’ 김현철이란 사실도 드러났다. 은 창간호 특집 기사(‘김현철은 새 정부 최후의 성역인가’)의 ‘예언’이 현실화되는 사태를 지켜봐야 했다.

시대를 넘나드는 기시감

거대한 절망은 ‘거대한 전환’을 낳았다. 신자유주의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영역을 지배했고,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짐승의 논리가 인간의 비인간화를 추동했다. 민주화 투쟁의 핏값이 탄생시킨 ‘1987년 체제’는 신생의 ‘1997년 체제’에 짓눌려 질식했다.

2013년 은 다시 묻는다. 우리는 절망에서 탈출했는가. 답은 ‘시대를 넘나드는 기시감’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안기부 권한을 강화하는 안기부법 개정 파문(‘누가 공룡 안기부를 원하는가’, 1월9일 발행 제140호)은 17년이 지난 지금 국정원의 정치 개입 사태로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조합원 공개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합법화 투쟁을 전개했던 ‘비합’ 전교조(‘참교육 재도전’, 2월27일 발행 제146호)는 박근혜 정부의 법외노조화 추진이란 ‘시대의 역류’에 휩쓸려 요동치고 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