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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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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반갑기는 처음이네요

혜화동성당 종탑에서 온 편지
등록 2013-07-23 14:53 수정 2020-05-03 04:27
서울 재능교육 본사 맞은쪽 혜화동성당 종탑 위에서 농성 중인 여민희 편집위원과 오수영 편집위원이 에 하늘 편지를 띄웁니다. 뜨거운 더위보다 쏟아지는 장맛비가 차라리 반갑다는 두 사람은 천둥과 번개의 위험 속에서 167일째(7월22일 기준)를 견디고 있습니다.
성당 종탑에서 장맛비를 맞으며 고공농성 중인 오수영(아래)·여민희 편집위원이 텐트를 덮은 방수용 비닐을 점검하고 있다.난간이 낮은 종탑 가장자리가 아슬아슬하다.재능교육 노조 제공

성당 종탑에서 장맛비를 맞으며 고공농성 중인 오수영(아래)·여민희 편집위원이 텐트를 덮은 방수용 비닐을 점검하고 있다.난간이 낮은 종탑 가장자리가 아슬아슬하다.재능교육 노조 제공

뜨거운 거에 비하면 비 오는 종탑은 천국입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샤워할까 농담하며 웃습니다
8월 폭염•태풍은 사람 힘으로 어쩔 수 없기에 두렵습니다.

비둘기가 살던 혜화동성당 종탑에 산 지 6개월이 다 되어갑니다. 영하 20℃ 혹한의 추위에 올라왔기에 승리와 함께 봄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5월 어린이날에는 9살 난 아들 채운이에게 선물을 안겨주고 함께 놀이공원에 가고 싶었습니다. 여름방학 전에 내려가 함께 물놀이도 하고 여행도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승리하지 못했기에 여전히 종탑에 삽니다. 재능교육 본사(서울 종로구 혜화동) 앞 농성장에서 손을 흔들고 물총싸움을 하는 채운이를 망원경을 보며 눈으로 쫓아다닙니다.

6월 종탑은 달궈진 프라이팬같았습니다. 3인용 텐트 안에서 앞뒤로 들어오는 태양을 피해 자리를 옮겨다닙니다. 동료와 함께 있다는 것이 불편하고 사소한 일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민희와 저는 가운데 그은 금을 넘으면 지우개를 빼앗는 초등학생이 된 심정으로 자리다툼을 합니다. 태양과 더위는 피부에 약한 화상을 입혔고, 두통과 어지럼증을 안겨줬습니다. 앉아 있는 시간보다 누워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장마가 시작된다는 일기예보가 반갑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비닐덮개를 준비하고 비를 기다렸지만 장마전선은 중부지방으로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던 비는 7월이 되어서야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뜨거운 것에 비하면 비가 오는 종탑은 천국입니다. 폭우를 맞으며 문화제를 하다보면 비옷 속으로 비가 스며들어 온몸이 젖습니다. 어차피 젖은 몸 비닐 위에 고인 물로 물장구를 치기도 하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샤워를 할까 빨래를 할까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습니다. 아래에서 지켜보는 분들은 이런 저희를 보며 ‘어서 텐트 안으로 들어가라’고 아우성입니다.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치는 날이면 마음이 콩닥거려서 쉽게 잠이 들지 않습니다. 번개가 우리 머리 위에 떨어질까,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처럼 멀리 날아가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 몰려옵니다. 난간도 없는 2평 남짓한 종탑 위에서 텐트 위에 비닐을 덮으려고 움직이다보면 섬뜩한 기운이 등을 타고 내려옵니다.

6월 태양과 7월 장맛비를 잘 견뎌낸 서로의 몸에게 우리는 ‘참 장하다’고 칭찬해줍니다. 하지만 8월 폭염과 태풍을 이겨낼 수 있을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두렵습니다.

우리는 1999년 노동조합을 만들고 긴 시간 동안 재능교육 사쪽의 노조탄압에 맞서며 버텨왔습니다. 학습지 교사는 노동자라고 목이 터져라 외쳐왔습니다. 하지만 자본도, 국회도, 법원도 우리 편이 아니었습니다. 긴병에 장사 없듯 3800명의 조합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제 11명의 해고 조합원들이 단체협약 원상회복과 해고자 전원 복직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습니다. 지난 2월 종탑에 올라온 이후 회사는 당장 문제 해결에 나설 것처럼 언론에 밝혔지만, 종탑에 올라온 뒤 70여 일 만에야 교섭이 시작됐고 쟁점이 되는 단체협약은 아직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종탑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저녁 문화제 때마다 오늘은 누가 올까 마음을 졸입니다. 9살 채운이도 이제 엄마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6개월 동안 하루도 편한 잠을 자지 못한 우리 조합원들은 종탑농성 200일 투쟁을 준비하며 다시 마음을 다잡습니다. 우리의 투쟁은 단지 12명 조합원의 원직 복직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장맛비에 엉덩이까지 젖어드는 비를 맞으며 무거운 가방과 가짜 회원 회비에 마음까지 젖어버린 학습지 교사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기 위한 투쟁입니다. 노동자이면서 노동자로서 아무런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사회에서 배제돼버린 특수고용노동자들과 함께하는 투쟁입니다.

이제 우린 폭염과 태풍을 버텨낼 준비를 하고, 재능교육이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결코 안 될 투쟁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늦은 장마로 뜨겁지 않은 종탑의 7월, 이 비가 그치고 7월도 가면 성당 뒤 학교 운동장에서 뛰놀던 아이들도 집에 돌아가고 폭염과 태풍이 오겠지요. 두려워하면서도 종탑에 남아 있는 건 아직 오지 않은 사람과 희망을 기다리기 위해서입니다.

오수영 재능교육 해고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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