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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의사는 ‘슈퍼맨’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본다면 누구도 쉽게 토를 달지 못할 말이다. 지난해 OECD가 내놓은 ‘보건자료’를 보면, 한국 의사 1명이 한 해 동안 보는 평균 진료 건수는 7251건으로 OECD 평균(2543건)의 3배였다. 환자들도 만만찮았다. 한국인들은 OECD 회원 국민 평균(한 해 6.4회)의 2배 이상 병원을 드나든다. 어찌 보면 한국에서 환자들은 병원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의사들은 부지런히 치료하는 듯하다. 그럴까. OECD는 지난 2월에 낸 ‘한국 의료의 질 검토 보고서’에서 한국의 동네 병원 시스템을 두고 “통탄할 정도로 후진적”이라고 손가락질했다. 도대체 우리 동네 의원의 풍경은 왜 이렇게 극단적이고 부산스러울까. 왜 이렇게 한심한 평가를 받을까. 병원 현장에서 그 영문을 알아보기로 했다. 동네 의원 여러 곳을 수소문했다. 많은 병원에서 손사래를 쳤다. 경기도 안양에서 작은 내과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송종원 원장. 지난 5월8일, 꼬박 하루를 그와 함께 보냈다.
수천만원 기계…“환자 상태 궁금한 게 더 크죠”
아침부터 환자는 북적였다. 아침 9시에 문을 열자마자 어느새 환자 5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개원의가 한파를 맞고 있다지만 지역에서 뿌리내린 병원은 다른 듯했다. “대부분 단순한 감기 환자거나 고혈압·당뇨 등 만성질환을 가진 환자들이에요.” 3평 남짓한 진찰실에서 송 원장이 말했다. 환자는 꼬리를 물었다. 한 명의 환자가 나간 문은, 다른 환자가 열고 들어왔다.
아침 9시45분, 새치름한 인상의 30대 여성이 들어섰다. 윗입술에 염증이 있었다. 염증 부위를 살피던 송 원장이 말했다. “바이러스성 염증인 것 같네요. 바르는 약을 처방해드릴게요.” 환자가 바로 말을 받았다. “먹는 약으로 주세요. 바르는 약은 잘 안 듣는 것 같아요.” “네, 그러시죠.”
환자가 나간 뒤, 송 원장에게 물었다. “헤르페스 바이러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대체로 낫죠. 항바이러스제를 지어주는 게 항상 답은 아니에요. 상태가 심각하거나 재발이 계속되면 약을 먹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환자는 증상이 심각하지 않아 보여요. 그런데 환자들에게 모두 일일이 설명할 틈이 없습니다. 기다리는 환자들 생각하면 마음이 아무래도 급하죠. 게다가 한참 설명해줘도 자신과 맞지 않다 싶으면 그냥 다른 병원으로 가버리기도 해요. 환자는 약을 먹어야 낫는다고 생각하니까요.”
오전 9시55분께, 60대와 30대의 모녀가 송 원장 앞에 앉았다. 어머니는 위와 갑상선에 두루 문제가 있었다. 당 수치도 높았다. 그는 위와 장의 내시경을 받고, 초음파 검사도 받을 참이었다. 초음파 검사실에서는 아이 키만 한 기계에 버튼만 수십 개가 복잡하게 도열하고 있었다. 환자의 목 주변 조직을 드러내는 흑백 화면이 모니터에서 흘렀다. “갑상선에 결절이 몇 개 보이네요. 악성일 가능성은 크지 않고요. 1년 뒤 추적 검사를 하시면 될 것 같네요.” 환자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암으로 변할까 겁나요….” “아직까지는 괜찮으신 것으로 보여요.” 중년의 의사는 이모뻘 환자를 다독여줬다. “아직까지는 양성으로 보여요. 그러니 조직검사는 하지 말고 1년 정도 상태를 지켜보시죠.”
병원에는 초음파 검사기와 내시경 검사 기구가 갖춰져 있었다. 모두 수천만원대의 비싼 기기들이었다. 송 원장이 말했다. “유혹을 느끼죠. 장비 가격이 비싸니, 더 자주 사용해야겠죠. 그래야 수입이 늘어나니까. 하지만 환자의 상태를 보면 이게 뭘까 궁금한 게 더 큽니다. 문진으로는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기 힘드니까. 예컨대 궤양이든 위장 장애든 겉으로 보이는 증상은 비슷합니다. 정확한 판단을 위해 검사를 하고 싶죠. 그러니 환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 보는 환자에게 무턱대고 검사부터 하자고 하면 싫어하겠죠.” 바로 검사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환자가 음식을 토하거나 체중이 줄어들고 혹은 잘 때까지 통증을 느끼면 ‘이거 뭔가 문제가 있구나’ 싶다. 물론 의사마다 기준이 다르려니 한다. 의사마다 그 판단 속에 ‘수지타산’이 머릿속을 휘어잡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일종의 표준 같은, 진료 지침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냥 낫는다고 감기 환자를 돌려보내야 하나
널을 뛰는 ‘내시경값’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였다. “수면내시경은 비급여입니다.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지요. 그러니 병원마다 가격이 다릅니다. 대학병원은 똑같은 내시경이라도 10만원 정도 받아요. 동네 병원은 4만원 정도 받습니다. 병원마다 천차만별입니다. 환자 처지에서는 똑같은 검사인데 말이지요.” 비싸다고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오전 11시께 찾아온 70대 노인은 병원에 오기 전에 아예 고려대병원을 예약하고 왔다. 심방세동. 심방이 정상적으로 뛰지 않는 증상이었다. 환자는 “큰 병원에서는 의견서를 받아오라고 하더라고요”라고 의사에게 말했다. 의사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다. 환자가 나간 뒤 의사가 말했다. “저 환자분은 실제로 3차 병원에 의뢰할 필요가 있는 분이에요. 의뢰서를 써드려야지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오자마자 의뢰서부터 써달라는 경우도 있죠.” 동네 의원을 믿지 못하는 부류일 터였다. 어떻게 할까? “그런 분들은 말로 설명해도 설득이 안 됩니다. 그냥 써드리는 수밖에요.”
병원의 점심 시간은 오후 1시부터다. 환자를 보다 보니 1시20분이 훌쩍 넘었다. 송 원장과 점심을 먹었다. 40분은 여유 있게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수제비를 건지며 그가 말했다. “사실 감기 환자는 병원에 올 필요가 없습니다. 거의 그냥 낫습니다. 약은 안 먹을수록 좋아요. 그런데 환자들은 약을 원합니다. 강한 약을 원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병원에 대한 기대가 다른 거지요. 그런 환자를 그냥 돌려보낼 수 있을까요? 환자들 처지에서는 당장 몸이 안 좋고 아프니까 찾아왔는데 그냥 가라고 하면 납득하기 어렵지요. 그러니 환자와 의사 사이에 신뢰가 중요한 것이지요. 환자가 의사를 믿으면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어요.”
오후 2시를 넘어 20대 남성이 찾아왔다. “이게 제 목소리가 아니에요. 자고 일어나니 목이 아파요. 목소리도 달라졌어요.” 콧물, 재채기는 없었다. “혹시 최근에 목을 많이 쓴 일이 있나요?” “며칠 전 축구를 하다가 소리를 질렀어요.” “약을 먹는다고 좋아지는 게 아니에요. 큰 이상은 없으니까 일단 그냥 두고 보지요.” 약 없이 두고 보자는 말이었다. 남자는 쑥스러운 듯이 일어났다. 송 원장이 간호사에게 메모를 남겼다. 환자에게 진찰비를 받지 말라는 말이었다. “옛날에 이런 분들한테 진찰비를 청구했다가, ‘약도 안 주는데 돈을 왜 내느냐’라는 말도 들었어요. 그러니 아예 돈을 받지 않는 게 서로 속 편하죠.”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동네 의원에서 초진은 환자 본인 부담액이 3800원, 공단 부담액이 9090원이다. 그러니까 병원 수입은 1만2890원이다. 환자에게 돈을 받지 않아도 공단에서는 환자의 진찰 기록만 보고 9090원을 보내오는 수가 있다. 그런데 만약 병원에서 환자에게 돈을 받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면 골치 아파진다. 병원이 무료로 환자를 유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법에서는 무료로 환자를 유인하는 행위는 불법이다. 한 치과 네트워크병원에서 무료 스케일링을 해준다며 환자를 유치했다가 불법 시비에 시달리기도 했다.
감기라고 하는 축농증·천식 환자
40대의 남자 환자가 송 원장과 마주 앉았다. “말하는 직업인데 편도선이 자주 부어요. 환절기마다 감기에 걸립니다. 수술을 받고 싶어요.” 환자의 증상 몇 가지를 확인한 송 원장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위층에 이비인후과가 있어요. 그쪽으로 가시는 게 더 나을 겁니다.” 환자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나갔다. 송 원장이 말했다. “증상만으로는 물론 판단하기 힘들어요. 편도염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심한 경우에는 수술을 해야 하지만 일단은 지켜보자고 하고 싶네요. 그런데 저렇게 환자 본인이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오면 대하기가 힘듭니다. 이비인후과에서 이런 경험이 더 많을 테니 그리로 돌린 거죠.”
하루가 점점 기울어갔다. 환자들이 오가는 사이, 시침도 바닥으로 늘어졌다. 30대 여성이 찾아왔다. “감기에 걸린 지 2~3주 됐어요. 기침하면 머리가 아프고 토할 것 같아요. 코가 가래처럼 나오고요.” “일단 항생제를 써야겠네요.” 환자가 나가자 의사가 입을 열었다. “저분은 감기가 아닐 가능성이 높아요. 축농증이나 천식이 있을 것 같아요. 물론 문진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죠. 저런 환자가 오면 눈치를 보게 됩니다. 본인이 이미 감기라고 설명을 했으니, 처음 보는 의사가 그게 아니라고 하면 납득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저녁 6시가 넘었다. 40대의 건장한 남성이 의사와 마주했다. 고혈압이 문제였다. 중국에 한동안 들어간다는 그는 다른 병원에서 받아온 처방전을 내밀었다. 그대로 지어달라는 말이었다. 처음 오는 환자였다. “3개월 넘게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약이 필요합니다.” 처방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송 원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생각에는 약을 줄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젊은 분이 혈액순환제까지 드실 필요는 없습니다.” 환자의 표정에서 의문과 불만이 언뜻 스치는 듯했다. 그는 곧 별말 없이 진찰실을 나갔다. 송 원장이 말했다. “가장 힘든 유형입니다. 처음 보는 환자한테 장기 처방을 해줘야 하죠. 과거와 지금의 상태를 함께 보고 판단해야 하는데, 지금 상황만 보고 결정을 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저 환자분이 먹는 약은 제 기준에는 맞지 않습니다. 약을 네 가지나 드시는데, 과도하다고 봅니다. 이런 경우는 그냥 지나치기 힘들죠. 그런데 환자들은 먹던 약을 바꾸라면 싫어합니다. 참 난감하죠.”
처음 보는 환자가 3개월 장기처방 요구
이날 병원을 찾은 환자는 72명이었다. 이 가운데 흔히 감기로 일컬어지는 ‘상기도감염’ 환자는 27명이었고, 만성질환인 고혈압이나 당뇨병 환자는 29명이었다. 그 밖에 질환을 가진 환자는 16명 정도였다. 사람마다 의사에 대한 기대가 달랐다. 누구는 너무 믿었고, 누구는 가볍게 불신했다. 착실한 동네 병원이 뿌리내리기 힘든데다, 건강 교육도 부실한 우리 사회에서 환자들에게 의사는 제각각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듯했다. 의사는 사기꾼이었고, 구멍가게 주인이었고, 점쟁이였고, 무당이었고, 성직자였고, 가끔 ‘의사 선생님’이었다. 뛰어난 의사라도 가지각색의 기대 속에서는 곡예를 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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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기태 기자 kkt@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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