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천의대 길병원, 국내 5위 초대형 병원”(2011년 10월11일)
“서울서 여섯째 규모 이화의료원, 2016년 마곡지구에 들어선다”(2012년 1월3일)
“고대구로병원, 1600병상 빅5 병원 규모로 시동”(2012년 3월6일)
“전남대병원, 전문센터 내세우며 빅5 병원 도약 꿈”(2012년 3월23일)
“중앙대, 인천에 1000병상 이상 대형 병원 건립 계획”(2012년 5월3일)
“한양대병원, 1000병상으로 늘려 삼성서울병원 등과 경쟁 계획”(2012년 5월4일)
이쯤 되면 전쟁이다.
병원들이 앞다퉈 몸집 부풀리기에 나서고 있다. 모두 ‘빅5’로 도약하거나 근접하겠다는 구상이다. 물론 빅5란 서울대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서울성모병원이다. 1990년대 이후 의료시장에서 ‘과점적’ 입지를 다진 병원들이다. 5곳에 이어 후발주자들까지 일제히 물량 경쟁에 뛰어드는 상황을 두고 일부 전문가들은 ‘의료계 군비경쟁’(Medical Arms Race)이라 부른다.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벌어진 군비경쟁에 빗댄 말이다(상자 기사 참고). 사람을 살리는 의료 현장이 어쩌다 전쟁터로 돌변했을까? 사연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0% vs 6%, 끝없는 재벌 병원의 증식
1990년을 전후해 두 재벌이 나란히 의료시장에 뛰어들었다. 현대그룹이 1989년, 삼성은 1994년 서울 강남에 대형 병원을 지어 혜성과 같이 등장했다. 특히 삼성은 이른바 ‘기다림, 보호자, 뒷돈’이 없다는 ‘3무(無) 경영’을 내세우며 의료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두 병원은 불과 10여 년 사이에 100살이 넘는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시작했다. 물론 막대한 자본력이 자양분이 됐다. 서울 송파구 강변에 터를 잡은 서울아산병원은 병상 2000개를 넘게 갖춘 국내 최대 병원으로 순식간에 성장했다.
2000년대 들어 한동안 잠잠하던 병원업계는 2005년부터 다시 변화를 겪는다. 빅5는 암센터, 심장병센터 등을 지으며 다시 규모 경쟁에 나섰다. 병원들의 자체 통계와 업계 자료를 종합하면, 2005~2011년 다섯 병원은 병상을 2112개 늘렸다. 빅5의 병상을 합하면, 지난해 기준으로 1만 병상(9839병상)에 육박한다. 불과 5년 사이에 병상이 30%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빅5의 약진은 다른 대형 병원들의 성장세와도 대조된다. 같은 기간 빅5를 제외한 나머지 39개 상급종합병원들이 늘린 병상은 모두 합해야 고작 1666개뿐이다. 증가율로 치면 6%다. 빅5와 다른 병원들의 격차가 그만큼 벌어졌다. 서울삼성병원(689병상), 서울아산병원(540병상) 두 재벌 병원이 병상 수 확장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선두 주자들의 확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 단지에는 지난해부터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2014년에는 15층 규모의 암전문병원이 들어설 예정이다. 서울대병원도 서울 대학로의 옛 한국국제협력단(KOICA) 터에 심장뇌혈관병원을 짓고 있다. 지난 5월16일 시작된 공사는 2014년에 마무리된다. 삼성서울병원도 2015년 완공을 목표로 국제병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에 병상이 부족해서일까. 딱히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다. 지난해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낸 보고서 ‘병상자원 관리방안’을 보면, 2009년 우리나라 병상은 이미 포화상태를 넘어섰다. 우리나라 전국 병상 수는 33만개로 적정 규모(29만2600병상)보다 많다. 지금부터 지어지는 모든 병상은 사실상 ‘잉여’인 셈이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지금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2020년에는 병상 수가 55만5천 개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병원의 침대가 늘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소비자가 걱정할 일은 아닌 듯도 하다. 상식적으로 보면, 시장에서 공급자 사이에 경쟁이 치열하면 가격은 내려가고 서비스는 나아진다. 나쁘지 않다. 그런데 의료시장에서는 그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대학생들이 흔히 보는 교과서를 펼치면, 이런 대목이 있다. 조금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면 이렇다. “소비자의 무지는 의사가 의료 수요를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보건의료 부문에서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법칙이 적용되기도 한다. 보건의료는 도덕적 해이가 수요자뿐 아니라 공급자에 의해서도 발생하는 특이한 분야다.” 조금 더 쉽게 풀어보자. 보건의료계에서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병원이 지어지면 입원실은 차게 마련이다.” 진찰실을 찾아온 환자를 입원시킬지 말지 결정하는 이는 의사다. 입원실이 비어 있다면 상업적인 이해 때문에라도 의사는 환자를 입원하도록 ‘유인’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의사 마음이다. 물론,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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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최다 로봇 수술 기기 보유국
1963년 케네스 애로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경제학)는 라는 학술지에 역사적인 논문을 실었다. 이 논문으로 보건경제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생겨났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논문에서 보건경제 분야의 여러 특징을 들었는데, 그 가운데 두가지가 흥미롭다. 첫째, 의사의 전문적 판단에 따라 공급이 결정된다. 둘째, 가격경쟁이 상대적으로 결여된다.
의료 분야의 공급에 관한 학술적 분석은 한국의 병원 현실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한국에서 병원이 필요 이상 지어져도, 시장 원리에 따라 병원이 문을 닫거나 가격이 떨어질 여지가 적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금껏 어느 대형 병원도 ‘염가’나 ‘저가’ 등을 내세워 마케팅을 하지 않았다. 소비자 처지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늘어난 병원에서, 필요 이상의 의료서비스를 받고, 필요 이상의 돈을 낼 여지도 커졌다. 병원들의 외형 경쟁이 환자들에겐 반갑지 않은 이유다.
대형 병원 사이의 경쟁은 이미 상업화로 이어졌다.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병원들은 더 많은 환자를 유치해 더 큰 수익을 올리는 수밖에 없다. 고가의 장비를 동원한 비싼 수술은 ‘생존’을 위한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2005년 국내에 도입돼 지금껏 논란을 낳고 있는 ‘다빈치 로봇 수술’이 대표적인 예다. 로봇 수술이란 의사의 손 대신 로봇이 환자의 배 속에 들어가 수술 부위를 절제·봉합하는 등의 시술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빈치는 브랜드 이름이다. 2005년 세브란스병원에서 처음 도입한 이래, 로봇 수술은 마법의 시술인 양 주목받았다. 신기술이 없는 병원은 구식 취급을 받았다. 30억원이 넘는 고가의 장비를 대형 병원들은 앞다퉈 사들였다. 2010년까지 우리나라는 33대나 수입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다빈치 로봇 수술 기기를 갖춘 나라다.
고가의 기기는 짭짤한 벌이도 보장해줬다. 시술 한 건에 1천만원을 훌쩍 넘기도 했다. 일반 수술의 6~10배 가격이었다. 병원에서는 기계의 ‘원가’를 회수하기 위해서라도 환자들을 로봇 수술로 유인했다. 2010년까지 수술 건수가 7천 건이 넘었다는 추정치도 나왔다. 그렇지만 시술의 효과에 대해서는 종종 물음표가 뒤따랐다. 상관은 없었다. 병원은 적잖은 수입과 최첨단의 이미지까지 덤으로 가지게 됐다. 후발 병원들은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비싼 기계를 샀다.
로봇 수술의 아버지, 양심 고백하다
거품은 2010년 12월에 터졌다. 한국에 로봇 수술을 처음 도입한 양승철 연세대 비뇨기과학교실 교수가 나섰다. 그는 당시 한 토론회에서 “환자에게 일반 수술을 하면 ‘피가 철철 난다’ 등 잘못된 정보를 주면서 로봇 수술로 강요하는 경우를 봤다. 솔직히 로봇 수술로 돈벌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로봇 수술을 들여온 장본인으로서 국민에게 무엇을 한 것인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했다. 의학과 과학의 잘못된 만남이 ‘돈벌이’로 전락한 것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었다.
지난해 6월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은 국내·외 연구를 분석한 결과, 다빈치 로봇 수술이 장기생존율이나 재발률, 합병증 발생률 등에서 일반 개복 수술에 비해 효과가 낫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만 일부 질환에서 출혈량이 적고 입원 기간이 짧다는 단서는 달렸다. 지난해 탤런트 박주아씨가 다빈치 로봇 수술에 따른 합병증으로 사망했다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병원들의 상술과 맞물린 로봇 수술의 ‘광풍’은 그렇게 잦아들었다.
환자에게 필요 이상으로 다빈치 로봇 수술을 권한 사람은 장사꾼도 아니고, 업자도 아니었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맞는 의사들이었다. 의사들은 어떻게 상업화의 전선에까지 나서게 됐을까. 진찰실에서 감지되는 변화는 서글프다. 한 사립대 교수의 이야기다. “병원에서는 해마다 과에 매출 상승 목표치를 적어 내라고 한다. 최소한 10% 이상 적어 내야 한다. 그걸 달성해야 한다. 옛날에는 사람을 잘 고치는 의사가 훌륭한 의사였다. 이제는 돈 잘 버는 의사가 훌륭한 의사다. 10년 전부터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과거에 수익은 병원장이나 신경 쓰는 거였다. 이제는 모든 교수가 매출과 실적에 쫓긴다. 1년에 서너 번씩 개인별·과별 매출 실적이 통보된다. 그에 따라 승진이나 평가도 달라진다. 어떤 교수도 자유롭지 않다.”
다른 수도권 사립대 교수의 증언도 다르지 않다. “우리 병원은 그나마 덜 상업화하는 축이다. 그렇지만 병원에서는 매출 실적을 정기적으로 교수들에게 알린다. 그걸 보고 다른 대학, 다른 과와 경쟁하도록 한다. 주변 동료 교수들과도 경쟁하게 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평가가 채찍이라면, 인센티브는 당근이다. 매출의 일정 부분을 교수들에게 떼어준다. 인센티브가 없는 대학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한다. 의료 상업화 현장에서 의대 교수들은 매출에 쫓기는 ‘영업맨’으로 위축됐다. 의대 교수들이 상대적으로 윤리적인 의료 행위를 할 것이라는 일반의 기대는 어쩌면 조금씩 접는 게 나을지 모른다.
탐욕이 낳은 낭비로 파괴되는 의료 생태계
거대 병원들이 돈벌이에 매달리자 의료의 ‘생태계’도 교란되고 있다. 의료전달 체계에서 대형 병원은 보통 1·2차 의료기관에서 다루지 못한 중증·희귀성 질환을 다루는 역할을 맡는다. 2011년 3월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의료기관 기능재정립 기본계획’을 보면, 동네 병원은 가벼운 질환을 가진 외래 환자를 주로 맡고, 거대 병원들은 중증 입원 환자를 맡도록 돼 있다.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거대 병원이 굳이 감기 같은 경증 질환 환자를 맡는 것은 오히려 사회적인 낭비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거대 병원의 탐욕이 거대한 ‘낭비’를 낳고 있다. 최영희 민주통합당 의원실을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를 넘겨받았다. 통계를 보면, 전국 44개 대형 병원의 외래 내원 일수는 2007~2011년 45%나 증가한 반면, 동네 의원은 10%만 늘었다. 큰 병원들은 입원 환자도 더 많이 유치했다. 같은 기간 거대 병원의 입원 일수가 19% 증가한 사이, 동네 의원의 입원 일수는 5% 늘었을 뿐이다.
거대 병원들의 횡포 속에서 작은 병원들은 고사하는 분위기다. 대한병원협회를 자료를 보면, 2010년 한 해 동안 100병상 미만 규모의 작은 병원은 9곳 가운데 1곳이 문을 닫았지만, 300병상 이상 대형 병원은 280곳 가운데 5곳(1.8%)만 문을 닫았다. ‘빈익빈 부익부’는 ‘빈익사 부익생’으로 이어졌다.
대형 병원도 처지가 같지는 않았다. 빅5와 나머지 39개 대형 병원 사이에도 격차는 컸다. 최영희 의원실에서 받은 자료를 분석해보면, 2007~2011년 빅5의 외래 내원 일수는 44%나 늘었다. ‘나머지’는 같은 기간 28%만 증가했다. 특히 빅5는 경증 외래 환자까지 빨아들였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비교적 가벼운 질환을 대상으로 ‘약국 본인부담 차등제’를 실시하고 있다. 쉽게 말해, 감기 등 가벼운 질환을 가진 환자가 큰 병원에 와서 진단을 받으면 약국에서 돈을 내도록 하는 제도다. 경증 환자를 작은 병원으로 돌리려는 유인책이었다.
그래도 빅5의 위력은 여전했다. 2007~2011년 빅5의 경증 외래 환자의 내원 일수는 26%나 증가했다. 나머지 39개 대형 병원의 경증 외래 환자 내원 일수가 30% 가까이 준 것과 대조적이다. 같은 기간 동네 의원을 찾은 경증 환자 내원 일수 증가율(22%)보다도 높았다. 병원들의 맏형 격인 빅5가 가장 작은 막내동생들의 밥그릇까지 빼앗는 격이었다. 빅5의 횡포가 작은 병원만 다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벼운 질환으로 빅5를 찾은 환자들은 더 많은 의료비를 부담한다는 뜻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보건자료 2011’을 보면, 우리나라 국민이 2000~2009년 외래 진료에 지출하는 액수가 해마다 7.9%씩 늘었다. OECD 회원국 평균(3.4%)의 2배가 넘었다.
“건강보험, 의료체계 전반 수술해야”
빅5가 주도하는 물량 경쟁을 바라보는 정부는 무기력하다. 지난 1990대 초반 병상 설립을 제한하는 규제를 폐지해 재벌 병원들이 주도하는 물량 경쟁의 길을 터줬다. 정부는 급격하게 대형 병원으로 무게중심이 쏠리는 것을 막으려고 지난해부터 ‘약국 본인부담 차등제’ 등을 도입했다. 그나마도 부분적인 성과만을 거두고 있는 실정이다. 의료계 일각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병상 경쟁이라도 막으려면 ‘병상총량제’라도 도입하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일정 권역 내에 지을 수 있는 병상의 총량을 정해서 규제하자는 안이다.
한두 건의 정책만으로는 폭발하는 의료시장을 제어하기 힘들다는 의견도 있다. 박형근 제주대 의대 교수는 “환자들은 의료기관에 대한 신뢰 없이 병원의 규모와 명성만으로 의료기관을 선택하고, 병원은 외형 경쟁에만 몰두하는 기형적인 상황이다. 의료시장에서 공급량의 무한 증가를 막으려면 건강보험 체계와 서비스 공급 체계를 함께, 새롭게 개편해야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워낙 의료계의 병이 깊으니, 처방도 간단하지 않다. 우리 병원들, 심하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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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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