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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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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21] 한국 의료 공공성에 대한 배신

재벌병원과 경쟁하며 탈선한 서울대학교병원, 정부가 내다버린 국립중앙의료원… 공공의료의 황량한 현실 비추는 두 거울
등록 2012-06-15 16:06 수정 2020-09-09 14:37
서울대병원. 김명진 기자

서울대병원. 김명진 기자

<em>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신설을 놓고 의사들이 집단 진료 거부에 나섰고, 9월4일 정부와 의료계가 극적으로 합의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의료계의 집단행동의 불씨는 살아있습니다. 이 일련의 사태와 관련해 한국 의료의 공공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한겨레21은 8년 전, 서울대병원과 국립중앙의료원을 중심으로 의료 공공성에 관한 기사를 보도(2012년6월14일. 한겨레21 915호)했습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그때 그 기사를 되짚어봅니다. _편집자주  </em>

서울대학교병원과 국립중앙의료원.

한국의 공공의료를 대표하는 두 이름이다. 상업화로 돌진하는 한국 의료시장에서 두 병원은 의료의 공공성을 지탱할 것으로 기대받는 거대한 지주다. 두 기둥은 지금껏 믿음직하게 서 있었을까. 딱히 그렇지는 않다. 역사를 돌아보면, 두 병원은 심각하게 무책임하거나 무기력했다. 서울대병원이 공공병원의 정체성을 내버리고 의료 상업화의 첨병 구실을 했다면, 국립중앙의료원은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쇠락해갔다. 두 병원의 처지는 우리나라 공공의료의 황량한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다.

서울대병원, 강남에 부자 겨냥 건강검진센터 개원

서울대병원은 시초를 저 멀리 제중원에 두고 있다. 제중원은 1885년 조선 정부가 서양 의료기관으로서는 최초로 세운 병원이었다.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총명한 젊은이들에게 서양의학을 가르쳐 유능한 의료인으로 키우는 것, 둘째는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하는 것이었다. 이 병원은 역사의 굴곡 속에서 광제원, 대한의원, 조선총독부의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등의 이름을 거쳐 해방 이후에는 지금의 서울대병원으로 자리잡게 된다.

1967년 11월6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가 열렸다. 서울대병원의 신축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문홍주 문교부 장관 등 주요 관료들이 모인 회의에서 병원 신축은 국가사업으로 확정됐다. 예산은 13억원이었다. 돈의 출처는 다름 아닌 대일청구권 자금이었다. 식민통치 대가로 일본에서 받은 돈이었다. 선조들의 핏값이라는 얘기다. 원래 5년으로 계획됐던 병원 건물 설립은 우여곡절 끝에 1978년에 마무리됐다. 지금도 서울 연건동에 가면 볼 수 있는 거대한 본관 건물은 그때 완성됐다. 하늘에서 내려보면 ‘>-<’ 꼴인 독특한 구조의 건물은 우리나라의 처참한 공공의료 현황을 숨기는 병풍 행세를 하는 듯했다.

서울대병원은 19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상업화의 급류에 휘말렸다. 서울아산병원과 삼성서울병원 등 이른바 ‘재벌 병원’의 등장이 계기가 됐다. 낯선 경쟁에 몰린 서울대병원은 외국계 경영 자문업체인 맥킨지에 컨설팅을 의뢰했다. 맥킨지는 재벌 병원과의 경쟁에서 처지지 않으려면 인력을 줄이고 수익을 늘리는 ‘효율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울대의 변신은 이때부터 본격화했다. 먼저 다른 대형 병원과의 외형 경쟁을 시작했다. 2003년 분당서울대병원의 개원이 본격적인 신호탄이었다. 3100억원의 예산을 쏟아부은 대형 사업이었다. 잇따라 암센터와 유방센터 등도 들어섰다. 서울대병원의 일탈을 대표한 사건은 2003년 10월 ‘헬스케어시스템’ 강남센터 개원이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강남파이낸스센터 38~39층에 지은 건강검진센터는 강남의 부유층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때까지 재벌 병원들도 미처 시도하지 않은 과감한 ‘비즈니스’였다.

2011년과 2012년 서울대병원 노조는 경영진을 대상으로 환자 보호와 의료 공공성에 관한 15개 요구안을 내놓았다. 내용을 보면, 서울대의 속사정이 보인다. 노조의 요구안 가운데 첫째는 의사 성과급제 폐지였다. 의사들의 진료량만큼 월급으로 돌려주는 급여 시스템은 의사들 사이의 실적을 둘러싼 과열 경쟁을 낳고, 과잉진료로 이어진다는 논란을 불렀다. 공공병원에서 할 일은 아니었다. 둘째 요구안은 표준의료지침을 준수하라는 것이었다. 서울대병원이 진료의 모범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 밖의 요구안들도 환자에게 과도한 부담을 안기는 선택진료비를 폐지하고, 값비싼 특실을 줄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노조의 요구는 모두 환자의 부담을 덜고, 공공성을 강화하자는 내용이었다. 노조의 요구를 뒤집어보면, 상업화한 서울대병원의 현실이 엿보인다. 2008년 노사 간 합의로 만들기로 했던 외상센터 건립도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이유는, 예상대로,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행려환자들 국립의료원으로 데려오지 마라”

서울대 누리집의 병원 소개 부분에서는 ‘의료 선진화’나 ‘첨단 진료’라는 대목은 보이지만, 공공의료라는 문구는 눈에 띄지 않는다. 서울대병원의 구상 속에서 공공의료의 이미지는 이미 희미해 보인다. 정희원 서울대병원장은 2010년 7월 취임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의료시장 개방이 큰 흐름인 만큼 영리병원은 도입돼야 한다.” 국내 최대 공공병원의 시선은 공공보다는 시장에 꽂혀 있다.

서울대병원이 탈선했다면, 국립중앙의료원은 침몰했다. 시작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이야기는 한국전쟁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총탄이 어지럽게 오가는 반도에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 북유럽 3국은 의료단을 파견했다. 300여 명의 북유럽 의료진을 거쳐간 부상자들은 200만 명을 넘어서는 것으로 추산됐다.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떠나려는 유럽인들의 소매를 한국 정부가 붙잡았다. 의료 지원 활동을 계속해달라고 요청했다. 스칸디나비아 3국은 협의 끝에 해마다 150만달러를 모아 병원을 짓고, 5년 동안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80명의 의료인력도 한국으로 다시 파견했다.

1958년 10월, 서울 동대문에 최첨단 병원이 지어졌다. 당시로서는 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장비와 현대식 시설을 갖췄다. 북유럽 3국 국민의 헌신과 인류애의 산물이었다. 깨끗한 병원에 놀란 한국의 촌로들이 고무신을 벗어 손에 들고 들어왔다는 일화도 있다. 대부분 극빈층인 환자들 때문에 손해가 컸지만 비용은 북유럽 국가가 떠안았다. 한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한국 의료진에 대한 임상 교육도 함께 맡았다. 병원의 운영 비용은 당시 한국 보건사회부 예산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스칸디나비아 3국은 1968년에 병원 운영권을 넘겼다. 약속했던 지원 기간보다 5년을 더 머문 뒤였다. 그때부터 국립중앙의료원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정부의 지원은 박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진료 수입만으로 병원은 오래 버텨야했다. 입원 환자의 20%를 차지하는 빈곤층에 대한 진료는 덤이었다. 근근이 유지하던 병원의 위기는 1990년대 말에 도래했다. 정부는 1997년 국립중앙의료원을 폐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공공의료의 구색마저 허물자는 정부의 결정은 시민사회와 의료계의 반발을 샀다. 공공의료의 ‘국가대표’는 쉽게 존폐를 논할 만큼 만만했다. 병원은 그렇게 정책의 사각지대에서 시들어갔다.

2009년 보건복지부가 낸 ‘국립중앙의료원 법인 운영 계획안’은 병원의 참담한 현황을 보여준다. 100병상에 대한 평균 투자 금액은 국립중앙의료원이 427만원으로, 비슷한 규모의 다른 일반 병원의 1761만원보다 형편없이 적었다. 노후한 의료장비(46%)도 다른 병원 평균(30%)보다 많았다. 의사들도 ‘찬밥’ 신세였다. 전문의 5년차의 월급을 기준으로 보면 다른 국립대병원의 3분의 2 수준에 불과했다. 사실상 버림받았다는 말이었다. 일부 사명감을 가진 의료인들만이 남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2010년 정부가 시들어가던 국립중앙의료원에 처방을 내놓았다. 법인화였다. 당시 정부가 내놓은 자료에는 ‘효율성과 경쟁력을 갖춘 병원’ 등 화려한 수사가 붙였지만, 메시지는 간단했다. ‘자력갱생’이었다. 병원은 별도 법인으로 독립되고 경영 책임도 떠안게 됐다. 직원들은 공무원에서 민간인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2010년 새로운 법인으로 태어난 국립중앙의료원은 경찰서와 소방서 등에 공문을 발송했다. 행려환자들이 아프더라도 국립중앙의료원의 응급실로 데려오지 말아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시 일부 언론에서는 국립중앙의료원이 공공의료기관의 본분을 망각했다고 두들겼다. 병원으로서는 경영 ‘합리화’를 위한 대책이었다. 자기 코가 석 자였다.

북유럽 3국의 선의를 배신한 국립의료원 법인화

시장으로 떠밀린 국립중앙의료원은 이제 이전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시가 서초구 원지동에 추모공원을 건립하며 이에 반발하는 주민 여론을 무마하려고 국립중앙의료원의 이전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원지동에 마련된 부지는 약 2만2천 평에 불과했다. 국립중앙의료원의 규모는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병원의 위치도 공공병원으로서는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도시의 중심부에서 멀고, 그나마 부촌에 가까웠다. 변광수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한겨레>에 쓴 기고에서 “국립의료원 매각은 스칸디나비아 3국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 비판했다. 타인이 선의로 준 선물을 내다판 격이니 그렇게 볼 법하다. 그뿐 아니다. 한국 의료의 공공성에 대한 배신이기도 하다.

참고 문헌: <질병치료 50년, 국민건강 100년 국립의료원 50주년>(국립의료원·2008), <서울대학교병원 특수법인 30주년 기념 백서>(서울대학교병원·2008)

 


통계로 살펴 본 공공의료의 현재
공공병상 비율, 국민건강보험제 없는 미국의 1/3 수준
“의료의 공공성을 지킬 것은 확실히 지키고, 공공성을 확대할 것은 더욱 확대해나가겠습니다. 공공의료 30% 공약은 반드시 이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공공의료 서비스의 수준도 더욱 높여나가겠습니다.”
2005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2돌을 맞아 공공의료에 대한 비전을 밝혔다. 해방 이후 쉬지 않고 위축돼온 공공의료에 대해 정부가 구체적인 활성화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물론 당시 약속은 정부가 추진하던 영리법인 도입에 대한 시민사회의 우려를 무마하려는 의도도 일부 있었다.


우리 공공의료의 현재를 통계로 살펴보자. 해방 이후 우리나라 병상 4곳 가운데 3곳이던 공공병원의 병상은 반세기를 지나서는 10곳 가운데 1곳으로 줄어들었다(표1 참조). 민간병상이 무려 384배 늘어나는 동안, 공공병상은 고작 14배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외국과 비교해도 우리나라 공공의료의 존재감은 유독 미약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누리집의 2008~2009년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공공병상 비율은 10%로 회원국 평균(75%)에 크게 못 미친다(표2 참조). 우리나라 다음으로 낮은 일본(26%)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세계에서 의료 분야가 가장 상업화한 미국에서도 공공병상 비율은 34%다.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훨씬 의료시장이 발달한 나라로 풀이할 수 있다.
2005년 노 대통령의 약속은 지켜졌을까. 같은 해 12월 정부는 실제로‘공공보건의료 확충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2005년부터 5년 동안 4조3천억원을 쓰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부분적인 성과도 있었다. 건강보험 진료비‘본인부담상한제’가 도입됐고, 암·심장병·뇌졸중·희귀난치성 질환 등 중증질환의 보장성이 강화됐다. 의료의 공공성은 커졌다. 그렇지만 공공병상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오히려 국립중앙의료원부터 지방의료원까지 그나마 있는 병상을 유지하기도 벅찬 상황이다.‘공공의료=적자’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한 공공병상이 늘어나기는 어려웠다. 공공의료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재정적·제도적 기반이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약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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