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 단골의사? 선택의원?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일지 모르겠다. 모두 공통점이 있다. 지금까지 정부가 동네 의원을 육성하려고 내놓은 정책들이다. 공통점은 하나 더 있다. 모두 실패했다. 정부가 동네 의원을 국민 건강의 ‘게이트키퍼’로 키우려고 세운 정책들은 의료계의 반발로 번번이 무산됐다. 왜 그랬을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하나씩 짚어보자.
<font color="#C21A1A">“주치의 제도 도입되면 국가 통제 커진다”</font>
1996년 당시 보건복지부는 ‘주치의등록제 시범사업안’을 내놓았다. 1차 의료기관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곳곳에서 나올 즈음이었다. 이듬해 서울 서초구와 경기도 파주 등에서 시범사업을 실시하겠다는 계획이 나왔다. 당시 보건복지부는 “환자에게 포괄적이고 지속적인 1차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서 의사-환자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고 제도의 취지를 설명했다.
정부의 구상에 대한의사협회가 반발하고 나섰다. 근거는 명확했다. 주치의등록제가 실시되면 가정의학과·내과 등 일부 전문의에게 환자가 편중된다는 것이었다. 주치의와는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안과·이비인후과 전문의들은 타격이 크다는 얘기였다. 의사 사회의 불안감도 작용했다. 주치의제도가 도입되면 영국처럼 의료에 대한 국가 통제가 커질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결국 의료계의 거센 반발로 주치의등록제는 시범사업도 거치지 못한 채 좌초했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 후보는 대선 공약으로 ‘주치의등록제’를 다시 내놓았다. 이듬해에는 단골의사제라는 이름이 새로 붙었다. 말하자면 주치의등록제의 변주였다. 당시에도 큰 병원과 작은 병원은 역할 분담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뒤죽박죽 경쟁을 하는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다. 의료전달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이 의료계 안에도 적지 않았다. 정부는 ‘보건의료 전달체계의 선진화 방안’을 1999년 내놓았다. 내용을 보면, 대한의사협회의 의견을 수렴해 전문 과목과 상관없이 주치의 자격을 허용해줬다. 일반 주민이 일정 금액의 등록비를 주치의에게 내면, 등록 주치의는 예방보건 서비스, 건강 상담, 운동 처방 등의 포괄적 1차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게 됐다. 왕진, 전화 상담 등의 의료서비스가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야심차게 준비되던 주치의제도는 2000년 여름 이후 흐지부지됐다. 당시 의약분업을 둘러싸고 정부와 의료계가 극한 대립을 하던 시기였다. 의사 사회에서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이 높아져, 주치의 관련 정책은 이후 한동안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게 조용히 노무현 정권 기간도 흘러갔다.
<font color="#1153A4">표면적인 논리의 배경에는 의사들의 조바심도 컸다. 선택의원제는 장기적으로 주치의제도로 가는 전 단계이며, 결국 의료계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간섭을 강화하려는 포석이라고 봤다.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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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C21A1A">의료비 재정 부담에 ‘선택의원제’ 도입하려 했으나 </font>
2008년 집권한 이명박 정권의 보건의료 정책의 핵심은 의료계에 시장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병원에 기업 논리를 적용한 영리법인을 도입하고, 민간의료보험의 이해를 반영해 국민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폐지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한편에서는 급격하게 늘어나는 의료비 지출이 정부의 골칫거리였다. 1인당 보건의료비는 2000년대 들어 해마다 8% 넘게 늘었다. 엉망인 의료전달 체계의 책임이 작지 않았다. 보건복지부와 국민건강보험관리공단을 중심으로 1차 의료기관을 강화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2010년 12월 보건복지부는 의료기관의 기능을 재정립하겠다는 주요 사업 계획을 내놓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의원은 외래, 병원은 입원, 상급병원은 중증 질환의 진료와 연구활동을 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동네 의원을 활성화하기 위해 ‘선택의원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선택의원제가 도입되면, 당뇨·고혈압 같은 일부 만성질환을 가진 환자나 65살 이상의 노인이 동네 의원을 선택해 등록하고 그 의원에서 지속적인 교육과 관리를 받으면 진료비를 경감받게 된다. 이렇게 동네 병원과 환자를 연결하는 고리가 만들어지면, 환자는 안정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받고 의원은 1차 의료기관 구실을 충실히 맡게 되는 구상이 그려졌다.
정부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병원들이 규모에 따라 역할이 제대로 나눠지지 않은 채 유지될 경우 한국의 의료체계는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병원들이 무한 경쟁을 하는 사이, 의료 재정은 축나고 환자들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한의사협회가 또 제동을 걸었다. 근거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선택의원제를 도입하면 신규 개업의들에게 진입장벽이 높아진다. 둘째, 새로운 제도 도입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이 부족하다. 표면적인 논리의 배경에는 의사들의 조바심도 컸다. 다수 의사들은 선택의원제가 장기적으로 주치의제도로 가는 전 단계이며, 결국 의료계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간섭을 강화하려는 포석이라고 봤다.
<font color="#C21A1A">결국 연결고리 완화한 ‘만성질환관리제’ 시행</font>
지난해 10월 정부는 대한의사협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선택의원제를 포기했다. 대신 환자와 의원 사이의 연결고리를 대폭 완화한 ‘만성질환관리제’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새 제도에 따르면, 만성질환 환자는 굳이 한 의원에 등록할 필요 없이 일정한 자격만 얻으면 진료비 할인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당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을 포함한 건강보험가입자단체는 성명을 내어 “복지부가 의료기관 기능 재정립이라는 제도의 본래 목적을 버리고 의사협회의 반발에 굴복한 것”이라고 반발했다. 시민단체의 반발에도 만성질환관리제도는 지난 4월1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보건복지부의 이런 절충안에도 거부 의사를 밝히고 있다. 특히 지난 3월 선출된 대한의사협회 신임 집행부는 정부 규제에 대부분 반대하는 ‘강경파’들로 구성돼 있다. 새 집행부는 오는 8월부터 환자의 권리와 의무를 병·의원에 의무적으로 게시토록 한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에도 반대하고 있다.
1차 의료기관의 역할을 둘러싼 오랜 공방은, 결국 정부의 공공성 논리와 대한의사협회의 ‘밥그릇’ 논리의 갈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공공의료 정책의 오랜 공백 속에서 사실상 ‘자영업자’로 자력 갱생을 강요받았던 의사 집단의 정부 정책 변화와 관련한 거부감도 함께 살펴볼 필요는 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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