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단은 무겁고 단단하다. 2~3주 동안 나무를 물에 담근 뒤에야 칼이 먹힌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 흑단을 깎아 조각한다. 케이프타운 도심 한복판에 있는 ‘그린마켓’ 상인들은 흑단 조각품을 주로 판다. 흑인들이 포장마차를 끌고 나와 저마다 준비한 토속품을 진열하고 손님을 부른다. “어이, 내 친구 ‘브루스 리’, 니하우, 이리 와보라고. 싸게 줄게.” 동양인만 보면 중국말로 호객하는 남아공 흑인들 사이에서 37살의 텐디 비자도 지난해까지 장사를 했다.
짐바브웨 사람들 찾아다니며 공격
지난 2004년 짐바브웨에서 건너온 텐디는 지난해 6월1일, 그린마켓에서 쫓겨났다. “월드컵 때문에 주차장을 새로 만든다고 했어요. 그전부터 재개발 소문이 있었는데, 시 당국에선 ‘사실이 아니니 걱정 안 해도 된다’고만 했거든요.” 원래는 상인 260여 명을 모두 쫓아내려 했지만, 저항이 강력했다. 결국 당국은 주민증이 없는 이주민 60여 명만 몰아냈다. 남아공의 일자리를 찾아 콩고, 짐바브웨, 카메룬, 말라위, 잠비아 등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텐디는 이후 일정한 직업이 없다. “직업을 구하려 해도 남아공 사람들이 ‘너희 때문에 일자리 뺏긴다’고 을러대거든요. 결국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장사밖에 없었는데, 그마저 남아공 사람들이 빼앗아버린 거죠.”
텐디의 사촌동생은 더 끔찍한 일을 겪었다. 2008년 5월, 케이프타운 외곽 타운십에 살던 사촌동생 집에 갑자기 남아공 흑인들이 들이닥쳤다. “모든 걸 빼앗겼어요. 교회로 피신했지요. 일주일 동안 교회에서 지낸 뒤 집에 가봤더니, 형체도 없이 부서져 있었어요.” 남아공 정부는 타운십에 다시 돌아갈 것을 권했지만, 사촌동생 가족은 아예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브람 하네콤은 남아공에 들어온 짐바브웨 이주민을 돕는 시민운동가다. 브람 역시 2008년 5월을 기억한다. 케이프타운 외곽 마시푸멜레 마을에서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 공격’이 일어났다. “마을에서 태어난 3살짜리 남아공 여자아이가 죽었어요. 그런데 짐바브웨 사람이 그 아이를 성폭행하고 죽였다는 괴소문이 일순간에 마을에 퍼졌죠.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이었는데, 남아공 사람들이 삽시간에 돌변했어요. 타운십의 남아공 남자들이 짐바브웨 사람들을 찾아다녔어요. 제가 보는 앞에서 짐바브웨 사람들에게 ‘마을에서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더군요. 다행히 이 마을에서 그때 죽은 사람은 없어요. 짐바브웨 사람들이 순순히 짐을 싸서 나갔거든요. 그들이 집을 떠나자마자 남아공 흑인들은 그 집을 뭉개고 가재도구를 부수었죠.”
당시 사태는 특정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처음 발생해 북쪽의 더반, 남쪽의 케이프타운까지 일순간에 확산됐다. 외국인의 거주지는 물론 그들이 운영하는 노점 등에 대한 공격도 이어졌다. 가난한 흑인들이 사는 타운십에서만 공격이 일어났고, 그 대상은 오직 흑인들이었다. 남아공 시민단체는 60여 명의 이주민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으며 수천 명이 살던 곳에서 쫓겨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제 반빈곤단체인 GCAP 남아공 지부 사무국장 글렌 파레드는 “그 배후에 체계화된 중앙조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고 말한다. “약 5년 전부터 간간이 인종 공격 사건이 일어나긴 했어요. 그러나 그건 아주 예외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이었죠. 그런데 2008년 5월에는 주요 도시의 타운십을 중심으로 전국에 걸쳐 삽시간에 폭동이 번졌어요. 마치 계획된 것처럼 말이죠. 물론 증거는 없어요.”
남아공 정부는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 처음으로 군대를 동원해 진압했다. 외국인 혐오 공격의 정도와 규모가 그만큼 깊었던 것이다. 정부 관료, 시민운동가, 종교지도자, 예술가 등이 요하네스버그와 케이프타운 등에서 외국인 공격 중단을 요청하는 행진도 벌였다. 사건 발생 한 달이 지나자 폭동도 잦아들었다. 그러나 상처 난 자리는 덧나기 쉬운 법이다. 가장 최근의 이슈는 케이프타운에 마련된 ‘이주민 캠프’의 철거다.
하나 남은 이주민 대피소 폐쇄 방침2008년 5월 이후, 케이프타운 지방정부는 이주민들이 임시로 머물 수 있는 캠프를 마련했다. 줄잡아 3천여 명이 이곳에 들어왔다가 지금은 400여 명 정도 남아 있다. 전국 곳곳에 마련됐던 임시 대피소 가운데 하나다. 다른 대피소는 모두 사라지고, 케이프타운에만 1곳이 남았다. 대피소에선 기본적인 구호물품만 제공했다. 이주민들로선 먹고살기 위해 일자리를 구해야 했고, 대피소를 떠나 도시로 가야 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400여 명은 가장 빈한한 이주민들인 셈이다.
그런데 지난 5월 초, 케이프타운 지방정부가 이 대피소를 월드컵 전에 폐쇄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며칠 전, 그 캠프의 어느 이주민이 일 나간 사이에 경찰이 텐트를 뭉개버리기도 했어요. 빨리 나가라는 거죠.” 브람 하네콤은 “아직 공포를 느끼고 있는 이주민에게 적절한 거주지를 제공하지도 않고 무조건 나가라고 하는 것은 헌법적 권리를 완전히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관련 시민단체는 이 문제를 두고 주정부와 협상을 벌이고 있다. 문제의 대피소는 케이프타운에서 자동차로 2시간30분 떨어진 외딴 곳에 있다. 경찰과 군인이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고 브람은 전했다. “주정부의 허락을 받지 못하면 누구도 접근할 수 없어요.”
아프리카에서 남아공은 부자 나라로 통한다. 정치·경제 상황이 불안정한 주변 국가에선 일자리를 찾아 남아공으로 넘어오는 이주민이 끊이지 않는다. 파레드 사무국장은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 세 종류의 대이주가 시작됐다고 설명한다. 첫째, 도시의 흑인들이 도심의 백인 거주 지역으로 이주했다. 둘째, 시골의 흑인들이 도시로 몰려왔다. 셋째, 다른 아프리카 나라의 흑인들이 남아공으로 몰려왔다. “이런 대이주에 대해 남아공 정부는 준비가 돼 있지 않았어요. 정부는 그저 불법 이주민 단속에만 열을 올렸죠. 흑인 이주민에 대한 정부의 ‘불관용’이 사태를 부채질한 측면이 있어요.”
로렌스 해밀턴 요하네스버그대학 교수는 “그 사건은 단순한 ‘외국인 혐오 공격’이라기보다 가난 때문에 발생한 문제로 보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극심한 빈부 격차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먹고사는 기초적 욕구를 위한 경쟁이 치열해요. 그런데 남아공 흑인보다 더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외국인이 등장하니 더욱 위축감을 느낀 거죠.” 그가 경제 문제를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같은 피부의 흑인을 미워하는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 수 있다. 그러나 월드컵 이후 경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절대 빈곤 수준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으면, 남아공 흑인들은 다시 한번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리토리아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25살의 유진 시시는 2008년 5월 외국인 공격 사태 직후 남아공에 들어왔다. 그는 주말마다 짐바브웨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에 나간다. “모든 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건 아니래요. 그래도 그때 피해를 입은 친구들이 적지 않아요. 다들 그 이야기를 드러내는 걸 꺼려요. 지금은 잠잠하지만 월드컵이 끝나면 다시 (외국인 공격이) 시작될 거라고 겁을 먹고 있어요.”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유진은 어떻게 할 것인가. “폭동을 피해 짐바브웨로 돌아가겠죠. 그리고 폭동이 가라앉으면 남아공에 돌아올 테고.” 흑단을 깎아 팔던 텐디도 ‘월드컵 이후’를 걱정한다. “짐바브웨 속담에 ‘사람은 죽을 고비를 두 번씩 넘길 수 없다’는 말이 있어요. 지난번엔 살아남았지만, 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많은 남아공 사람들은 억압을 피해 주변 아프리카 나라로 이주하거나 망명했다. 주변 국가는 그들을 반겼다. 남아공의 양식 있는 사람들은 ‘외국인 공격’을 큰 수치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지독한 가난은 때로 도덕과 양심을 지워버린다. 18세기 남아공에 살던 흑인 족장 몰로미는 ‘아프리카의 소크라테스’로 불린다. 그가 남긴 잠언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너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죽음과 고난을 피해 고향을 도망쳐온 사람들은 네 땅에서 편안한 은신처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네가 통치하는 땅은 여행자와 도망자들의 고향이 되어야 한다.”
프리토리아·요하네스버그·케이프타운(남아프리카공화국)=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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